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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르 월삭을 알아보자.
1. 아야르는 '빛'이라는 뜻이다.
시브월이라고도 하는데 '시브'는 '광채, 영광, 꽃들의 달'이라는 뜻이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 각종 꽃들이 만발하게 피는 시기라서 그렇게 부르고 갈릴리 지방과 언덕은 특히나 아름답다 그래서 이달을 '광채의 달'이라고 한다.
2 성전의 기초를 쌓고 재건축이 일어난 달이다.
왕상6:1,37 제 사년 시브월에 여호와의 전 기초를 쌓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백 팔십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지 사년 시브월 곧 이월에
시브월은 성전의 기초를 쌓았던 때이고, 바벨론 이후 성전 재건축도 같은 시기에 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년 둘째달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스3:8)
오순절을 손꼽아 기다리며 오멜 계수를 세는 우리들은 내면에 있는 성전의 기초를 다시 세우고 재건축을 해야하는 기간이다.
3 예슈아께서 승천하신 달이다.
예슈아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살아계심을 보이신 기간이다. 하늘의 문이 열린 때이다.
4. 두번째 유월절의 기회가 있는 달
"~둘째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민9:9-13) 이야르월 14일 저녁은 유월절에 부득이 참석을 못했거나 부정해져서 지키지 못했을 때 이 날에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번 있다. 그만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알 수있다.
5. 감사함으로 토라에 순종하여 풍성한 첫열매들을 기대하는 기간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애굽에서 나온지 둘째달 십오일에 광야에서 고기와 빵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출1,2)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이야르 달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율법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 시험하신 달이다. 매일 순종하는지 훈련을 시작하신 달이다. 곡식과 과일의 풍성한 추수를 위해 오멜 계수를 세는 이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같아도 감사함으로 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 약속하신 풍성한 첫 열매들을 거두게 하실 것이다.
6 나병 환자는 부정하므로 진영 밖에 격리한다
나병은 옷을 찟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다. 이들은 부정함으로 진영밖에 혼자 살아야한다. 부정하다는 것은 병의 전염성이 있다는 뜻이다.(레13:45,46)
7 진영 안에 들어온 나병 환자에게 왜 손을 대셨는가?
온 몸에 나병이 들린 사람이 예슈아께 나아와 엎드려 깨끗하게 해달라고 구했다. 이때 예슈아께서 그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시자 나병이 곧 나았다. 그런데 어떻게 나병에 걸린 사람이 동네로 들어와 예슈아께 가까이 다가갔으며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치지도 않았고 또 그런 환자에게 손을 대셨을까? 이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닌가? (눅5:12,13)
예슈아께서는 사랑으로 율법을 초월하셨기 때문일까? 즉, 사랑하기 때문에 불법하신 것일까? 사랑으로 불법을 행하는 것이 맞을까? 순종하면서 사랑하지 못할까? 이것은 말이 안된다.
또는, 병이 즉시 고쳐졌기 때문에 더이상 환자가 아니므로 불법이 아닐까?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에 나오는 나병 환자는 온 몸에 퍼진 자였다. 즉, 온 몸에 나병이 가득차게 완전히 덮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퍼진 환자였다.
8 현대 의학이 말하는 한센병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으면 전염성이 있다. 일단 약을 복용하면 더 이상 전염성이 없어진다. 하지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사지(팔다리), 눈, 피부, 신경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환자가 재채기나 기침을 하면 공기 중으로 감염될 수 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시작할 때까지 비말전염이 되지 않도록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는 얼굴을 가리도록 한다. 발췌 wiki how 한센병 치료하는 방법 (6세기에 처음 발견)
과학은 여호와께서 만드셨다. 그러므로 과학은 토라이다. 즉, 병에 대한 하나님의 법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학적인 책이다. 성경은 어떤 과학자보다 지혜롭고 논리적이다.
9 가두지 않는 정한 나병도 있다.
오랜 나병의 경우 이미 부정하므로 가두지 않는다. 이렇게 가두지 않아도 되는 나병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나병이 퍼졌으면 오히려 정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전염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생살이 보이면 전염성이 있다. 생살은 나병이 발병해서 치유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활성 상태이기 때문이다.(레13:10-14)
이 말씀을 통해 예슈아를 찾아갔던 나병 환자는 온몸에 나병이 퍼져 전염성이 없었으므로 동네로 들어갈 수 있었고 예슈아께서 손을 대고 병을 고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 율법을 어기신 것이 아니다.
10 손을 대지 않고 나병을 고치시기도 하셨다.
예슈아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 나병 환자 열명이 멀리 서서 예슈아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다. 이들은 예슈아께 가까이 오지도 않고 예슈아께서도 다가가지 않으셨다. 그저 멀리서 제사장에게 가라고 말씀만 하셨고 길에서 치유되었다. 이처럼 예슈아께서는 사랑을 이유로 율법을 폐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율법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으로 오신 예슈아께서 스스로를 폐한다는 생각도 말이 안된다.(눅17:11-14)
11 예슈아께서는 율법을 어겨서 처형되었는가?
율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므로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은 당연히 불경죄에 해당한다. 더구나 여러 차례 경고했는데도 계속 법을 어겼다면 이는 사형당할 만한 죄가 된다. 가야바는 예수가 여러 차례에 걸쳐 안식일 법을 어겼으며 그에게 수차례 경고한 바 있으므로 이 방법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발췌: 김광우의 예수를 율법을 어긴 이단자로 취급하다).
율법은 여호와의 명령이고 법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슈아께서 여러차례 경고를 받았음에도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은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서 증거가 아닌가? 과연 그러한가?
12 예슈아께서 왜 처형되었는가?
정말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오히려 율법을 지키셨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빌라도 때문인가?
율법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반드시 죽이라는 법이 있기 때문에 예슈아께서 율법을 반복해서 어겼다면 합법적으로 죽일 이유가 되었다.(레24:16)
당시 십자가에 못박아달라고 외치는 대제사장들과 그 수하들의 소리에 빌라도는 예슈아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로마의 법으로는 죄를 찾을 수 없었다. 누가 죄없는 사람을 사형시키고 싶겠는가? 이때 대제사장들과 그 수하들이 율법대로 하면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 어디에도 안식일을 어겼다는 말이 없다. 여기 어디에도 율법을 어겼다는 고소가 없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죽을 이유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죄목이었다.(요19:6,7) 만약 율법을 범하셨다면 죽일 이유를 찾는 자들이 결코 놓칠 리가 없다. 사실 예슈아께서 안식일을 어긴것 처럼 보였던 병자를 치유하신 것도 결국 온전케 하는 샤밧의 합당한 일이었다. 샤밧은 영원한 나라를 상징한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장애가 있겠는가? 아픔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병자를 치유하시는 가장 적절한 날이 언제겠는가? 당연히 샤밧이 아니겠는가? 결국 샤밧에 해야하는 일에대한 개념의 문제였다.
13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지 않았다.
신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고 그 뜻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메시아이신 예슈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게 신성모독이겠는가? 물론 사람을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령이 충만한 상태, 신성이 입혀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어쨋든 예슈아께서 이것은 죄가 아니라 율법이라고 변론하고 있다.(요10:34-36) 이 말씀은 시편에 있는 말씀이다.(시82:6) 그러나 이것을 율법이라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율법(토라)은 넓은 의미로 모든 말씀을 의미힌다. 그러면 도대체 왜 죽으셔야 했는가?
14 누가 예슈아를 죽였는가?
유대인이 죽였는가? 이방인이 죽였는가? 함께 죽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당시 예슈아께서 메시아인지 아닌지 헷갈려했다. 이때 예슈아께서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는지 아닌지 불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가르치시는 예슈아를 따르는 자들은 율법준행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슈아를 죽이려던 자들은 불법자들이었고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즉, 예슈아를 죽이려한 자들도 죽인 자들도 결국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요7:17,19)
15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선지자들을 죽였다.
스데반 집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모든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죽였고 배반하여 죽게하였다. 이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도 지키지 않았다. 여기서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인 모세나 선지자들을 말한다.(행7:52-58)
16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 준행자가 아니었다.
예슈아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책망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잘 버리고 그러한 일을 많이 행하는 불법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 준행자들이 아니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를 더럽히고 사람들도 더럽히는 자들이다.(막7:5-16)
그러나 오늘날 율법 준행자들을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이고 교만하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다.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바리새인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 바리새인이고 예슈아와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이다. 우린 성경을 똑바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예슈아를 죽인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이고 다시 오실 예슈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시대 대세는 전통이었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과감히 전통을 거절했다. 그래서 이런 전통주의자들에 의해 율법 준행을 가르치던 예슈아께서 죽으신 것이다.
17 예슈아께서 율법 준행을 가르치셨다.
계명 중에 가장 작은 것 한개를 무시하고 행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된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천국 가르침을 통해 예슈아께서 가르치신 것이 율법 준행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키지 않는 전통주의자들이었다. 최소한 이들보다는 나아야 천국에 간다고 경고함으로써 당시 실세들을 불편하게 했다.(마5:17-20)
18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은 진리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동일하다.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 이 또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우리의 출신 성분을 보지 않으신다.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없이 망한다. 율법이 있지만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있든 없든 범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율법을 듣고 알고 있다고 해서 의인이 아니라 행하는 자가 의로운 자이다. 이것은 다른 사도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한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르게 생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율법은 유대인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신 법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고 주신 가르침이다.(롬2:9-13)
19 옛 남편이 죽었다.
그렇지만 옛 남편이 죽지 않았는가? 남편이 있는 여인이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매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 즉, 남편이 죽으면 법에서 자유로와진다. 우리도 그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예슈아께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옛 남편이 율법인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같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 죽어야 우리가 자유로와지는가? 이것 거의 괴변에 가깝다. 물론 율법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두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순종의 법과 불순종의 법 두가지 이다. 우리가 범죄하고 심판을 받는 것도 율법이다. 그러므로 죽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율법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신 순종의 축복도 죽는 것이다. 여기서 죽어야 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 속에 죄가 죽으면 죄의 법도 유명무실해진다. 그래서 자유자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죄가 살아있어 주인이 마귀였다면 그래서 죄의 법에 매여있었다면 이제는 죄를 끊어냄으로 예슈아께 가서 자유자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헷갈려서 율법을 죽이고 언약을 바라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자.(롬7:1-23)
20 버리지 않으신다. 반드시 산다.
우린 사울이 들은 거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떠할까?
물론 왕위를 폐하신 것이지만 이 말은 분명 어마어마한 두려운 협박일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악인으로써 죽을 거라는 예언을 들었을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저당물을 도로 주고 강탈한 물건을 돌려 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죽지 않을거라 약속하셨다.(겔33:14-19)
예언의 목적은 순종이다. 율법과 계명대로 회개하고 준행하게 하는 것이 그 이유가 되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예언은 거절해도 된다. 예언으로 두려움을 주어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어둠이 원하는 일이다.
# 이처럼 우린 율법을 잘 몰라서 예슈아께서 마치 사랑으로 율법을 어기신 것처럼 오해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너무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오해한다. 우린 성경을 어쩌면 거꾸로 읽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도바울이 율법을 지키라고 말한 것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린 성경을 오해해서 거꾸로 알고 있는게 많다. 그래서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를 쓰게되었다. 만약 사도바울과 예슈아를 오해하면 우린 예슈아를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떠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바른 예슈아상을 가르치고 바른 바울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떠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의 생각이 이방인의 관점이라면 우리는 결코 성경을 똑바로 볼 수 없다. 꼭 많은 분들이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지식에까지 새로와지는 은혜를 체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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