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가 나타났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 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한문성경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한문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朴春權)관리는 6척이나 되는 장신에 기골이 장대하여 용맹스럽고
힘센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 토마스 선교사님의 성경보급으로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았다.
그 중에 선교사님을 죽인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님이 건내준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최치량이라는
당시 12세 소년이 그것을 받아서 박영식 당시 평양성 관리(영문 주사)에게 건네주었다.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다.
도배를 하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몸을 이리 뒤척여도 성경, 저리 뒤척여도 성경이 보였다.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1890년 평양에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가 박영식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벽에 중국어 성경책이, 벽에 도배되어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먼저 평양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펫 선교사는, 평양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선교했다고 합니다.
이에 1893년 모펫(Moffett, S. A.)은 평양에 선교사업을 위해 정착하면서
한석진(韓錫晉)을 조사(助師)로 삼아 널다리(板洞)에 세웠던 회당으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라고 하였는데,
그 후 1899년 장대현(장대째 章臺峴)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교회로부터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1899년 이 교회에서는 병인양요 때 중군(中軍)으로 활약하여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포계(褒啓)로 안주 우후(虞候)라는 직책을 받은 바 있던 박춘곤(朴春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하여, 교회당을 장대현에 건립하게 되었습다.
한국인 교인들의 헌금액 5,000여 원과 선교사 보조금 수천 원으로 72칸의 교회당 건립에 착수하여, 1900년 준공하였습니다.
그 해 장대현교회는 김종섭(金鍾燮)을 장로로 장립(將立)하여 당회(堂會)를 조직하였다.
예배당은 ㄱ(기억)자로 건립되어
한때 남녀가 따로 한쪽 칸을 차지하여 앉도록 하였다.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1월 14일부터
당시 신학교 졸업예정자인 길선주 장로의 인도로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9월 길선주 목사는 안수를 받고 위임목사로 시무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초대교회 지도자 터툴리언(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 약 155~240년 경)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 교회(담임목사는 토마스의 아버지)에서
몇 달이 지난 후에,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신학생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가 만주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1872~1910 중국사역) 그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얘기를 듣게 됩니다. 존 로스는, 심양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심양 남쪽 40킬로 지점에 <고려문>이 있었는데,
거기엔 조선인들이 중국에 무역하러 오던 고을이었습니다.
존 로스 선교사도, 중국에서 사모를 잃었다.
그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다가, 소천하였다.
그래서 동병상련, 중국에서 아내를 잃은 토마스에게 더욱 관심이 깊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존 로스의 여동생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자기 부인이 낳은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됩니다.
이 여동생이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결혼하게 되어,
결국 존 로스와 매 타이어 선교사는 매제지간이 됩니다.
그래서 심양 지역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만나서, 조선말을 배우며 전도를 하였다. 이후 인삼장사군인 서상륜도 합류하였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킹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당시 통용하던 문자(한자어와 이두)로 번역하여 1875년에 신약성경 27권을 완역하게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지 9년만의 일입니다.
1882년에 쪽복음 형태로 출판하기 시작하여 의주를 통해 밀반입합니다.
로스 선교사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勸書人,colporteur)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성경과 그 밖의 크리스토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하였다. 당시에는 크리스토교 서적이 금서였기에 밀반입을 한 것입니다.
서상륜은 자택인 황해도 소래(솔래)에 교회를 세우고(1883년 5월 16일) 보부상인들과 권서인들을 통해 조선 전국에 성경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후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년 8칸을 증축하였습니다.
한편, 서상륜 장로가 1885년 7월 2일에 서울 새문안교회를 시작하였다.
(정동제일교회가 1885년 7월17일 그리고 인천내리교회가 1885년 7월29일 설립)
이렇게, 한국교회 선교는 다른 나라 선교와 이점이 독특합니다.
선교사님들보다 성경이 먼저 전래가 된 것입니다.
출처 : 뉴스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