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 모음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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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구음악
최정란
부탁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마셔요, 쐐기풀엄마
나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에요
이마가 볼록 튀어나온 장미가 손을 뿌리쳐요
장미의 혀에 찔린 쐐기풀밭
장미의 배경으로 흘러다니는 쐐기풀의 노래
낮은음자리표 위에서, 장미가 옳아요
벼락 치는 밤, 번개를 품은 후
쐐기풀은 더 이상 쐐기풀일 수 없어
쐐기풀의 가늘고 야윈 몸은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때까지 부풀어
쐐기풀 안에 쐐기풀은 없어, 장미가 옳아요
넓은 세상으로 나갈 거예요, 쐐기풀엄마
이 옷장은 너무 갑갑해요
쐐기풀의 심장을 찢고 나오는 장미향기
꽃구름 이마, 분홍조개 귀, 달삭달삭 입술
말랑한 손톱 발톱, 장미가 옳아요
장미의 부탁을 기다리지 않았기에
장미의 뺨은 더 이상 분홍일 수 없는 분홍
장미의 부탁을 기다려야 한다면
레일과 손잡이가 망가진
쐐기풀서랍은 언제나 장미를 낳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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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물재판
최정란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살인사건이 있고 일 년이 지나면
범인을 강물에 들어가게 한다
슬픔의 시간을 보낸
피해자 가족은
그를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게 깊이 밀어 넣을 수도 있고
그를 용서하고 물 밖으로 나오게 할 수도 있다
그를 죽게 내버려두면 평생을 슬픔 속에 살게 되고
그를 용서하면 행복이 온다
낮 꿈에도 가위눌려
허우적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나는
누구를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소한 일상의 재판으로
얼마나 자주
스스로를 가두는 판결을 내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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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중사원
최정란
어린 기도가 흙에 잔뿌리 내릴 때
뿌리 아래 긴 공중이 생길 줄 알았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꽃을 피웁시다
문 없는 출구와 바닥과 아치형 천장, 긴 바람의 건축물
제 발 밑에 세워진 줄
꽃은 영원히 모를지라도
누군가 비우는 자리를 빠르게 채우는 것이
공중이라는 것은
시간의 내부를 훑고 가는 바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빈자리를 빈 채로 두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다행입니까
모래밭에 올라와 죽은 고래 뼈 궁륭처럼
내장을 파낸 거대한 짐승처럼
반 원통형 공중이 흙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흙의 내부가 텅 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오랫동안 작심하고 기다린 듯
바닥 없는 시간의 궁륭
아무도 머물지 않고 빠르게 통과해야 하더라도
뿌리가 움켜쥔 삶의 검은 속살이
시간의 바람에 속절없이 밀려 나가는 공허를 모르더라도
우리의 기도는 꽃 피는 일에
몰입합시다
뿌리를 뒤흔드는 진동에도, 밤낮 없이 달리는 차들 행렬에도
향기로운 침묵과 바람의 예배는
벼랑 위의 뿌리를 다시 흙의 경전에 박아 넣을 것입니다
바닥을 뚫고 가는 굴착기 진동에 놀라 떨던 꽃받침도
세상의 진동과 소음에 익숙해지고
뿌리내릴 깊이가 없어진 뿌리깊은 검은 바람도
내일 떠나도 미련 없는 삶을 웃으며 견디는 뿌리의 깊이한계선도
무심한 일상이 되겠지만
흙도 공중도 서로의 어둠에 익숙해지자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제 한계를 먼저 설정하고 꽃 피우는 슬픔은 바닥이 없으니
우리는 다만
서로 다른 장르 출신들답게
제각기 간절한 기도로 꽃을 밀어 올립시다
고래의 숨처럼 꽃을 피웁시다
거대한 삶의 바다에서 물 위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몰아쉬듯이
꽃을 몰아쉽시다
이따금 분수처럼 쏟아지는 꽃의 불면이
견고한 믿음의 바닥을 꿰뚫고 솟아오르겠지만
꽃의 입구는 당분간 온몸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가시 한 점 남김없이 흔들려도 좋을 것입니다
꽃의 허공을 뚫고 들어오는 신앙심 깊은 차들
묵음으로 속도를 늦출 것입니다
꽃의 십자가에는 아직 가시가 많고
꽃봉오리인 어린 신께서 주무실 시간이므로
대지의 숨구멍으로 드나드는 천사의 날개 고요할 것입니다
바람 위에 떠 있는 이 사원은 어떤 장르일까요
꽃은 어떤 장르로 허공의 진화를 거듭할까요
이 허공에서 꽃은 얼마나 간절한 기도의 사원이 될까요
질문과 질문을 끌고
대지의 들숨과 날숨, 길게 교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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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해 여름
최정란
장마가 오기 전에 엄마는 이층에서 굴러 내려오고
엄마가 누워서 꼼짝달싹 못하는 동안
쌀통에서는 쌀벌레가 날아오르고
계단에는 모서리마다 이끼가 파랗게 피었다
마당에 온갖 꽃들을 심어놓은 엄마가
꽃처럼 심겨진 침대는 엄마를 심은 인공정원,
엄마가 심긴 화단 담벼락을 타고
줄장미 덩굴이 올라가고 꽃은 아픈 줄도 모르나
엄마 팔에서 덩굴손처럼 돋아난 링거 줄이 올라가고
엄마, 장마가 너무 오래 가요 빗소리를 들으며
담벼락을 뒤덮은 줄장미가 지는 동안,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빼먹은 나는 언니의 바지를 늘리는데,
재봉틀 소리가 처마 밑에 낙숫물 자국처럼 점점이 파인다
내 키는 언제까지 자라나, 엄마는 날마다 누워있고
엄마가 누워서 천정만 바라보는 동안
나도 언젠가는 엄마가 될 텐데, 딸은 엄마 닮는다는데
나도 저렇게 몸 안에 갇히게 되면 어쩌나
엄마는 정신이 초롱초롱해서 몸이 감옥이고
나는 내 발로 위층 아래층 쫓아다니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언니도 오빠도
말 해주지 않고, 여름 내내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안전하게 담겨 있는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스무 살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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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넥타이
최정란
고치 속의 누에처럼 웅크리고 잠든 그 남자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생의 중심에 묶인 넥타이 푼 적 없다
벼랑 끝에 매달려 흔들리다가,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팽팽하게
목을 조이는 목줄 끝
날개와 맞바꾼 계약의 화살표는 아래로 향한다
참을 수 없이 팽창된 날카로운 한 순간이
뜨거운 절망을 쏘아내고 곤두박질 치면
순한 짐승처럼 늘어지던 넥타이
날아오르려는 순간 번번이
추의 무게에 발목 잡혀
절벽 아래로 수직 강하한다
그는 가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자랑스런 기호 풀고 싶었던 적 없었을까
올가미처럼 조여드는 넥타이 대신
비린 달빛에 입덧하는 늪으로 누워서
한 달에 한 번, 뜨거운 가시연꽃 같은 것
생의 외곽으로 은근히 밀어내고 싶지 않았을까
중심을 가장 가파른 벼랑에 묶어 둔 블랙유머
누구의 매듭을 풀고 나온 넥타이일까
물뱀 한 마리, 수면 위를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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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두실 역 일 번 출입구
최정란
퇴근길, 지하도 계단을 올라서면
맥도날드 불빛을 등지고 일 톤 트럭 한 대가
가파른 작은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 불빛 아래 손짓으로만 말하는 두 사람
이마에 맺힌 근심을 닦으며 말을 굽는다
말과 말 사이, 사이
숨을 고르는 손으로
꽃 모양 틀에 묽게 풀린 소리의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잘 발효된 침묵을 한 줌 얹자
설익은 말들이 숨을 죽이고 돌아눕는다
반죽 묻은 손으로 간을 맞추고
삐걱거리는 관절의 안부를 묻는 동안
젖은 말들 불의 온기를 들이마시고
완숙의 음절로 한껏 부풀어올라
두꺼워지는 어둠을 몇 걸음 뒤로 밀어낸다
종이봉지 안에서는
단골이라고 한 마디 더 얹어준 덤의 말
속에 든 말없음표까지 골고루 뜸이 들고
보드랍게 말랑거리는 말을 받아든
나는 목에 걸린 고등어 가시 같은 누추한 설움에
목 메인 일상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무성한 차가운 말들이 파놓은
캄캄한 지하도 같은 숨은 함정들을 용서한다
오늘도 두실역 일 번 출입구 농아 부부
소리 없이 따뜻한 느낌표 같은 붕어빵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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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반환 점
최정란
어떤 바다거북은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가서 다시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돌아와 생을 끝낸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단 한 번의 왕복
그것이 일생일 수 있다면
가던 방향을 미련 없이 버리고 돌아서야 하는
반환 점은
대양의 물결 속 어디쯤일까
두께가 나날이 얇아져 가는 지느러미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어디가 반환점인지, 금지된 수역인지
물빛을 살피지 못하고 파도에 떠밀려 허우적거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여기가 어디일까,
붉은 해일에 숨이 막힌다
한 번 큰 물결을 타면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어 질까봐 아주,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봐
앞을 막아서는 노을을 물리치며
허겁지겁 서둘러 아침에 떠났던 집으로
백 번도 넘게 돌아오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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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백만 년에 하루쯤
최정란
넘쳐 오르는 기쁨을 자제하기 위해
골치 아픈 책을 읽거나 무겁고 진지한 문제에 골몰하는
이상한 날이 있다 백만 년에 하루쯤
오늘 하루만 기뻐하는 것을 용서하면 안 되겠니
백만 년에 하루, 이 드물고 드문 기적 앞에서 왜 머뭇거리는가
환호성 지르며 기뻐하지 못하는가
심지어 가책을 느끼는가
슬픔의 지층 켜켜이 얼어붙은 얼음의 희디흰 동토에
기쁨 한 방울 웃음 한 점 떨어뜨릴까 겁내는가
슬픔의 순수가 훼손될까 겁내는가
백만 년에 온 단 하루를 마음대로 기뻐하지 못하고
기쁨 위에 검은 천을 씌우고
부풀어올라 날아오르려는 기쁨을 누르는 소심한 짐승
이 기쁨이 뿌리깊은 슬픔을 담보로 한 것이 아니기를
암울한 시간을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쯤
환한 나를 나는 기어코 용서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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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버뮤다 제라늄
최정란
사차원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
배도 비행기도 빨려 들어가는 삼각해역, 한 때
벽이었던 파도였던
수많은 얇고 향기로운 입구들 열리고 있다
삼차원에서 조금 더 놀다 가겠어
내가 사랑한 사람 몇
그곳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때
한쪽 발만 몰래 빠져나와
대열을 이탈했을까
혼자 남은 삼차원의 세계는
재미있다 못해 외롭고 슬프고 심지어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이 너무 많아
이 아름다움 차마 홀로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은 단박에 알아차린다
아무리 숨겨도
나의 한쪽 발이 사차원에 걸려있다는 것
자주 절름거리고 비틀거리는 나의 고독을
춤이라 오해한다
다 춰, 더 춰, 더 춰 봐, 박수소리에
고독을 에너지로 쓰기 시작했을까
제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광대답게
이 우스꽝스러운 춤 그칠 수가 없다
박수소리의 환영 속에서
춤추고 춤추고 또 춤추고
춤추고 춤추다 쓰러질 때까지
허리케인 회오리쳐 피어나는 꽃의 해역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은 모두 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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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보리밭
최정란
초록침대가 흔들린다
기름진 푸른 거웃 일렁인다
한바탕 바람이 뒹굴고 간다
황사 자옥한 하늘
진달래 꽃무덤 덮으며
건조주의보가 내린다
산이 구름브래지어를 벗는다
목마른 하늘 앞에
물 오른 젖가슴을 들이민다
푸른 수유의 풍경
사월이 서둘러 흐트러진
초록시트를 정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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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국꽃 피거든
최정란
꽃 한 송이가 마음 하나라면
저 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한 개의 알처럼 두근거리자면
몇 개의 마음을 주먹밥처럼 뭉쳐야 하는지
환하고 둥그런 저 설레임이
모서리를 자르며 입은 상처들을 꾹꾹 뭉쳐 놓은 것이란 말인지
하나의 마음도 주체하지 못해서
들었다 놓았다, 풀었다 맺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덕을 부리다가, 꽃의 몸을 빌려 빵반죽처럼 부풀어도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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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쓴맛이 사는 맛
최정란
통이 비었다 쓰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이따금 큰 숟갈로 썼구나
시간이 없는데 식탁을 차려야할 때
급한 불을 끄듯 설탕을 더한다
그때마다 요리를 망친다
손쉬운 달콤함에 기댄 대가다
마음이 허전하고 다급할 때
각설탕 껍질을 벗기듯
손쉬운 위로의 말을 찾는다
내가나를 망치는 줄도 모르고
임시방편의 달콤함에 귀가 썩는 줄도 모르고
생의 시간을 털어 가는 달콤한 약속들은
내 안이 텅 비어
무언가 기댈 것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착한다
내 안에 달콤함을 삼키는 블랙홀이 있다
주의하지 않으면
언젠가 생을 통째로 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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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인 구함
최정란
대구 발 시외버스 타고
토요일이면 집에 갔다
한껏 볼륨 높인 뽕짝을 들으며
좌석 등받이 뒤편에
애, 인, 구, 함,
볼펜으로 갈겨 쓴 어설픈 춘정
코웃음치던 스무 살
그 때는 몰랐다
사람은 평생 자신의 등뒤에
절실하게 구하는 것
써 붙이고 다니게 되리라는 것,
지울 수 없는 구, 함, 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매달고 다니게 되리라는 것,
가끔 남에게 등 돌리면서
앞선 남의 등을 보고 달리는 동안
멈춰 서서 돌아본 적 없는
뻣뻣한 내 등은
무엇이 필요하다는 구, 함, 을
고함처럼 크게 외치고 있었을까
내려꽂히는 햇살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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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름
최정란
1.
굳이 절약할 생각은 아니지만 나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굳이 아껴두어야 할 것도 아닌데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찾지 않으면 허공 어딘가 떠돈다
쏜살같이 귓전으로 달려오지만
부르는 순간 사라진다
남이 주로 사용하는데,
실은, 아무도 쓰지 않는 날이 더 많다
가끔 혀끝에서 맴돌다
끝물포도 알맹이처럼 터지지만
말라붙은 포도잎이
문패 대신 붙어있을 때도 있다
2.
내 것인줄 알았는데, 본래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터넷 검색해보면,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많다
투병중인 환자, 재무재표를 공개중인 회사대표, 푸라하 민박을 예약
한 여행객, 슬픈 영화의 주인공, 토피어리 만들기를 가르치는 교수, 플
라맹고 강사, 퇴직공무원 빨간 볼링공을 던지는 아가씨, 부당해고를 항
의하는 노조원,
적어도 아홉 명의 내가 아닌 내가 제각기 나를 살고 있다
가끔 나는 그 이름에 나를 집어 넣어보기도 하는데
남의 옷에 때 묻히는 게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다
실은 그들이 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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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형 뽑기
최정란
그들은 나더러 사냥꾼이 되라 해요
질주와 군무를 잊어버리고
겁먹은 채 웅크린,
저 갇힌 짐승들을 잡으라 해요
거짓 야성을 연마하라 해요
껍질은 내다 팔아 혼례를 치르고
고기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먹이고
신부가 누울 방 한 칸을 차지한
짐승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아직 시작되지 않은 아늑한 사랑을 위한
신혼의 방을 차리라 해요
인형상자 만한 방 하나 얻기 위해
얼마나 피 흘려야 하는지 몰라
이 도시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오백 원 동전을 움켜쥐고 사냥터로 모이는 밤
나는 문도 벽도 지붕도 없는 강으로 가요
고기 맛에 중독된
피 묻은 입, 피 묻은 손을 씻고
강물을 끌어와
내 안의 피투성이 사냥터를 씻어 내리고
깎아지른 막막 캄캄 바위절벽에
없는 사랑의 기록
찬란한 가난의 암각화를 새기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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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미키스
최정란
장미와 입을 맞추었지
가시를 끌어당겨 장미 향기를 입술 안으로
깊이 빨아들였지
장미는 벌린 내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내 심장을 꺼내 가졌지
그 날부터 나는 심장이 없지
장미와 같은 시간을 호흡했지
바다와 하늘도 같은 고요를 들이쉬고 내쉬었지
별의 어깨를 출렁거리며 밤과 낮이
파도처럼 흰 한숨을 몰아쉬었지
그 날 장미에 심장이 생겼지
세상은 장미의 들숨과 날숨으로 채워졌지
나는 한 점 후회 남김 없어
다만 후렴이 들어간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지
짧은 시간을 함께 한 꽃은 빨리 지지
짧은 시간에 모든 숨결을 다 주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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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접선
최정란
깜빡, 깜빡, 공중에서 모스부호가 만난다
마주 보는 아파트, 불 꺼진 앞 ,뒤베란다
담뱃불, 빛을 전송하는 두 남자
오늘도 별일 없었느냐고
말없는 안부가 공중을 오고 가지만
주차장에서 날마다 스쳐도
누구인지 서로를 알지 못한다
삶의 숨겨진 비밀을 찾아
선으로 연결되어 그물코처럼 당겨지는
조직에
한 점으로 심겨진 스파이들
깊은 밤 같은 시간 깨어있는 담배 하나로
잠든 가족에게 보여주지 못한
서로의 어둠을 나눈다
필터로 다 걸러내지 못한 한 개피의
남자라는 기호,
외로움의 코드로 해독되지 않는 난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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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하철 손잡이들
최정란
삽은 어디로 가고, 자루만 남았다
늦은 밤 지하철 천장에 매달린 삽자루들
보이지 않는 삽날, 하늘 향해 세우고,
갑작스런 생의 급제동에도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끝없이 파야하는 삶의 구덩이들, 밤늦어
빈 좌석이 듬성듬성 생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뒷덜미 움켜잡는 운명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새벽같이 일찍 일어나, 선 채로
어디 먼 곳까지 가서, 종일토록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온 것일까
단단히 움켜쥔 삽자루 끝까지 전해오던
삽날에 부딪히던 돌멩이의 기억이 얼얼한지
지그시 눈 감은 이마가 찡그려진다
비몽에서 사몽으로 흔들리는 삽자루들
단조로운 두 박자의 춤곡에 맞춰 밟는 허공의
스텝 넘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꿈속으로
보이지 않는 삽들이 어둠에 파놓은 별들,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기라도 하는 듯,
내릴 역을 놓치지 않아야, 내일 다시
저 삽자루를 잡고 삽질할 것이라는 듯,
아침부터 삽자루를 잡았던 차가운 손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얕은 잠의 끈을 바투 잡는다, 열차가 어느
가파른 모퉁이를 둥글게 휘며 돌고 있는지
규칙적인 추운동이 일제히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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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짧은 시간을 여우빵집
최정란
오후 다섯 시의 여우빵집은 골목이 활동무대다
아파트와 노을 사이, 지하철역과 퇴근 사이
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시식용 크림빵을 골목에 내놓는 빵집 주인은
프렌치 자수가 놓인 하얀 포플린 앞치마 밑에
통통한 꼬리를 숨기고 있다
골목을 사로잡은 빵맛의 비법이 꼬리에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이미 사람이 된 지 오래인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앞에 꼬리를 내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기적으로
소독차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처럼
갓 구운 빵 냄새를 자욱하게 풍긴다
아무리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여우는 여우인데
왜 꼬리 흔들고 싶을 때가 없을라고,
입과 입을 건너가며 소문들 수군거리는 동안
저도 모르게 출출해져서
단팥빵과 곰보빵 봉지를 집어드는 사람들
등 뒤에 꼬리 하나씩 달고 나온다
누구의 뒷모습에서 방금 빠져 나왔는지
보이지 않는 꼬리가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다
빵 냄새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
《20》
친절한 인생
최정란
처음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때 알았어야 했어
삶은 내게 친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
누가 백일홍의 발목을 거는지 걸핏하면 엎어지지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알게 되지
허방은 지하주차장 경사로에 숨어 있고
허방은 꽃 속에서 나풀거리며 날아오르고
이번 생은 발에 안 맞는 빨간 뾰족구두
이번 생은 킬힐에 안 맞는 평발
그렇다고 내가 삶에게 불친절할 필요는 없잖아
백일홍에게는 백일홍의 하늘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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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시선물 한아름 감사히 받습니다
하눚도 건강한 즐거움 가득하세요 김용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