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건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에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죽음.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사살당함. 김재규-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안가 연회장에서 죽임.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심수봉-유명 신인가수, 사건 목격자. 신재순-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의 대학생이자 모델. 사건 목격자. 사건 가담자들 김재규-중앙정보부장-1980년 5월 24일 교수형 박흥주-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1980년 3월 6일 총살형 박선호-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성옥-궁정동 안가 운전기사-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이기주-궁정동 안가 경비과장-1980년 5월 24일 교수형 김태원-궁정동 안가 경비원-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서영준-궁정동 안가 경비원-징역형 뒤에 석방됨 이들 중 서영준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에 처형됨. 다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처형됨. 간접 당사자들 정승화-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김정섭-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망자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죽음.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사살당함.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김용섭-대통령 경호원,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김용태-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생존자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박상범-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심수봉-유명 신인가수, 사건 목격자. 신재순-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의 대학생이자 모델. 사건 목격자. 1990년대 초 서빙고 분실 사건의 개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2인자'라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다시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 대통령의 명령을 전한다. 차지철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사전에 총을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숨기고 박정희와 대면했다. 그리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그 시간에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호텔에서 데리고 온 심수봉과 신재순에게 보안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일행은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고 두 명의 젊은 여성, 심수봉, 심재순이 박대통령의 양편에 앉아서 술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을 겸한 저녁식사를 들면서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비난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 말하였다. 질타를 받은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정승화와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때가 저녁 7시 10분경이었다. 다시 연회장에 가고 문 앞에서 총 체크를 하는 순간에, 차지철이 나타났다. 김재규는 총을 도로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봤고, 연회장에 들어오는 때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는 다시 나가 박흥주와 박선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각하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그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다시 돌아와보고 나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 팔목 사건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를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간에, 김재규가 김계원에게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형님, 각하를 좀 똑바로 모십시오! 순간 분위기는 매우 싸늘해지고 다시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해서는 안될 엄청난 욕을 내뱉고 만다.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 너 이 새끼 차지철, 아주 건방져! 죽일 놈! 순간 김재규가 총을 쏘고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무슨 짓이야? 김부장! 하고 박정희가 호통치자 김재규는 다시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이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박선호는 안재송과 정인형을 차례로 대기실에서 총을 쏴 죽였으며,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여버렸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 쪽에 조준했고 차지철은 계속 김재규에게 저항하는데 김재규가 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정전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꿨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 때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고,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에, 다시 김재규가 들어와 있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을 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피하고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쐈다. 차지철은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가 어디론가로 숨었다. 김재규는 그들이 도망가고,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맞은 것이었으며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정승화와 김정섭도 20여발의 총소리에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나가서 정승화와 김정섭과 같이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갔으며,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와 같이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러나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오자마자,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본부로 가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라고 다시 말했다. 궁정동 안가에서는 경비과장 이기주가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사살시킨다.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이렇게 죽어버렸다. 대통령 경호관 김용섭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집행 한편, 정승화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27일 오전 0시 40분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이를 보안사령부에서 인계받아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이후 김재규는 남영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소속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라는 심한 욕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쇠파이프도 맞고, 전기의자로 심한 고문까지 당했다.거의 일제 강점기 당시 수준이라는 것이다.군법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 5월 24일 당시에 서울 서대문에 위치하던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사건의 의의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경호원들 모두(서영준 제외) 사람을 죽였으나, 그들은 상관인 김재규의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군사법원에서 주관했기에 관대한 처분을 받기란 사실상 어려웠으며, 상관의 명령 하나로 대통령을 죽인 공범이 되어 사형당하였다. 김재규의 본뜻이 민주화를 위해서든, 차지철에 대한 원한이든, 어떠하였든, 이 사건은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결과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에게 정권을 장악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유병현 장군은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당시 유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십이륙사태10·26 주범 김재규 유언록 대통령 운전기사 김용태 식당 벽면에는 탄흔 자국이 많이 발견 되었다. 법정에서 박흥주 대령은 ‘사람을 향해 총을 쏘진 않았고 벽을 향해 쏘았다’고 진술 했다. 박흥주 외 나머지 궁정동 요원들이 동시에 발사한 총격에 쓰러진 대통령 경호관 김용섭과 운전수 김용태. 식당에서는 2명의 사망자와 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박선호에게 저격당한 경호처장 정인형. 박선호는 해병대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정인형에게 ‘다 같이 살자’고 설득하려했으나,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정인형과 함께 대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던 경호실 부처장 안재송은 속사권총 국가대표 출신의 속사수 였지만,박선호가 쏜 총에 저항할 기회도 없이 쓰러졌다. 테이블에는 채 먹지 못한 저녁 식사가 남아있다. 연회장 한쪽에 있던 옷걸이에는 박정희대통령의 상의가 걸려 있었다.주머니에는 지갑과 도장, 구두솔이 달린 열쇠고리 등의 소지품이 나왔다. 79년 10월 29일. 이날 연회에는 두 명의 여인이 동석했다. 이들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스타킹 자국.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졌던 왼쪽 방석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상위에 먹다 남은 음식들과 기타, 피를 막던 수건이 남아있던 사건현장. 가운데 의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다. 총격직후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연회장. 차지철 경호실장의 시신이 방치 되어 있다. 양어장 맞은편, 10.26 사건현장인 연회장이 보인다. 내부구조 역시 거실의 절반가량을 양어장으로 꾸면 놓은 독특한 구조.나선형 계단을 지나 2층에는 김재규 부장의 집무실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마직막으로 신었던 구두. 나동 현관. 현관에는 구두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동 측면. 오른쪽에는 제미니가 주차되어 있다. 대통령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궁정동 안가 5개 동 중 79년 10.26 사건이 일어난 나동 건물 정면. 유리창으로 전면을 장식한 독특한 구조. 1980년, 10.26 재판정 80년 3월 6일, 유일한 현역 대령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 총살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80년 3월 6일, 유일한 현역 대령이었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이 총살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10·26 사건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권력간 암투에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에 박정권의 핵개발과 관련된 것, 그리고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이들 중 서영준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아 1980년에 처형됨.
다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처형됨.
간접 당사자들
정승화-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김정섭-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망자
박정희-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죽음.
차지철-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사살당함.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죽음.
김용섭-대통령 경호원,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김용태-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과 박흥주에 의해 죽음.
생존자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박상범-대통령 경호실 수행계장.
심수봉-유명 신인가수, 사건 목격자.
신재순-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3학년의 대학생이자 모델. 사건 목격자.
첫댓글 당시 정승화참모총장도 궁정동에 같이 있어서 전두환이 쿠데타일 으킬때 그걸 빌미로 잡았었군요.
저렇게 안죽었으면 국민들이 또 엄청 희생됐겠죠 어차피 자업자득이란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을 너무욕해도 나라위신을 깍는것아닐까요?
대통령이라고 봐줄 필요 있나요? 잘못한 게 있으면 까이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요새는 각하라는 단어 별로 안씁니다. 그쪽 사람들 말고는요
세종에게도 전하라고는 안 하는데 박정희에게 각하라고 하는 건 아무리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오바하는 거 맞는듯요. 좋게 보나 나쁘게 보나 역사인물일 뿐인데....뭐 박정희 추종자 모임이라든지 있다면 그 안에서는 쓸 수 있겠지만요
각하, 반란자라는 이런 단어보단 전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괜찮아보입니다.
각하는 요새 쓰는 말이 아니죠.
노태우는....모든사람이 두고두고 물태우라고 까내요 ㅋㅋㅋㅋ
뭐 국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각하가 너무 권위적인 느낌인지라 대통령이라고 쓰라고 유도했지만 여전히 대통령 앞에 서게 되면 각하나 대통령님으로,,-.-
대통령 운전기사는 또 무슨 죄라고.....-.-;; 근데 대통령 운전기사는 아무나 쓸거 같지 않긴 한데.....-.-;;;
전 음모론으로 안봅니다. 김재규가 나름 정의감에 벌인 일이라고 봅니다. 지금이야 신자유주의가 깽판치는 시대지만 70년대의 김재규뻘 되는 세대는 골수케인지언에 부, 권력 세습은 절대 안된다, 상속세는 기본 50프로가 선진국, 이런 사고로 살았는 걸요. 당시 박정희 아들이 성년이 되던게 유신헌법이랑 묘하게 맞물리면서 벌써부터 박지만에게 아부하려는 이들이 생기고 박정희 내각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고도 하구요. 차지철이 박지만이랑 좀 친했다고도 하니까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질펀하게 노는거 뒤치닥꺼리 해주는 처지였고, 이래저래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겠죠. 당시면 연애인은 딴따라취급하던때인데 말이죠.
흠 그렇다면 김재규가 아직 복권이 안된게 참 아쉬운 일이겠군요... 안중근 의사급의 영웅?
음모론의 유형을 대략 세가지로 분류하자면, 이면의 진실을 폭로하는 사실적 음모론, 99프로의 진실에 1프로의 거짓을 섞는다는 류의 왜곡형 음모론, 마지막으로는 물타기유형이 있다고 보는데요, 김재규건의 경우엔 세번째 케이스로 김재규의 원뜻을 곡해하려고 음모론을 덕지덕지 끼워놓은 감도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는 울나라 공군기지에 미국 핵무기가 엄연히 적재되있던 시대였는데, 박정희=핵개발론이나 이런 것이 오히려 말도 안되죠. 뭐 음모론이 옳을수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선 그냥 드러난 사실이 사실인 경우도 꽤 되죠.
"한국포무"의 깃발 아래 세력을 키워 서울 상경에 성공, 경무대를 장악하여 대빵을 무력화시킨 후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으나 믿었던 중신의 역습으로 "궁정동의 변"을 당하여 사망....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대머리 낙쥐"가 결국 김재규를 제거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루었으나... 결국 그 자리는 "흐르는 물과 같이" 순리와 시류에 따르던 사람이 차지하게 되니...오다 박통나가: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조져버린다" 토요토미 두환여시: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말을 듣게 만든다 (공수부대 투입해서)"도쿠가와 노태우스: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말 들을 때 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다가 87년 와버렸다..)"
가장 중요한건 10.26의 총성으로 인해서 충실히 따르던 개의 목줄이 풀려버리는 계기가 되지요...
사실상 김재규는 영웅이죠. 박정희 보다는 다른 부하들이 더 지독했으니... 아무튼.. 이것도 잘못된 역사라 봅니다. 잘못하면 북한꼴나죠.. 자본주의 경제체제 북한이랄까?
첫댓글 당시 정승화참모총장도 궁정동에 같이 있어서 전두환이 쿠데타일 으킬때 그걸 빌미로 잡았었군요.
저렇게 안죽었으면 국민들이 또 엄청 희생됐겠죠 어차피 자업자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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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나라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을 너무욕해도 나라위신을 깍는것아닐까요?
대통령이라고 봐줄 필요 있나요? 잘못한 게 있으면 까이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요새는 각하라는 단어 별로 안씁니다. 그쪽 사람들 말고는요
세종에게도 전하라고는 안 하는데 박정희에게 각하라고 하는 건 아무리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해도 오바하는 거 맞는듯요. 좋게 보나 나쁘게 보나 역사인물일 뿐인데....뭐 박정희 추종자 모임이라든지 있다면 그 안에서는 쓸 수 있겠지만요
각하, 반란자라는 이런 단어보단 전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괜찮아보입니다.
각하는 요새 쓰는 말이 아니죠.
노태우는....
모든사람이 두고두고 물태우라고 까내요 ㅋㅋㅋㅋ
뭐 국어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각하가 너무 권위적인 느낌인지라 대통령이라고 쓰라고 유도했지만 여전히 대통령 앞에 서게 되면 각하나 대통령님으로,,-.-
대통령 운전기사는 또 무슨 죄라고.....-.-;; 근데 대통령 운전기사는 아무나 쓸거 같지 않긴 한데.....-.-;;;
전 음모론으로 안봅니다. 김재규가 나름 정의감에 벌인 일이라고 봅니다. 지금이야 신자유주의가 깽판치는 시대지만 70년대의 김재규뻘 되는 세대는 골수케인지언에 부, 권력 세습은 절대 안된다, 상속세는 기본 50프로가 선진국, 이런 사고로 살았는 걸요. 당시 박정희 아들이 성년이 되던게 유신헌법이랑 묘하게 맞물리면서 벌써부터 박지만에게 아부하려는 이들이 생기고 박정희 내각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고도 하구요. 차지철이 박지만이랑 좀 친했다고도 하니까 게다가 김재규는 박정희가 질펀하게 노는거 뒤치닥꺼리 해주는 처지였고, 이래저래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겠죠. 당시면 연애인은 딴따라취급하던때인데 말이죠.
흠 그렇다면 김재규가 아직 복권이 안된게 참 아쉬운 일이겠군요... 안중근 의사급의 영웅?
음모론의 유형을 대략 세가지로 분류하자면, 이면의 진실을 폭로하는 사실적 음모론, 99프로의 진실에 1프로의 거짓을 섞는다는 류의 왜곡형 음모론, 마지막으로는 물타기유형이 있다고 보는데요, 김재규건의 경우엔 세번째 케이스로 김재규의 원뜻을 곡해하려고 음모론을 덕지덕지 끼워놓은 감도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는 울나라 공군기지에 미국 핵무기가 엄연히 적재되있던 시대였는데, 박정희=핵개발론이나 이런 것이 오히려 말도 안되죠. 뭐 음모론이 옳을수도 있겠지만 때에 따라선 그냥 드러난 사실이 사실인 경우도 꽤 되죠.
"한국포무"의 깃발 아래 세력을 키워 서울 상경에 성공, 경무대를 장악하여 대빵을 무력화시킨 후 스스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으나 믿었던 중신의 역습으로 "궁정동의 변"을 당하여 사망....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대머리 낙쥐"가 결국 김재규를 제거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루었으나... 결국 그 자리는 "흐르는 물과 같이" 순리와 시류에 따르던 사람이 차지하게 되니...
오다 박통나가: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조져버린다"
토요토미 두환여시: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말을 듣게 만든다 (공수부대 투입해서)"
도쿠가와 노태우스: "국민이 말을 듣지 않으면 말 들을 때 까지 기다린다 (..기다리다가 87년 와버렸다..)"
가장 중요한건 10.26의 총성으로 인해서 충실히 따르던 개의 목줄이 풀려버리는 계기가 되지요...
사실상 김재규는 영웅이죠. 박정희 보다는 다른 부하들이 더 지독했으니... 아무튼.. 이것도 잘못된 역사라 봅니다. 잘못하면 북한꼴나죠.. 자본주의 경제체제 북한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