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성을 질러라
시편 100: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교회력 마지막 주일이다. 영원한 주일이라고 부른다. 영원한 주일부터 한 주간은 우리와 함께 살다가 먼저 떠난 분들을 추모하는 시간이다. 또 이 기회에 나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고 성찰하는 기회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드린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오늘과 함께 365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다. 지난 1년 동안 색동교회와 함께 하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고맙다는 말이다. ‘땡큐, 아리가또, 씨에씨에, 깜언, 당케 쇤, 사스 유카리스토, 스파씨바, 그라시아스, 컵짜이...’ 감사 인사는 가장 어려서부터 배우는 인생의 첫 번째 지혜이다.
감사 인사는 감사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감사의 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감사드릴 일도 많지만, 속상한 일도 많았다. 모두 원인이 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정치 기사를 보다가, 심지어 남을 위해 봉사하다가, 놀랍게도 나 자신이 원인이 되어 화가 나기도 한다. 감사 주일은 다 풀고 다시 시작하는 날이다.
얼마 전에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세상인지 새삼 느꼈다. ‘무당도 보험에 든다’고들 한다. 그럴수록 감사하며 사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가? 감사를 뜻하는 러시아어 ‘블라가다림’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이다.
1)
시편 100편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시작한다. 감사는 하나님께 환호성을 지르며 나아가는 일이다.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일이다.
예배 의식이 담긴 시편 100편은 성전에 입장하면서 부르던 노래이다. 전반부(1-3)는 회중이 성전 문 앞에서, 후반부(4-5)는 찬양대가 성전 구역 안에서 불렀을 것이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1-2).
감사의 환호성은 어쩌다 한 번 하는 행위가 아니다. 안식일, 연중 3차례 감사절기, 7년마다, 50년마다 지속하고, 반복한다.
감사는 일상적인 일이고 또 역사적 행위이다. 감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하셨구나, 라는 역사 회고가 필요하다. 구약성경에서 첫 번째 감사절은 매우 역사적이었다(신 26:5-10).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성경에서 첫 감사절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경험을 담고 있다. 그들은 광야 40년의 시절을 회고하면서 제사장이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 감사제사를 드렸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 26:10).
감사의 고백 속에는 애굽에서 겪은 고난, 출애굽, 40년 광야 생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한다. 그리고 감사의 잔치를 벌였다.
나는 역사라는 말을 귀하게 여긴다. 역사를 의식하며 살면 사람이 쫀쫀하지 않고, 대범해진다. 눈앞의 현상에 안절부절 하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역사적 신앙이 필요하다. 개인도 모두 역사를 살아가는 것이다.
유명한 ‘에벤에셀’이란 감사 문구에도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이렇듯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다. 감사는 하나님과 연결된 말이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언어이다. 감사는 과분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2)
시편 100편은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가 살면서 환호성을 지를 일이 얼마나 되는가? 나이가 들수록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어색해진다. 마음이 상했거나, 깊은 실망이 있거나, 남의 눈치를 보면 환호성을 지르지 못한다.
때론 내게 환호성을 지를 그럴 만한 대상이 있을까? 그럴 마음의 여유도, 그런 놀라움도 없이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부터 카타르 월드컵이 시작되니 온국민이 함께 환호성을 지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우리 지방 박흥윤 목사님은 맹인이다. 앞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종종 눈으로 보는 사람보다 더 자연스럽게 행동할 때가 있다. 몇 년 전에는 족구 경기에서 심판을 보았다. 그는 선수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판정하였다. 편파 판정을 해도 누구나 다 양해를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축구 경기에서 골키퍼를 했다고 한다. 무려 두 골을 막았다면서 자랑스러워하였다. 비록 세 골은 먹었지만 그래도 팀이 이겼다고 하였다. 어떻게 골을 막았냐고 했더니 골을 몰고 오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그 앞으로 나가 몸을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막아서는 것이라고 한다. 겁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뵈는 게 없으니까요”한다.
“뵈는 게 없다”는 것이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으니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오만할 일도, 마음 상할 일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눈에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이 있다. 이를 겉사람과 속사람으로 구분한다.
겉사람은 식생활, 운동, 좋은 관계, 능력개발 등을 통해 건강성과 행복도를 유지하도록 힘쓴다. 그렇다고 모두가 희망하지만, 인생의 그늘은 피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인간의 한계가 있다. 대표적으로 나이, 장애와 원치 않은 질병 등은 한계로 다가 온다.
속사람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자라난다. 인간의 한계와 상관없이 은혜의 질서 안에서 새로워지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감사는 조건에만 얽매이지 않으며, 인간적인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 차원이 다른 삶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감사제는 하나님과 백성 간에 이루어지는 은총과 고마움의 어울림이 기본이다. 감사는 삶의 원동력이고, 인생의 근거이며, 생의 자랑이었다.
그래서 감사 제사인 화목제를 보면 그 제물의 일부를 제사에 참석한 회중이 성전 뜰에서 먹는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제물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 즉 하나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친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환호성을 지르라고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의, 진실, 은혜, 자비, 온갖 좋은 것으로 만나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 보기를 든 것이 양 떼인데, 양은 스스로 독립하지 못하고 의존하는 존재이다. 목자의 도움과 인도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이렇듯 감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는 일이다. 기쁨으로 하나님께 내 존재를 보여드리는 일이다.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의 삶을 다시 다짐하는 기회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넓게는 하나님을 공경하며 계명을 따른다는 뜻이고, 좁게는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를 뜻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3)
구약시대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반드시 제물을 준비하였다. 희생제물이다. 율법에는 백성의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자기 소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형편에 맞게 규정하였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아주 가난하여 가장 가난한 이들이 드리는 예물을 준비하였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눅 2:24).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물이 아닌,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의 욕망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으로 채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기진 욕심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도 있다.
감사 없는 인생은 말라버린 우물과 같이 삭막하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랑은 받으려고만 하기에 곧 깨어질 위험이 있다. 모든 삶의 기초는 감사하는 마음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은혜요,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감사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5).
시편 100편은 종교개혁자 존 낙스, 윌리엄 케티가 찬송가로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옛날의 시 100번째 노래’(The Old Hundredth)라는 제목으로 불려져, 사랑받아온 대표적인 시편이다.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당시 개혁신앙은 박해를 받았다. 윌리암 케티는 박해를 받아 1556년 제네바로 피난하였고, 메이플라워호를 탄 청교도 역시 박해를 피해 1620년 신대륙으로 피난하였다.
그들은 모두 피난자였다. 그들은 세상은 자신을 실망시킬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들이 하나님은 어질고, 자비롭고, 정의와 사랑이 가득한 분으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편은 비록 우리의 삶이 슬픔과 괴로움 속에 있어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환호성을 회복하라고 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를 진정한 개척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는 “감사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소리 없는 기도”라고 하였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늘 감사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오늘은 교회력 7가지 절기 중 마지막 단계인 창조절을 마무리하는 주일이다. 지난 1년 동안 남혜성 님이 정말 수고가 많았다. 내년에는 따로 교회력 배너 담당자를 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만약 아무도 없으면 지난 것들을 다시 사용하려고 한다. 기후 위기 시대의 키워드는 ‘재활용’이 아닌가?
지난 주 목요일 저녁에 안양 군포 YMCA와 YWCA 공동기도주간에 설교하러 갔다가 인사를 받았다. ‘쓰레기를 줄이는 11가지 생활습관 만들기’에 색동교회가 1등을 달리고 있다며 축하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듯이, 우리도 내 삶을 새롭게 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감사의 정신이다. “인생이여, 기쁨으로 나아가라!” 인생은 비교적 아름답고, 살만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환호성을 올릴 만하다.
하나님은 언젠가 우리의 삶을 추수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거두어들이실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다음 주일은 대림절 첫째 주일이다. 교회력의 시작이다. 마지막이란 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본래 마지막은 우리말 ‘맏이맏’에서 나왔는데 앞뒤의 맏과 맏은 모두 맏형, 맏아들처럼 먼저, 처음이란 뜻이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미래를 향해 도전하는 힘을 주시길 바란다.
그리하여 때마다 일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감사절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장으로부터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감사하는 삶에 언제나 환호성으로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