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__시의공간 : 서울특별시, 강남
무한증식, 도시 속 기호의 세계
함종호
분명한 사실 하나. 시인에게 삶은 시를 만드는 원초적인 힘이며, 그것이 잘 성장하도록 돕는 필수자양분이다. 만약 시인에게서 삶을 빼앗는다면, 그가 써내는 시는 어느덧 생기를 잃어버리고 추상적인 관념만이 넘쳐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도시시(범박하게 말해 도시가 주요 시적 대상인 시)를 자주 대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시인들이 과거와 달리 유독 도시에 대해 말하고 싶은 바가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도시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시에 내포된 부정성에 대해 과장된 포즈를 취하며 근엄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옛시에서도 삶의 부정성을 읽어낼 수 있듯이, ‘삶’을 대신해 ‘도시’로 바꿔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도시시에 내포된 부정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어떠한 특성이 강조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옛 시에서 발견할 수 없는 새로움을 도시시가 보이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삶의 공간이 도시로 대체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삶의 특성이 달라졌고, 그것을 표상하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시를 접할 때 ‘도시’를 잠깐 괄호 안에 넣어두어도 좋겠다. 어쨌든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도시’가 아니라 ‘삶’이니까. 그들이 ‘삶’을 말하고자 하는데 하필 그 삶의 공간이 ‘도시’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삶’은 시적 언어로 어떻게 표상될 수 있는가. 삶은 항상 실재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만약 언어 기호를 실재의 외부에 존재하는 개념적 차원에서만 작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실재적인 삶을 그것이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마치 전통적인 언어학의 체계, 그러니까 소쉬르가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결합체로 간주하고 그러한 기호의 일반적인 구조를 통해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의식 내의 개념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령 실재적인 사물 ‘나무’를 [ㄴㅏㅁㅜ]라 부를 때 이것의 사전적 정의와 같은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이라는 개념만이 지시되는 것은 아니다. 삶과 관계할 때 그것은 때로는 ‘편안한 휴식처’로, ‘역경을 견뎌내는 의지’로, ‘늘 곁에서 함께 하는 동반자’로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퍼스의 기호학 논의를 참고한다면, 기호는 그것이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자연적인 현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실재 대상을 대신하는 표상체로 이해된다. 그리고 대상과 표상체(기호) 간의 관계 양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내려질 수 있으며, 이렇게 행해진 해석들은 또 다시 새로운 기호로 작용한다. 대상과 표상체(기호) 간의 관계 양상은 매우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기에 그 때마다 행해지는 해석 또한 무한하고 연속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일컬어 퍼스는 ‘세미오시스(기호작용)’라 명명한다. 많은 시인들이 실재의 사물 ‘나무’를 노래하였지만, 그들이 사용한 언어 기호 ‘나무’가 각기 실재 삶과 관계하며 매우 다양한 의미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 각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결과가 기호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재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도시’라는 언어 기호로 부르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표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곳에서의 삶을 영유해나가는 개인의 각기 다른 경험이 만들어낸 현상적 차이가 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도시’는 각기 달리 새롭게 해석된 기호로 변주된다. 대상과 표상, 그리고 이들의 관계 양상에 따라 무한히 연속적으로 행해지는 해석 등이 기호의 실체인 것이다. 이는 언어 기호가 더 이상 실재의 삶 외부에서 주어진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의 삶 그 내부에 깊이 침윤된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퍼스에 의하면, 대상과 표상된 기호의 관계 양상에 따라 기호는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즉 표상된 기호가 대상과 유사성의 차원에서 관계될 때에는 도상, 지칭적이거나 인과적인 것으로 관계될 때에는 지표, 일반적인 법칙 내지는 규범적인 것으로 관계될 때에는 상징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 분류에 맞춰 기호 각각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화장실 앞에 걸려 있는 표식의 경우,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도상 기호가 되며, 동시에 ‘남녀화장실’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지표 기호가 되기도 하며, 이러한 표식이 일종의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상징 기호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기호의 구분이 절대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기호가 대상과 맺는 관계가 매우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며, 그렇기 때문에 기호가 드러내는 의미 또한 비결정적이며, 다양한 의미 생성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잠재성의 토대 위해서 얼마든지 의미 변주와 해석이 행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실재적인 삶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도시와 그 속에서 경험되는 각기 다른 현상들이 만나 펼쳐지는 기호의 세계, 그것이 곧 오늘날 자주 접하게 되는 시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도상, 지표, 상징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무한히 연속적으로 새롭게 해석된 기호들로 넘쳐난다.
도시 한복판에서
애완용 토끼를 기르는 시대가 되었다,
죄없이 애완용 토끼 두 마리
높다란 아파트 베란다에 걸려 있어,
그것이 왜 꼭 종교적으로, 모욕적으로
보이는 나.
연분홍 토끼와 하얀 토끼
길고 하얀 두 귀가
쫑긋쫑긋 안테나처럼 빛나고 있어
―토끼를 애완용으로 기르다니 참 무서운,
―늑대를 길들여 집 개를 만든 것도 인간 아니야?
―온순하고 조용하고 또 예쁜
―가정적인 토끼, 창조적 불만족보다
순응적 온순함은 얼마나 좋은지
연분홍 토끼와 하얀 토끼
직업의 안정과 신분의 안정, 확실한 보장
그 외에 무엇을 더 좋아해야 하는가?
퇴근길에 들르는 비디오숍
화장품 할인매장과 노래방들의 거리
무엇이 심각하게 더 슬플 것인가?
―일상성 속에 적멸보궁이 있다고 누군가
―뜨거운 진보는 옛 시대의 안개예요, 보세요,
집집마다 토끼들을 기르고 있잖아요
―누가 황토를 화살을 아침이슬을 다시 읽겠는가
베란다의 토끼들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안방의 사람들이 베란다에 나와
토끼장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토끼장을 가득 메우고
토끼들은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백화점으로 거래처로도 가고
신용카드를 쓰고 사인도 하네
―행복에 이르는 기나긴 질병
―누군들 그 병에 걸리고 싶지 않겠는가
―야수적 창조성보다 행복한 순응이 더 좋아
언어의 위선들이여
일상성 속에 적멸보궁이
(그래도 밤새 들리는 철망 덜컹이는 소리)
- 김승희, 「토끼들의 시대」 부분
실재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는 거주하는 공간과 거주 이외의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또한 그들 공간 간의 이동을 함축하고 있다. 이점을 고려할 때 「토끼들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실재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에서 이는 ‘토끼장’으로 표상된다. 여기서 ‘토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도시 속 주거공간인 아파트를 지칭하는 지표 기호로 작용한다. 또한 ‘토끼장’이 토끼를 가둬 기르는 곳을 뜻한다면, 도시인의 주거공간인 아파트 또한 도시인을 가두고 있다는 점에서 ‘토끼장’은 서로 유사한 성질을 공유하고 있는 도상 기호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토끼장’으로 빗대어진 주거공간 내 ‘안방’과 ‘베란다’ 등을 오가며, 때로는 그곳을 나와 ‘회사’와 ‘백화점’ 등을 다닌다. 이는 ‘가정적’이고 ‘순응적 온순함’으로 대표되는 도시인의 단적인 생활상을 대변하고 있다. 왜냐하면 ‘토끼’는 ‘순응’과 ‘온순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흔히 간주되기 때문이다. 결국 ‘토끼장’은 온순하게 순응하며 가정적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을 나타내는 상징 기호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가둬 길러지는 것이 토끼만은 아닐 텐데 시인은 왜 하필 토끼에 빗대어 도시인을 표상하고 있으며, 더욱이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토끼장’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일까? 실재의 대상 ‘아파트’ 그리고 ‘아파트’로 넘쳐나는 도시가 ‘토끼장’이라는 표상체(기호)와 관계할 때, 즉 ‘도시는 토끼장이다’라는 문장의 술어로 그것이 쓰일 때, 비로소 새로운 해석의 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야수적 창조성보다 행복한 순응이 더 좋”다고 말하는 ‘언어의 위선들’이다. 특히 ‘언어의 위선’이라 하지 않고 복수접미사 ‘들’을 사용하여 ‘언어의 위선들’이라고 한 것은 도시적인 삶에는 언어로 치장된 위선이 다양한 형태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업의 안정과 신분의 안정, 확실한 휴가의 보장”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노동으로 지친 육체를 자본주의의 맹아인 ‘비디오숍’, ‘화장품 할인매장’, ‘노래방’ 등에서 제공하는 감각적 자극으로,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삶에 젖어든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위선에 불과하다. 도시에서의 삶의 실상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노동력 착취를 위해 아주 적은 기간의 휴가만이 주어질 뿐이고, 거리에 넘치는 감각적 도취에 휩싸여 부정적 현실을 잊고 사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개개인이 지니고 있어야 할 주체로서의 의지는 망각한 채 ‘언어의 위선’이라 지칭된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 그것은 길들여지는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 한복판에서/ 애완용 토끼를 기르는 시대가 되었다”라는 전언은 토끼 말고도 그 어떤 것도 길러질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을 함의한다. 인간이 토끼화된 시대, 그 시대를 시인은 ‘종교적’인 것으로, ‘모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의 위선’은 마치 맹목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강렬함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러한 맹목에 길들어지는 인간 존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썩어서도 거드름 피우는
그 놈들 코에 가 붙지 않고
하필 파리가 내 뺨에 붙었을 때
나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불쾌했다
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손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 동작이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
허우적거림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죽음에 둘러싸여
무력했지만 파리 쫓을 힘은 있었다
빌딩을 오르내리는 날개 없는 요일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듯
함몰과 큰 추락에 대한 공포에 나는 떨고 있었다
- 최승호,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
「토끼들의 시대」에서는 도시가 ‘토끼장’으로 표상되었다면, 위의 시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에서는 ‘엘리베이터’로 표상된다. ‘토끼장’과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또한 닫힌 공간이자, 갇힌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매우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내 삶을 각각 표상하고 있는 ‘토끼장’과 ‘엘리베이터’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과 이들과 관련된 현상적 차이에 의해 내포하는 의미가 서로 달라진다.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에 묘사된 현실(현상)은 어떠한가. ①엘리베이터 안에는 화자와 파리가 있다. ②파리가 화자의 뺨에 붙는다. ③화자는 파리를 쫓는다. 이 시는 ①~③의 순서로 상황이 전개된다. 그리고 ①~③ 각각은 비교적 객관적인 상황 묘사를 지시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일련의 해석이 적용되는 순간 시적 의미는 전환된다. ㉠파리는 “썩어서도 거드름 피우는/ 그 놈들 코에 가 붙”는 것이 어울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 속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파리를 쫓는 화자의 행동은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버둥거리는/ 허우적거림”으로 비춰진다. ②와 ㉠이 서로 관계할 때, ‘나’와 “썩어서도 거드름 피우는/ 그 놈들”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좁혀지고, ‘나’는 ‘그 놈들’처럼 부패한 자가 된다. 그리고 ①과 ㉡이 서로 관계할 때, ‘엘리베이터’는 “죽은 꽁치들이 빽빽한 통조림”처럼 밀폐된 공간이면서 부패한 공간이 된다. 이는 마치 파리에 의해 ‘나’가 오염되었고, 그래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③과 ㉢이 서로 관계할 때, ‘나’가 파리를 쫓는 행위는 부패의 원인을 제공한 파리로부터 단지 거리를 두려는 것에서 더 나아가, 파리와 어울릴 만한 부패한 ‘그 놈들’과 ‘나’는 달라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행위는 마치 “살려고 버둥거리는/ 허우적거림”만큼이나 절실하고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위는 부질없는 것이 되기 쉽다. 왜냐하면 ‘엘리베이터’라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파리를 완전히 쫓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되고 부패한 공간에 파리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그 또한 파리처럼 부패한 자가 된다. 이는 그가 경멸의 시선을 던졌던 ‘그 놈들’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이르도록 만든다. ‘나’는 부패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그 존재 근거를 잃게 되었다는 것. 이러한 그의 인식은 ‘엘리베이터는 거대한 늪수렁이다’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올라가도 빠져드는, 그리고 빠져나오려 힘을 쓸수록 더 깊이 빠지고야 마는.
이 시에서 ‘엘리베티터’가 도시를 대표하는 사물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실재 삶의 공간인 도시가 ‘엘리베이터’로 표상되고, 이것은 다시 ‘도시는 엘리베이터이다’와 같은 문장의 술어로 쓰일 때,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 즉 ‘엘리베이터’는 부패한 공간이자, 존재의 근거를 잃게 만드는 ‘거대한 늪수렁’으로 해석되고 이해된다. 이러한 결과는 실재 삶에 주어진 대상과 이를 표상하는 기호 간의 관계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임을 상기하도록 하자. 이 시의 ‘파리’가 ‘부패’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실재 삶에 나타난 현상적 차이에 의해 발견되는 일종의 관계짓기에 의해 파생된 것이라는 점도 잊지 않도록 하자. 언뜻 생각나는 옛 사설시조 하나. “두터비 파리를 물고 두험위의 치다라 안자/ 것너산 바라보니 白骨松 떠잇거든 가슴이 금즉하여 플떡 뛰어 내닷다가 두험아래 잣바지거고/ 모쳐라 날랜 낼쉬만졍 에헐질번 하괘라” 이처럼 ‘파리’는 예부터 시에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이 사설시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이 관습적으로 부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던 것만은 아니다. ‘두터비’와 관계할 때, ‘파리’는 힘없는 백성을 상징하게 된다.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에서의 ‘파리’가 ‘부패’를 상징하게 된 것은 그것이 썩은 것과 친화성이 있다는 성질 때문이 아니라 기호로 표상된 그것이 맺고 있는 대상과의 관계 양상 때문인 것이다.
실재하는 삶의 공간인 도시는 무엇으로든 표상될 수 있고, 무엇으로든 해석될 수 있다. 삶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복잡성에 따라 ‘도시’는 수많은 기호를 낳는다. 그리고 이들 기호는 다양한 해석을 예견하며 한없이 미끄러져 나간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내에 이미 주어져 있는 특정한 관념만을 대표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일련의 도시시를 통해 읽어야 하는 것은 도시에 관한 특정 의미나 관념이 아니라 그러한 의미나 관념을 만드는 원동력인 해당하는 해석 방법과 그 과정이다. 실재의 삶은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나 관념이 실재의 삶과 일정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라면, 이에 비해 기호작용, 즉 해석된 기호는 실재의 삶과 표상하고 있는 기호 간의 내밀한 관계에 보다 천착하는 태도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삶의 구체적인 현상을, 관계의 복잡성을, 다양한 해석 등을 통해 나타나는 기호는 무한증식한다.
깨어진 유리병 속에서
꽃이 꽉차게
자라났습니다
꽃이 더 이상 머리 둘 곳이 없게 되자
이번에는 유리병이 쑥쑥 자라나주었습니다
모래성아 무너지지 말아라
하고 모래에 시멘트와 물을 섞고
철근까지 박은 집에
아이들이 자꾸 태어났습니다
더 이상 머리 둘 곳이 없게 되자
모래성이 그만 무너져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래성 밖으로 머리를 두고
잠들게 되었습니다
별이 못생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 박혀주었습니다
품에 넣었던 그대를
다시 품에 넣고
그러기를 몇수천 년
내 가슴 방이 훤하게 넓어졌습니다
벽이 없어질 만큼
그러자 그대는 아무 때나 기별도 없이
불쑥 들어와 요 깔고 누워
잠들었다 사라졌다 제 맘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내 방이 서울특별시처럼 마구 커졌습니다
- 김혜순, 「서울의 흥부」
「서울의 흥부」는 도시, 구체적으로 말해 ‘서울’을 대상으로 한 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 삶의 공간인 도시가 어떻게 표상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이 시를 주목해서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서울특별시’라는 보조관념이 자아내는 이미지가 이 시의 시상 전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이 지니고 있는 어떤 경향성에 힘입은 바 크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무한증식의 특성이다.
이 시의 각 연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대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이는 각각 1연에서는 ‘유리병’과 ‘꽃’, 2연에서는 ‘집’과 ‘아이’, 3연에서는 ‘내 가슴(방)’과 ‘그대’ 간의 관계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에서 ‘유리병’, ‘집’, ‘내 가슴(방)’은 ‘꽃’, ‘아이’, ‘그대’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꽃’이 자라고, ‘아이’가 늘어나고, ‘그대’의 방문 횟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각기 포함하고 있는 ‘유리병’, ‘집’, ‘내 가슴(방)’ 등은 이내 곧 해체된다. 이러한 일련의 시상 전개 과정은 “내 방이 서울특별시처럼 마구 커졌습니다”에서 집약된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 도시 경계는 확장된다. 한국 사회에서 이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물론 서울이다. 이 시는 도시, 특히 서울이 지니고 있는 특성인 도시 경계 확장이라는 요소를 가져와 ‘내 가슴’이 상징하는 추상적인 관념(사랑)을 실체적으로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퍼스의 논의를 참고한다면, 경계가 자꾸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 도시, 구체적으로 말해 ‘서울’이라는 기호와 관계를 맺게 되면, 그리고 이것이 또 다른 기호인 ‘사랑’과 관계하게 되면 새롭게 해석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기호작용이 무한하고 연속적인 형태로 나타남은 물론이다. 「서울의 흥부」의 경우 이것은 ‘자기 해체 과정을 전제로 한 무한한 사랑, 또는 사랑의 무한증식’이라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된 한 가지 아이러니. 그것은 「서울의 흥부」를 관통하는 ‘사랑의 무한증식’이라는 의미는 실재의 삶의 공간인 도시에 내재된 특성이라는 점, 그리고 ‘무한증식’은 기호의 기본적인 특성이라는 점이다.
① 도시의 불룩한 유방인
빌딩과 빌딩 사이로
개울이 흐른다.
밤인 도시가
나체인 온 가슴을 벌리고
비를 맞는다.
- 황인숙, 「!비!!!」 부분
② 고딕 건물이 신과의 교접을 바라고 지어졌다면 현대의 마천루는 누구와의 간통을 바라고 있을까요?
- 함성호, 「엘리베이터―대화」 부분
①과 ②에서 보듯, 도시는 흔히 성적 욕망으로 굴절되어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시는 ①과 ②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 퍼스에 의하면, 실재하는 것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게 하는, 다시 말해 기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의 본 모습은 기호 공동체의 합의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마도 도시에 관한 시인의 공통된 합의는 성적 욕망과 크게 관련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대부분의 시인들이 도시를 성적 욕망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실 생산의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고 구조화되어 있는 자본주의를 그것이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욕망은 복수화된 주체와 사회적 장 속으로의 투여를 전제로 생성된다. 주체는 욕망하는 기계들, 부분 충동들의 종합인 것이다. 가령 신체 기관 중 하나인 입이 음성과 관계할 때에는 ‘말하는 기계’로, 음식물과 관계할 때에는 ‘먹는 기계’로 변주되듯이, 이들 기관(기계)의 총체가 주체인 것이다. 이때 그가 신체 기관을 기계로 지칭한 것은, 이것이 사회적 장 속에서 다른 것과 관계를 맺으면 유동적으로 주어진 욕망의 형태를,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절단하고 채취하여 고정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욕망이 사회적 장 속에서의 관계 맺음에 의해 무한히 연속적으로 생성되듯이, 자본주의 또한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생산의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표상된 기호는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무한히 연속적으로 새로운 해석, 기호를 만들어낸다. 욕망 또한 사회적 장 속에 투여되어 다양하게 변주된다. 이점을 고려할 때 도시는 이들 기호와 욕망이 생동하는 삶의 공간이 된다. 사회적으로 도시는 그 경계가 계속 확대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본주의에 의해 발달한 삶의 한 공간이며, 그 속에서 욕망의 무한증식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이러한 특성을 서울이 대표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더욱 집약시켜 상징하는 기호는 바로 ‘강남’이다. 다시 말해 ‘강남’은 중층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기호로서의 ‘강남’, 그리고 자본주의의 집약과 욕망의 무한증식을 상징하는 기호로서의 ‘강남’ 등이 그것이다.
한강이 흐른다
강북과 강남의 비무장지대
……
물줄기 따라
떠나간다 유람선
한강철교 아래를 지나다가 보면
민족의 비극 6·25때처럼
8학군 강남으로 도강하기 힘들고
강남의 아파트 장벽과 강북의 꼬막집들
명명되지 않은 전쟁이 여기 벌어지고 있구나
자본은 은밀하고 자유로운 전쟁을 양성화한다
- 함민복, 「한강유람선」 부분
이 시 「한강유람선」에서는 자본주의의 집약체로서의 ‘강남’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자본’, ‘6·25’ 등과 관계할 때 그것은 ‘전쟁’을 표상한다. 주로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강북’과 고소득층이 많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강남’ 간의 사회적인 구분이 자본을 욕망하는 자들의 전쟁터라는 새로운 해석과 기호 생성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기호작용을 놓고 보면 ‘한강은 비무장지대이다’라는 은유는 그 나름의 설득력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비무장지대’라는 시어는, 전쟁 같은 욕망 추구로 인해 철저히 지역적으로 구분된 현실 상황이 남한과 북한을 구획하고 있는 지역으로서의 ‘비무장지대’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도상 기호이자, 자본에의 투쟁적인 욕망 추구가 일반화된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 기호가 된다. 또한 이 시 전편을 가로지르는 풍자적이면서 비판적인 어조를 감안하고 볼 때, 이것은 자본에의 투쟁적인 욕망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알리는 일종의 지표 기호로도 볼 수 있다.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섹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부분
도시를 서울이, 서울을 ‘강남’이 대표한다면, 다시 ‘강남’은 ‘압구정동’이 대표한다. 이는 ‘압구정동’이 자본주의,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상품화, 소비화를 여실히 잘 보여주는 장소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과거 한때 압구정동은 소비의 메카로 자리매김했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오렌지족’, ‘야타족’ 등으로 불리며 상품화, 소비화에 앞장 선 사람들이 자주 출몰(?)했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압구정동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시에서 ‘욕망의 통조림 공장’ 또는 ‘국화빵 기계’라는 시어 등 압축적으로 표상된다. 자본주의와 그것에 의해 획책되는 자본주의를 향한 욕망만을 획일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것을 찍어내는 ‘통조림 공장’ 또는 ‘국화빵 기계’와 매우 닮아있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야기된 빈부 격차와 사회적인 갈등은 철저히 숨겨진 채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획일적으로 자본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욕망의 평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표상된 기호가 대상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에 따라 새로운 해석이 무한히 생성되듯이, ‘압구정동’이 상징하는 욕망 또한 주거의 형식(‘현대아파트’), ‘패션’, ‘외모 지상주의’(“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에서 발견되는), ‘넘쳐나는 술과 고기’ 등의 대상으로 바뀌며 무한히 변주된다.
저것은 거대한 욕망의 성채다
이성을 살해한 음울한 중세의 성벽과
빛나는 P.C 자기질 타일 외장의 롯데 월드
그것은 무엇을 방어하고 있나요
당신을, 우리를, 무산 대중을?
꿈과 희망의 동산이요, 사랑과 행복의
당신의 휴식 공간 롯데는
우리를 모두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에 빠지게 한다
욕구의 끓는 기름과 조갈의 불화살을 쏴
끊임없이 당신을 상품화하고
끊임없이 당신을 당신이 소비하도록
구애한다
“여러분은 지금 롯데 월드로 가시는 전철을……”
/욕/망/을/드/립/니/다/
/쾌/락/을/드/립/니/다/
“내리시면 바로 당신을 진열해드립니다”
이 지하철은 저 성채의 비밀 통로인 모양이다
- 함성호, 「잠실 롯데 월드―건축사회학」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강남’이 행정적인 지역 구분의 방식으로 특정 지역만을 제한하여 지칭하는 기호(이때의 ‘강남’은 가상의 구획선을 전제로 한 관념으로서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그것이 관계 맺는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상징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면, ‘강남’에 관한 시의 범위는 보다 넓게 확장된다. 이 시에서 다루어지는 주요 제재가 ‘잠실 롯데 월드’임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이곳은 행정구역 상 송파구에 소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남’에 관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이 자리에서 소개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추상적인 관념의 형태가 아닌 실재 삶의 공간으로서 주어진 도시의 특성, 그러한 배경 속에 펼쳐지는 기호의 세계, 그리고 이들의 관계 맺기 양상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는 욕망들이, 이 시 「잠실 롯데 월드―건축사회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시상의 전개 과정을 따라 이 시를 다시 살펴보자. 이 시의 주요제재인 ‘잠실 롯데 월드’는 ‘욕망의 성채’로 표상된다. 특히 ‘성채’라고 지칭한 것은 ‘잠실 롯데 월드’가 “무엇을 방어하고 있”다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어’하고자 한 ‘무엇’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화자 자신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체제에서 관계하는 모든 것에 전제된 ‘상품화’, ‘소비화’ 등을 뜻한다. 그것은 “꿈과 희망의 동산이요, 사랑과 행복의/ 당신의 휴식 공간” 등으로 치장한 채 무한히 확장된다. 이는 맹목에 가깝다.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일방적인 변주와 증식만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급 독일어를 깨친 사람은 잘 알겠지만
압구정동의 ‘압’은
우리말에서는 유래가 없는
독일어풍의 분리전철인 바
(말하자면……)
상호나 학교명으로 쓰일 때의 압구정은
분리전철 ‘압’이 자연스레 탈락하여
구정 상회
구정 초등학교
구정 갈비 등으로 쓰인다
아마
압구정 상회
압구정 초등학교
압구정 갈비 등으로 발음키가 곤란했으리라
해서 압구정동은
모든 시민이 구정동으로 불러주길 바라는 것처럼
제 앞의 ‘압’자
하나 빼버리고도
짐짓 의연하다
구정동
구정동
‘압’자 버리고도, 남은 구정물 너무도 많아……
- 진이정, 「압구정동―영동통신」
앞서 몇몇 시편을 살펴보면서 확인한 사실, 다시 말해 실재 삶의 공간인 도시는 삶 그 자체에 내재된 복잡성에 의해 다양한 관계 맺기가 가능하고 이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 의미를 지닌 기호가 발생한다는 점, 이러한 기호의 발생은 무한증식한다는 점, 이를 여실히 잘 보여주는 형태가 일련의 도시시라는 점, 이러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또는 욕망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욕망에의 추구가 무한증식이라는 경향성만을 강조할 때 그것은 맹목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기호의 무한증식이 일어나는 시 세계는 하나의 유희의 공간, 놀이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에서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밑줄:인용자)라는 구절처럼 ‘지화자’라는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말놀이가 행해지는 장면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시 「압구정동―영동통신」의 기저에 깔려 있는 언어유희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압’자를 빼고 ‘구정동’, ‘구정동’ 하고 부르다보면 ‘압구정동’은 어느새 그것이 ‘구정물’을 표상하는 기호가 되고, 무한증식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는 언어유희가 되듯이.
또 다시 분명한 사실. 지나치게 시를 절대적인 차원에서 고정화되어 있는 의미를 중심으로 읽지 말기를. 그것은 실재 외부에 존재하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와 같은 시 읽기는 기호 본연의 특성 및 실재 삶의 공간인 도시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을 간과하기 쉽다는 것. 그래서 삶, 도시, 그리고 자본주의와 욕망 등이 기호로 표상되는 원리와 방법에 대한 탐색이 곧 시 읽기여야 하고, 때에 따라선 유희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
함종호 / 저서 『시, 영화, 이미지』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