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떠나는가? 그것은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떠나는 것이다.
云何為離?離我我所。
어떻게 떠날까요? 첫째로, 먼저 무아(無我)입니다. 제가 방금 말했던, 밖에 나가 식사한 그 경우는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나를 버리고 떠나고[離我], 어떤 유별난 모습을 하지 마십시오. 어떤 청년은 그의 복장과 모자를 꾸미고 가는 곳마다 바로 아(我)를 표현합니다. 몹시 싫습니다. 사람이 무아에 이르면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떠다니는 구름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습니다. 채소를 파는 곳에 가면 채소를 사고 식사하는 곳에 가면 식사를 합니다. 벼슬하는 곳에 가면 당신이 바로 관료입니다. 마땅히 개가 돼야할 곳에 이르면 당신이 바로 개입니다. 두 번째로는 아상(我相)을 떠나야하고 아소(我所)도 떠나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놓아버립니다. 아상과 아견(我見)이 근본입니다. 이 신체의 경우는 아소인데, 나에게 소속된 것 같지만 결국은 나에게 소속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천지(天地)로 돌려주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나와 나의 것을 떠나는가? 그것은 (상대적인) 두 개의 법[二法]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云何離我我所?謂離二法。
어떻게 해야 ‘아(我)’를 떠나고 ‘아소(我所)’를 떠날까요? 두 개의 것을 떠나야 합니다.
어떻게 상대적인 두 개의 법을 떠나는가? 그것은 안[內]과 밖[外]의 온갖 법이라는 관념이 없이 평등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云何離二法?謂不念內外諸法,行於平等。
그 두 개의 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안도 생각하지 않고 밖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면 밖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 정좌하면서 모두 안을 생각하며 공부합니다. 아이구! 기맥이 움직였다. 방광을 한다. 큰일 났다. 당신은 바로 선종조사가 ‘흑칠통(黑漆桶)’이라고 꾸짖은 것에 해당되는데, 당신은 이를 ‘무아’라고 여깁니다. 사실은 온통 ‘아’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을 뜨고 있으면서는 곧 외부 모습에 굴러 움직여 아소가 곧 오는데, 내가 본 것, 내가 들은 것이 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를 떠나야 하고 ‘아소’를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 떠날까요? 안과 밖 이 두 개의 법[內外二法]을 떠나야 합니다. 그럼 어디로 떠나가야 할까요?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습니다. 설마 중간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평등을 행해야 합니다[行於平等].
‘행어평등(行於平等)’이라는 이 네 글자는 보기에는 분명한 것 같지만, 만약 당신이 공부가 도달하지 못하면 아예 그 의미를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행어평등’이란 눈을 뜨고 바깥 법[外法]에 있을 때에 밖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忘我]입니다. 한 생각 망아(忘我)에 도달하면 안과 밖 그리고 중간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눈을 감고서 고요함[靜] 속에 있고 정(定) 속에 있을 때에도 고요함이나 정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경계조차도 없애버립니다. 그런 관념, 그런 한 생각을 없애버립니다. 이와 같다면 곧 안이다 밖이다 할 것이 없고 평등을 행합니다. 여러분들은 잘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평등한가? 나[我]가 평등하고 열반(涅槃)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云何平等?謂我等涅槃等。
한걸음 또 나아가 묻습니다. 무엇이 평등일까요? 앞서서 우리들에게 무아(無我)하라고 말했는데 당신은 어느 곳으로 없어져 갈까요? 당신은 날마다 무아라고 하는데, 당신이 날마다 무아 무아한다면 틀림없이 미칩니다. 당신은 무아를 해낼 수가 없습니다. ‘아’ 속에서 바로 무아입니다. 이것이 ‘아등(我等)’인데, 나가 평등합니다. 내가 나[我]라고 한 마디 말하고 나면 곧 나가 사라져버립니다. 나는 본래 공하니까요! 무엇이 ‘열반등(涅槃等)’일까요? 열반이 바로 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대아(大我)입니다. 정말로 공(空)해지면 그 공이 바로 나입니다. 유마경이 설한 것은 모두 대법(大法)입니다. 깨달아 들어가면 철저한 성취요 이론이 아닙니다. 경전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도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은 몸을 떠나고 비워진 뒤에야 열반을 얻는다고 생각합니까? 온갖 중생은 본래 저마다 열반 속에 있습니다. 따로 열반이 하나 있지 않습니다! 능가경에서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열반한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열반함도 없다[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열반은 어디에 있을까요? 열반은 바로 현재에 있습니다. 무엇이 적멸일까요? 법화경은 여러분들에게 일러줍니다. ‘온갖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현재가 곧 적멸 속에 있습니다. 태어남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나와 열반 이 둘은 모두가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所以者何?我及涅槃,此二皆空。
무슨 이유일까요? 나가 본래 공(空)하고 열반도 공하기 때문입니다. 도를 얻으면 공도 공합니다. 하나의 공의 경계가 있다면 이미 아견(我見)이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의 경계는 아소(我所)로서, 나가 일으킨 것이요 나가 조작한 것입니다. 밀종을 배우는 사람은 그렇게 수고롭게 수행을 하여 ‘빛을 보았네! 대단하네!’ 등등 하는데 저는 말합니다. ‘당신은 5원 주고 전지를 하나 사면 즉각 방광합니다! 그것은 모두 일으킨 마음의 작용[所起行相]이지 궁극[究竟]적인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