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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3주일설교 요한복음1:1-18
본문: 요한복음1:1-18
제목: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오늘은 요한복음1:1-18의 말씀을 가지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저는 율리교회에 와서
32년 7개월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일 설교만 해도 대략 1500번 이상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카페에 등록된 설교만 해도
2000년 8월부터 시작하여
1267편의 설교가 올라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강해설교를 합니다.
성경말씀을 분석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만들어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화 위주의 설교나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기 보다는
말씀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찾아서
그것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렵다고도 하고 딱딱하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내 실력이 부족하여
잘 전하지 못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저는 그래서 33년째 많은 성경책을 1장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물론 다루지 못한 성경도 있고 수요기도회를 통해서
반복한 성경도 있습니다.
저는 1999년부터 2000년에 걸쳐서
100여번 요한복음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정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내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이 요한복음을 설교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러한 때가 된 것 같아
요한복음을 다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은혜가 된다면 요한복음을
21장 25절까지 다 설교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면 요한복음을 다시 설교하고 싶어 했을까요?
제 신학교 동기인 박호용 신학박사는
요한복음을 천하의 제일지서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세상의 어떤 책과도 비교가 될 수 없는
최고의 걸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놀라운 감격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주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책입니다.
우리도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주님과 만났던 제자들처름
주님과 만남을 확실히 하고 그 순간을 통해서
영원을 만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아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3절)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와 동의어입니다.
따라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태초에 예수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천하에서 최고의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주의 역사 속에서 영원한 실체는
오직 하늘에 속한 4차원의 세계 곧 하나님(말씀) 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하나님 말씀이 되시는 이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의 것들은 아무리 대단하고
뛰어나고 날아다니는 것이라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신 그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곧 오심으로
이제 이 땅에 예수님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은
성경의 요약이요, 인생의 요약이요,
역사와 우주 만물의 요약이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은 신약 구약으로 나누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참 진리가 무엇입니까?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역사가 무엇입니까?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중심이요 모든 것의 끝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창조시에
하나님과 함께 했던 창조주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구속주입니다.
창조와 구속은 분리 될 수 없는
하나의 연속된 행위입니다.
창조는 구속의 시작이요 구속은 창조의 계속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계신 분입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곧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이십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3-5절에서
말씀이신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사역을 하십니다.
그렇기에 창조사역과 구속사역을 하십니다.
요한은 그 말씀이 구체적인 인물로 역사에 나타나셨는데
그가 바로 예수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9-14절)
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됩니다.
이제 빛이며 진리인 예수를 받아들이면
빛과 진리와 생명 안에 거하게 되지만
그를 거부하면 그것이 바로
어둠이며 거짓이며 곧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예수님에 대한 반응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과
거부한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영생의 부활로 나가고자 합니다.
2.빛과 생명이신 예수님(4-5절)
창조의 중재자요 만물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를 흑암과 죽음에 앉은 인류를 밝힐
소망의 빛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한 완전한 빛으로써
죽음과 어둠에 처한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5절에서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라는 이 구절은
빛의 근원이신 예수가 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은 그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빛이 없을 때 세상은 암흑입니다.
빛을 거부한 세상은 캄캄한 암흑 곧 죽음입니다.
어둠에 속한 세상 사람들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생명과 빛이 되시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땅,
유대인들에게 왔지만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였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하여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를 영접하기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참 말씀’이 아니고 율법의 전달자이듯이
세례 요한도 ‘참 빛’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모든사람들이 자기로 말미암아
’참 말씀‘이자 ’참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사람-
증언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15절)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의 자녀(11-12절)
11-1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은 ’자기 땅‘ 곧 세계의 중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 곧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매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방인이라고 해도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기쁨 소식입니까?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어졌다고 말하면서 이는 혈통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노력하고 애써서 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십니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란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땅에 속한 것이요
3차원 적인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하늘에 속한 4차원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는 자와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이 분명하게 갈라지게 됩니다.
빛에 나라와 어둠의 나라로
생명의 나라와 죽음의 나라로 갈라지게 됩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가 이 세상 온 이후
모든 것의 기준은 예수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온 세상을 뒤집어엎는 예수 혁명, 말씀 혁명입니다.
세상에는 이에 비견할 혁명은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대단한 권력과 부와 지식을 가졌어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3차원 땅에 속한 자가 되지만
거지나 천민도 예수를 믿으면 4차원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됩입니다.
4.성육신하신 예수(14절)
14절을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은 말씀에 대한 최고의 찬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교리의 핵심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육신의 사상의 배경은 다니엘서 7장에
그 사상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유대인들은 다니엘서를 가까이 하면서
메시야 나라를 가까이 임하기를 바랐습니다.
당시는 하나님이 하늘로 철수해 버린 상황과 같은
우울한 역사적 현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인자 같은 이가 하늘로부터 오신다는 것은
곧 메시야의 도래와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상징합니다. (단7:13)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짐승은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데 반해(단7:3)
인자 같은 이 곧 메시아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십니다.
이는 짐승으로 상징되는 세상 나라와
천상에 속한 메시아 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표현과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는 표현의 근저에 구약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천막을 치다는 말입니다.
‘천막을 치다’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할 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세운
성막을 반영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천상의 말씀이 지상의 육신이 되었다는
‘천상성전인 말씀’이 ‘지상성전인’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성막이 건립된 이후 여호와의 영광의 상징인
구름이 성막에 충만한 모습을 연출합니다.(출40:34-35)
이는 예수가 구약의 성막(성전)을 대신하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임마누엘)는
사실의 절정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성육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모든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음을 계속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자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라는 말은
은혜가 곧 진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은혜의 진리입니다.
성육신이야 말로 은혜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가 은혜이고
땅에서 하늘로가 율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오심 곧 성육신이야말로
하늘 하나님이 땅 인간으로 왔다는 말은
은혜 개념에 가장 걸맞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육신이 곧 복음, 은혜이요
성육신의 복음의 끝자락, 가장 낮은 자리가 십자가요
십자가의 복음이 은혜의 결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을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끝없이 낮아지심
곧 성육신의 자리가
‘은혜와 진리’ 충만한 자리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내리사랑’이
잘 드러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내리 사랑의 절정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요한복음의 서론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대략적으로 살펴 보았습니다.
이렇게만 생각해도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육신의 입고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럴 수 있으며
누가 나에게 그렇게 행하였습니까?
죄인인 나를 위해
하나님과 원수인 나를 위해
그저 죄짓는 일 밖에 할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해
말씀이신 그 하나님께서
빛이신 그 하나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 자녀 삼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을 통해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소원과 기대를 가지고
주일날 요한복음을 만나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복음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