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탄숙은 홍위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629년 지은 서당으로 작지만 올곧은 선비정신이 느껴진다.
이곳은 보통의 서당과는 달리 학생들이 머물방이 없는 것이 특색이 있다.
정훈진 jhj131@idaegu.com
경북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된 양암정은 홍위 선생이 1612년 지은 정자로 군위군 위천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군위읍 서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위천이다.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효령으로 흐르는 물길과 화산에서 발원하여 우보를 돌아 서편으로 흘러내리는 두 물줄기가 병수리에서 만난다.
태생이 다른 두 개울은 낯선 듯 잠시 맴돌다 군위읍으로 직류하면서 서서히 위천의 위용을 드러낸다.
군위읍 대북동 앞에 이르러 유속이 더딘가 하더니 한차례 휘어 감듯이 돌아흐르는데 그 시작하는 여울을 열풍탄이라 부른다.
반세기 전만 하여도 깊은 호소를 이루며 물이 굽이져 흐르던 곳이나 지금은 그 맑은 물 흔적을 볼 수가 없다.
똬리를 튼 뱀 모양 굽어굽어 흘러 소보를 거쳐 안계~낙동강으로 이른다.
흐르는 물길은 심심찮게 여울을 만들어 낸다.
남계탄, 선곡탄, 양천탄 그리고 내량탄과 부봉탄을 이루고 마지막 여울이 서담탄이다.
여울은 마치 스무 고개를 넘듯 산기슭을 타고 혹은 들녘을 가로지르면서 군위사람들의 젖줄이 되어 유구한 역사의 장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곱 차례나 굽어 돌아 흐르면서 여울(탄)을 만들어가는 까닭에 이 지역 사람들은 십리 길에 여덟 번이나 강을 건너야 한다며 ‘십리 길 팔 도강’이라 부른다.
하구로 내려갈수록 여울의 해발고도는 2m 정도씩 낮아진다고 주민들은 믿는다.
두 번째 여울이 시작되는 남계탄을 바라보고 있는 남계서원은 광해군 시대 서애의 위패를 모시고자 군위유림에서 공동으로 만든 서원이다.
남계서원을 뒤로 하고 물길을 따라나서면 넓고 비옥한 농지를 따라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고 여울소리가 들리는 곳에 정자를 짓고 학숙을 연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천렵과 수렵을 즐겼던 보통사람들과 달리 선비들은 물길이 소리를 내는 여울가에 작은 별채를 마련하고 바람과 달을 불러들여 풍류를 즐겼다.
공부방으로 지은 칠탄숙과 절벽 위에 위태롭지만 멋스럽게 선 양암정이 또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일곱 여울 칠탄숙
남계서원의 뒤쪽, 편안한 구릉지로 이뤄진 산은 다섯 손가락 모양의 기운이 모인 오지혈이다.
중앙의 장지에 해당되는 명당 터에 서애 유성용 선생의 조부묘소가 있는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묻혀 있다.
서애선생의 어머니 연안 이씨 부인은 시어른이 세상을 떠났으나 마땅하게 상례를 치를 산소가 없어 막막해하면서 얼마 동안 집안에 모셔두기로 하였다.
그때 이씨 부인의 친정 부친이 돌아가시게 된다.
비교적 넉넉한 형편이던 친정 집안에선 명성이 있는 지관을 불러 장지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오지혈 자리에 묘터를 정하게 된다.
당대에 정승을 얻을 수 있는 대단한 명당이라는 말을 들은 연안 이씨는 은근히 욕심이 났던 모양이다.
당장 시어른을 묻어야 할 땅도 없었거니와 명당이라는 말에 그만 자신의 시어른을 모셔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서애의 모친은 꾀를 내어 지관이 보아둔 그 명당 터가 물이 새겨드는 아주 나쁜 터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마음먹었다.
부인은 밤새껏 산 아래 개울에서 물을 길어 그 명당 터에 갖다 붓기 시작했다.
들락거린 발자국 표시를 숨길 생각으로 오르내리는 길에는 베를 길게 깔고 발자국 표시를 감추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이튿날 산소로 결정해 둔 그 터에 물이 흥건히 스며든 것을 본 지관과 상주는 그만 불길하다는 생각에 묘지를 포기하고 새로운 터를 정한다.
친정 부친의 장례를 무사하게 마치고 상가가 좀 여유를 찾을 무렵 연안 이씨는 상주인 친정 오라버니에게 시어른을 모실 장지터가 없다고 하소연하며 그 버려진 묘터를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지혈의 명당 터에 서애의 조부가 들어앉게 되고 그 발복의 탓인지 서애 유성용은 선조대의 명정승에 오르게 된다.
이 오지혈 명당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인구에 오르고 있다.
남계서원 앞에 이르면 물길은 U자형으로 꺾어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강과 마을로 접어드는 길의 갈래도 벌어진다.
강을 놓친 듯이 길은 마을 안으로 깊숙하게 접어드는 느낌이다.
십 여길 지점에 이르면 양지바른 군위읍 어실리(외량리)에 이른다.
내량과 외량을 합한 옛 이름이다.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사이에 둔 두 마을은 서로 맞물려 하나로 놓인다.
100호가 넘는 꽤 큰 시골 마을이었는데 일제가 들어서면서 굳이 둘로 나눠 내량과 외량이라 부르게 했다.
일제는 칠탄숙에서 지혜가 열렸던 주민들을 하나로 합쳐 놓기보다 둘로 쪼개서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불협을 조장케 한 것이다.
동절기의 어실 마을은 하얀 설원이다.
들녘과 마당이 모두 하얗게 채색된 세상이다.
앞산의 도래솔 가지에는 이팝나무꽃 마냥 하얀 눈송이가 탐스럽게 매달려 있다.
노루 길 만큼 눈을 헤치고 골목으로 들어선다.
제법 높은 지대 위에 세워진 칠탄숙(七灘塾:전통시대 작은 학교)은 단촐한 홑건물이지만 뭔지 모를 외경심을 안겨준다.
경북문화재자료 제215호로 관리되는 칠탄숙은 광해군(1629년) 시대에 지어졌다.
서애를 따라 임난 의병에 참여하고 인조 대에 병조정랑과 예천군수를 봉직한 서담 홍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한 서원이다.
서당도 서원도 아닌 숙, 학교의 규모야 그리 눈을 끌어당기지 않지만 반듯한 모양 속에 숨어 다잡는 역사의 숨결은 어느 큰 서원도 범하지를 못할 것만 같다.
달필로 쓴 현판이 지붕 아래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고 그 아래 양쪽 기둥에 길게 드린 주련은 비록 비에 젖고 바람에 닳았지만 배움을 일깨우는 그 뜻은 변하지 않았다.
‘시서 만권의 책은 모름지기 선비가 읽어야 하고
해와 달 양 수레는 하늘과 땅의 눈과 같아라.’
여느 서원과 달리 칠탄숙에는 학생들이 머물 방이 없다.
마루 한 켠에 훈장이 기거하는 단칸방 ‘필방청’이 그 전부다.
겉모양이야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그 오랜 역사를 올곧게 이어 내려온 정신을 여기에서 만난다.
마루의 도리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비망록 판각이 있다.
조선조의 제왕과 황후의 제삿날을 빼곡하게 적어놓은 현액이 그것이다.
임금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추모했던 흔적일진대 군사부일체를 지향한 전통사회에서 효충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가치로 교육했음을 알게 한다.
마루 한가운데 덩그렇게 놓여 있는 큰 나무 상자인 장판각은 장서고로 쓰였으나 장서류는 모두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지고 없다.
일제의 총칼도 한 초민의 의기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칠탄숙을 거쳐 간 구한 말의 홍종현은 학숙의 정신을 올곧게 지켜나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서출로 태어난 홍종현은 학숙의 정규생이 되지 못했던 까닭에 이삭 줍듯 글 줍기를 하였다.
그는 숙의 마당가에 혹은 담장 아래서 동료들이 공부하는 소리를 따라 하면서 배운 뒷글로 자신을 일깨워 나간다.
그러다 기미년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방방 곡곡에 울려 퍼질 때 홍종현은 분연히 만세대열에 참가하여 국권회복의 궐기를 높이 쳐든 인물이다.
일제가 배급하는 등유를 거절하고 들기름으로 불을 밝혔고, 배급으로 나오는 옥수수 가루를 거절하고 피감자로 끼니를 이었던 그는 마치 수절하듯이 일제의 말과 글은 물론 문물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한평생을 맞서 살았다.
군위군에서는 문화원 뒷자리에 그의 의기를 추모하는 석비를 세워두고 있다.
언덕 너머 굽이 돌아가는 칠탄의 여울물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 왜가리 한 마리 앉은 듯한 양암정
이수가 길어지면 유량도 풍성하게 는다.
학숙에서 20여리 내려 소보면 내의리에 이르면 또 한 번 큰 여울이 된다.
열풍탄이나 남계탄에 비하면 한참 저지대다.
족히 세 길이나 되고도 남을 높은 바위절벽 위를 딛고 조가비 같은 작은 기와집 한 채가 서 있다.
그것이 곧 양암정이다.
바위 위에 앉은 왜가리가 깃을 내리고 쉬는 형상이라 할까. 작은 호소 위에 띄워 놓은 날렵한 조각배 같다할까. 북쪽의 산자락에 기대고 강가에 깊숙하게 접근한, 동서남이 탁 트인 바위 언덕 위를 참으로 작은 정자가 지킨다.
경북문화재자료 제216호인 양암정은 1612년(광해군 4년)에 서담 선생이 세워 학우들과 함께 자연을 찬미하고 토론을 즐긴 곳이다.
눈으로 기왓골을 하얗게 덮어버린 겨울 정자는 은빛에 눈부시다.
절벽 위의 모서리 같은 좁은 땅에 다시 토석담장을 두르고 그 끝단에 조그마한 문을 열어 놓았다.
기단석 같은 자연석 아래 ‘양암정‘이라 음각을 해둔 현판석은 마른 넝쿨에 반쯤 가린다.
자연과 벗하면서 망중한과 안빈낙도를 즐긴 서담의 흥취와 그 정자에 오르내린 사람 내음을 옛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움집처럼 작고 소박한 공간이기에 정자의 주인은 그 자신을 내려놓고 풍류를 즐겼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운이가 바위 위에 또 하나의 다른 바위를 올려놓은 것일까. 좁고 외진 곳이지만 유속이 빠른 물결을 바라보면서 산과 들녘 그리고 달빛 지나가는 소리와 더불어 자신의 굳센 정신을 다진 마음의 바위인양 여겨진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바위를 두고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한 유치환의 ‘바위’를 떠올리게 한다.
바위를 빗대어 목표를 향해 꿋꿋이 매진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드러낸 듯한 양암정. 작은 정자는 사면이 마루다.
다시 겉 담을 쌓아 밖과 마당과 마루, 3자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공간이다.
마루에 오르면 철철이 변화하는 자연의 소리 또한 따라 앉는다.
군위읍을 품고 직류와 곡류를 번갈아 즐긴 위천의 여울따라 서담은 정자를 열고 자연을 벗 삼았다.
그의 학덕을 기리던 후대인들은 여울 중간 지역에 학숙을 내고 또한 독서를 즐겼다.
생각을 넓히고 노래하면서 자유를 소요한 선인들을 두고 나는 ‘일 곱 여울에서 책 읽고 달 띄우다‘ 고 화답한다.
선경을 또 어디서 찾으랴.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첫댓글 이 글을 쓰신 분이 잠시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서애선생의 외가는 의성 점곡 사촌리로서 외조부는 선안동김씨인 송은 김광수이며 고로 서애 모친은 연안이씨가 아닌 안동김씨이고 묘지 이야기는 전주 류씨 무실 입향조인 류성이 요절했을 때 배위인 내앞의 의성김씨가 부군 장지를 정할 때의 스토리인 것 같은데 ....
서애 할머니 연안이씨(이형례 女=오봉 이호민의 고모) 이야기를 착각했고,연안이씨와 함께 처가 인근 산 오지탄금혈에 묻힌 서애 조부 간성군수 류공작 공 이야기입니다. 산소에 물을 붓는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전해 지는 설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