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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원문보기 글쓴이: 東彦(23世)
○7세 호군공(휘 훈, 자 子和 1467~1539)
▶관직: 병조차정, 병절교위, 돈용교위 용양위부호군(병조차정, 병절교위, 돈용교위 용양위부호군)
▶배위: 의인 예안(선성) 김씨(통찬 김홍의 따님)
▶자녀: 2남 1녀 ( 연, 한, 고윤원)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비위 묘 동원. 덕전(德田) 재사. 음 10월 11일.
▶사록: 공은 무예가 뛰어나서 별시위(別侍衛)에 등록되었으며, 만년에 가산을 크게 증식하여 가역(종가 50여 칸을 이건)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1533년(중종 28) 자식 3남매에게 각자 몫의 재산 및 노비를 3대 원칙(부부 동의, 평균분배, 손외지급 금지)으로 상속한 금급문기를 남겨 조선 초 분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공의 호를 비롯해 모두 6호로 구성된 주촌 호적단편(戶籍斷片, 1528. 중종)이 있는데, 복합 가족구성, 신백정의 본관 기록 및 용어 등은 신분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료이며, 이것은 고려말(1390~1391)에 작성된 화령부(和寧府) 및 개경(開京) 호적 이후 현재 발견된 조선시대의 호적으로선 가장 오래된 고문서이다.
공은 가난한 이를 돕는데 친소를 가리지 않았는데, 아우인 감이 조몰하자 친자녀처럼 교육, 성취시켜 전토와 집을 마련하여 주었으며, 또한 성종 12년 큰 흉년에는 가마솥을 걸고 죽을 쑤어 인근 마을의 굶주린 자를 구제하였다. 문손(門孫) 인행(仁行)이 찬한 공의 묘갈명에 「활 잘 쏘아 백발 백중 이로되 높이 날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어긋났던가? 가난한 집 부자되어 가난한 이 보살피니 어찌 선행을 그렇게도 닦았던가! 자손이 번창하고 문 또한 빛났으니 하늘의 소부(所賦)가 풍부함이여!」라고 하였다.
1517년 공의 재종숙인 송재공(휘 우, 1469~1517)이 안동부사 재직시 공에게 「사대부 집에서는 모두 4대를 봉사하고 또 불천위를 받드는데 우리 집은 이미 송안군 신주를 조매 했으니 다시 조주 할 수는 없고 가창 조부님은 본조의 원종공신이고 자손에게 음덕을 끼쳤으니, 내가 체임 될 때 족회를 열어 불천위로 모시려고 했으나 지금 병이 깊어 실행하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군은 종장(宗長)으로서 내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을 잊지 말고 불천위로 모실 것을 논의하여 내 뜻을 이루도록 하여라」하는 유언을 남기고 관직에서 서거하였다.
그 후 주촌 종손 훈(1538), 연(1561), 희안(1563)이 졸하고, 1565년 희안의 대상이 임박하면서 윗대 신위에 대한 체천(遞遷)이 논의되고 송재공의 유언을 근거로 불천위 추대가 본격화 되었는데, 퇴계도 예문을 재삼 상고한 끝에 문중 여론대로 선산공 신주를 종가에 모실 것을 송간공에게 분부하였으며, 드디어 1565년 족회를 개최하여 선산공을 불천위로 결정하게 되었다.
2남 직장공 한은 일직파이며 5남(희성, 희맹, 희정, 몽득, 몽란)인데, 희맹은 정자동파, 희정은 사곡파로 분파되었다.
○8세 훈도공(휘 연, 자 浩然 호 慶流亭. 1492~1561)
▶관직: 영덕과 의성의 훈도 역임. 통사랑
▶배위: 단인 능성 구씨(내금위 인정의 따님). 계배, 단인 평해 황씨(장사랑 이경의 따님)
▶자녀: 배, 1남(희안), 계배, 4남 1녀(윤황, 희옹, 희윤, 희열, 박문두)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사야(沙野)재사. 음 10월 12일. 계배 동원. 배 가후동(家後洞)재사. 음 10월 12일
▶사록: 대인(待人)과 접물에 힘쓰고 문호를 지켰으며, 만년에 정자를 창건, 재종숙인 퇴계가 경류정이라 편액하고 시 한수를 권면하였다. 1561년 장남 희안과 가창재사 중수(1차). 특히 1540년(중종 35) 훈도공 사노(私奴) 복만(卜萬)의 금급문기가 집필되었는데, 복만은 재산이 매우 유족한 사노로서 현재까지 발견된 노비 분재기로는 가장 이를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작성한 분재기였다는 점에서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2남 윤황은 번곡파, 3남 희옹은 주촌파, 4남 희윤은 정로위공파, 5남 희열은 이동파로 분파되었다.
○9세 참봉공(휘 희안, 자 우중. 1511~1563)
▶관직: 참봉
▶배위: 숙인 의성 김씨(학봉 조부 충순위 예범의 따님).
▶자녀: 3남 5녀(정회, 정백, 정수, 권선, 유심, 권의중, 박원준, 이함)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 선비묘하 배위묘 동원(합장). 가후동(家後洞)재사. 음 10월 12일
▶사록: 품성이 화락하나 의리에 맞지 않으면 즐기지 않았으며 유업을 독실히 지켰다. 부인 의성 김씨(1517~1578)는 온순하고 덕망이 있어 집안 간에 간언이 없었으며, 봉제사와 빈객을 접대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1561년 가창재사 중수(1차).
2남 정백은 숙부 희옹(훈도공 이훈의 3남)에 계후하여 주촌파 2세가 되었고 3남 정수는 연곡파로 분파되었다.
○10세 송간공(휘 정회, 자 景直. 호 송간1542~1612)
▶관직: 광국원종공신(1590), 행 수의부위(1569), 적순부위(1569), 선무랑(1569), 선교랑(1571), 승훈랑(1573), 봉훈랑(1575), 봉직랑(1575), 통덕랑(1577), 충무위부사용(1579), 통예원인의(1586, 1589), 용양위부사정(1589), 사온서주부(1590), 사헌부감찰((1590, 1591), 횡성현감(1591), 군자감판관 겸 횡성현감(1593), 의형현감(1597), 안동진무학교수(1604)
▶배위: 숙인 아산 장씨(병조참의 장윤종의 따님).
▶자녀: 3남 2녀(擘, 摯, 揫, 이립, 박직)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서후면 명동. 배위묘 동원. 명동(鳴洞)재사. 음 10월 16일
▶저서: 송간문집, 송간일기, 진성이씨 세전유록, 족중완의, 군도첩, 남매화회문기 등
▶사록: 6세부터 조부 훈도공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여, 10세에 권대기(權大器, 忍齋) 문하에 취학하고, 15세에 문조(門祖) 퇴계에게 수강하면서 문하생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1561년 20세에 성혼, 그 해에 조부상, 2년 뒤에 부친상을 당하니 22세의 나이에 주촌 종손이 되었다. 1568년(무진)에 조정의 구봉령(具鳳齡, 柏潭), 정탁(鄭琢, 藥圃) 등이 천거하여 이듬해 약관 28세로 수의부위(종 8품)가 되었고, 승훈통덕랑에 승진하면서 벼슬의 길을 택하였다.
1578년(무인)에 모친상[전염병으로 별세, 이 때 3노 2비가 함께 전염되어 사망하는 변고 발생]을 당하니 제매들에게 명하여 집을 나가 피하도록하고, 홀로 빈차(殯次)에 거처하며 봉전(奉奠)하여 마침내 무사히 복(服)을 마치니 모두들 신명의 도움이라고 했다.
1576년 적자(賊子)의 변(친부시해사건)으로 안동부가 현(懸)으로 격하되자 공이 유겸암(謙庵 柳雲龍)과 상의하고 안습독(習讀, 安夢說)과 함께 상소해서 복호(復號)하였다.
1589년 왕실의 계보(명나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음)를 바로 잡고 오라는 상감의 명을 받고 임연재(臨淵齋 裵三益, 正使)와 송간공(副使)이 사신으로 연경에 들어가 예부에 진정, 설득하여 마침내 회전의 세계 내용을 수정하게 하였고, 황제의 칙서로 환조, 등사하여 귀국함으로써 큰공을 세워 1590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에 녹공되고 작위를 하사 받았다.
이해에 송소 권우(松巢, 權宇)가 천연두를 앓게 되자 7주야를 조병하며 심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병사하였는데, 가난으로 상례를 치를 길이 없자 공이 재물을 내서 대소렴의 예를 하였다.
1564년(명종 19)에 6대조 선산공 묘 입갈(立碣), 1565년(을축) 작산 가창묘우(可倉廟宇)창건, 1567년(정묘) 본가 정침 서편에 사당을 이축하고 불천위 결정으로 가창묘우에 봉안한 선산공의 위패를 이봉(移奉), 조부가 동구 밖에 창건한 경류정을 본가 향나무 상단으로 이건.
1592년(임진) 4월에 왜구가 각주군을 함몰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관찰사에게 제보하고 현창(懸倉)을 봉쇄, 각군을 점검한 후 弟 정백(휘 庭栢, 호 樂琴軒, 1533~1600, 생원시 급제, 진사, 의병대장)을 본향으로 보내 의병을 창기하게 하고, 공은 대오를 정비, 복병을 갖추었으며, 또한 높은 산에 의병을 설치, 군병이 중성함을 보여 적이 감히 침입하지 못하게 하여, 읍리를 완전히 보존하였다.
군자감판감 겸 횡성현감의 의무를 마치고 환향하니 백성들이 공의 덕을 생각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1597년(정유)에 서애 선생(휘 柳成龍, 호 西厓)이 본도의 체찰사로 재직시 공을 의흥현감으로 천거하여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끝에 군수자리를 계승하였으며 무술년에 병으로 사직하니 의흥에서도 역시 입석하여 공의 치적과 미덕을 칭송하였다. 1598년 진보의 문암산 천석에 초당을 세우고 옥동서원을 건립하여 퇴계선생을 봉향하기 수년만에 귀향하여 유림교류, 향회 및 위선사업에 주력했다.
서애선생이 고향에 거처하면서 모든 향안의 정속, 입기(正俗立紀)는 나이가 동갑인 공과 논의하여 정하였으며, 그 외 안동 사림의 향규 등도 공에게 의뢰하여 입안하였다. 이 시기 안동의 향권을 장악한 사족 계층은 대부분 선초로부터 첨설직, 동정직, 군공, 과거(添設職, 同正職, 軍功, 科擧) 등을 통하여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며, 향안의 재 작성 등을 통하여 그들의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예로 공이 주도하여 1605년에 작성된 신정10조(新定十條) 등은 신흥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공이 향회를 주도한 것은 영남 사림파를 결속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공이 1586년(병술) 서울에서 정약포, 유서애, 족숙인 이영도(이영도, 호 동암) 등과 함께 강신사(講信事)에 대한 논의로 조정에 있는 영남사족을 결집하고자 한 것이 그 예로 볼 수 있다.
1604년(갑진) 안동에 무학(武學)을 설치하고 강무당에서 교수로 활약 하였다. 1605년(을사) 대홍수로 소실된 대소제의 축제를 관장하여 포항제와 송항제를 쌓아 후일 수재를 막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 39년에 주촌 서당골에 지남서당을 세우고 삭망에 강회를 열어 학도들을 가르치니, 부윤(府尹, 현감) 정선생(한강 정선생)이 전토를 지급하여 선비를 육성하는 자산으로 하게 하였다. 그리고 선조 41년(무신) 주촌에 송간정을 창건하여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다.
공은 직계 종손으로서 학문적으로 스승이자 집안의 어른이었던 퇴계가 있었기에 문사를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때 두 사람에 의하여 세계가 명쾌하게 밝혀진 새로운 사실은 선대가 안동으로 이주한 시기와 이유, 운구 및 운후 형제와 그들의 출생 순서 등이었다. 1564년 퇴계는 공에게 위의 사항을 상고할 문적이 종가에는 있을 것 같으니 찾아보라 분부하였는데, 이에 공은 여러 세대의 문기를 조사해 보니 시조나 송안군에 관한 문적은 없고, 다만 판사를 역임한 조황(趙璜)의 처 김씨가 1399년(건문 원년)에 발급한 분재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문기에 의하면 이들 부부는 보성에 거주하다 1383년(계해) 왜란으로 인하여 마라촌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때 남편(조황)의 7촌 조카인 운후가 지성으로 봉양하였기 때문에 시양자(侍養子)를 삼아서 노비 등을 물려주었고, 또 그 형인 운구에게도 노비를 주었다고 언급되어 있었다. 퇴계는 이 문건을 살피고 [마라촌 이주설 및 형제의 차서 역시 의심할 바 없다]라고 말했다. 운후의 7촌 숙 조황은 타성 친척이었으며, 무자하여 일시 양자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7촌 숙이라면 운후의 고조부에서 나온 인물이 된다. 따라서 운후의 조부 석을 시조로 하는 진성이씨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았기에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의문사항이 풀리게 되고 공으로 볼때에는 9대조로부터 계보가 확립된 것이다. 이를 근거로 10대 까지의 세전유록이 집필되고, 공이 참여한 진성이씨 족보 필사본이 퇴계 서거 13년 후인 1583년에 완성되었으며, 또한 공이 주도한 최초의 족보인 경자보 3권 3책이 1600년에 목판본으로 발간되었다.
족보 본문에서는 별도로 전면을 할애하여 「이정 9자녀도」를 게재하였는데, 선산공과 그 내외손(133명)들이 족보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4세 선산공은 이 족보의 중흥조로 존숭되었던 것이다. 공은 퇴계 생존시에 이미 불천위로 확정되어 중흥조로 받들어 졌기에, 따라서 선산공을 중심으로 진성이씨가 편성되는 양상이 자연적으로 족보상에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11개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9개파가 선산공 후손으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2개파는 공과 같은 항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서문에서도 「족보 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이정의 후손들이며 정회는 곧 7세 종손이다」라고 하여 그 계통이 선산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송간공에 이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609년(기유)에 상감께서 양규(良規)를 구했는데, 공이 노신의 간정한 우애(憂愛)로 요점을 지목한 6조(①기강진작 ②법치주의 ③군정쇄신 ④균등부역 ⑤인재등용 ⑥백성안정)를 건의하여 치국의 근본이 되게 하였다.
공은 학봉 김성일(송간공과 내외종간, 학봉이 4년 장인데 공을 동기와 같이 대하고 교류하였음) 및 서애 유성룡과 사실상 안동 사림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로서 1542년 10월 30일 주촌에서 출생하여 1612년 8월 24일 향년 71세로 고종하였으며, 1794년 유암사에서 작산 송안군묘로 이봉하여 부향되었다.
◎송간일기[1577(선조 10년, 정축)~1612(광해 4년, 임자)] : 전 4권의 초서체 일기인데, 임란 전후 생활사 및 영남 사림파의 형성과정과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공은 의술, 침술, 산학, 창(歌曲唱), 사냥 등 사족으로는 드물게 다양한 전문지식과 취미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재임 중에 임진왜란을 겪게 됨으로써 당시의 수령들이 국가적 위난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들이 다수 있다. 공이 몰세한 당해연도까지의 기록인데, 만년에는 문도들과 강론하고 후학을 지도 하였으며, 동헌(童憲)을 만들어 아동교육을 독려하는 등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진성이씨 세전유록[16세기 말~ 17세기 초] : 시조~9세 및 弟 정백에 이르기까지 모두 10인의 약전(略傳)을 싣고 있다. 약전은 그때까지 전해지고 있던 고 호적(1447, 세종 29) 및 백패(白牌), 정안(政案)등 가문 전래의 고문서를 근거로 작성하였다. 이 문서로 인해 비로소 진성이씨 세계가 명확하게 정립되었고, 후대 각파 문적정리 및 족보 발간의 근거가 되었다.
◎남매 화회문기[1580년(선조 13, 만력 8) 7월 25일] : 공과 동생 6인(3녀는 조실로 제외)이 부모 및 조상 전래의 토지, 노비 등의 재산을 분재한 문서이다. 「···7남매가 화의하여 문서를 만들어 두는 일은····· 어머님께서 불의의 병에 걸려 토지, 노비를 전계하고자 문서를 초해 두었거늘, 생각해 보면 망극하다. 조상의 원의를 어기고 흠을 내거나, 서로 다투면 이 문기로 관에 고하여 바로잡고 당사자는 불효죄로 논단한다.·····착명서압」
◎족중완의[1583년(선조 16) 10월 초2일. 1596년(선조 29) 4월 23일]: 족계(외손 포함) 규약인데, 춘추강신, 혼인, 부조, 상구예비 등을 목적으로 창계하였으며, 참여 인원은 39명이고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정회, 정사성(호 지헌), 권우(호 송소) 등이다.
◎군도첩(5사합위일영지도)[1597년(선조 30, 만력 정유)]: 5군영의 조직 지휘체계 등을 도표로 만든 군도첩인데, 실전 및 훈련 등에서 사용되었다. 임란직후 수도권 및 외각을 방어하는 5군영 중 훈련도감은 유성룡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이 문서에는 또 지역 단위별로 장정을 차출하고, 훈련시켜 국방력을 강화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어 16~17세기 군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11세 진사공(휘 벽, 자 巨卿. 1568~1609)
▶관직: 성균진사
▶배위: 의인 동래 정씨(정원근공의 따님).
▶자녀: 2남 1녀(증효, 민효, 충의 채극계)
▶묘소: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작산 선영(선산공) 묘 후, 배묘 부군 묘 동
▶사록: 천성이 후덕하여 모나지 않았으며, 우(友)와 친족에게 화목을 돈독히 하고 가난한 사람을 항시 구제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의탁할 곳이 없는 종매(從妹)를 집에 데리고 와서 성혼까지 시키니 친족들은 모두 의로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동기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입석을 마쳤으며 그 외 위선 사업에도 주력하였다. 39세(병오)에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입문하여 학문에 몰두하다가 질병으로 조세하였다. 1602년 종가 침실 중위 10칸을 개축하였으나 북량위는 완역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12세 마봉공(휘 증효, 자 學可. 호 磨峯. 1594~1674)
▶관직: 승사랑
▶배위: 단인 청주 정씨(종사랑 정기의 따님).
▶자녀: 4남 3녀(방익, 방로, 방한, 방량, 유세정, 권이전, 조)
▶묘소: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작산 선영 좌록, 배묘 부군 묘 후 동원
▶사록: 어릴 적부터 재지(才智)하여 조부 송간공이 큰 그릇이 될만하다 여겨 총애하였다. 1609년(을유) 16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3년 뒤인 1612년(임자)에 조부상을 당해 중상(重喪)이 되었으니 19세에 주촌 종가의 주인이 되었다. 김순전 선생에게 사사하여 궁사격물 및 실전이행 학문에 전념하였다. 수은공(李弘祚, 호 睡隱), 졸재공(柳元之, 호 拙齋) 두 사람과 교분이 두터웠는데 말하기를 「내 친구 학가는 모습이 화락하고 단아하니 참으로 군자다」하였다.
공은 선세유적과 선대 및 당대의 봉선 사실을 편집 정리하여 봉선록에 기록하였는데, 이는 진성이씨 주촌 종가의 역사이며, 후대 각파 문적정리 및 족보 발간의 근거가 되었다. 만년에 소학을 제작하여 자손들에게 주며 「사람의 모습을 이루는 책이니 내가 늙어서 너희들에게 줄 것이 없으니 이 책을 체득하여 깊이 행동하는데 힘써라」하였다.
1630년 부정공이 정한 구기에 종가 40여칸을 신축하고 1652년 사당 이축, 1656년 가창재사 중수(2차). 1631년 중년에 실전된 부정공 묘소를 되찾았으며 1670년 입석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