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산이 보낸 경고
안선모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실로 나왔더니 엄마가 잔잔한 바다 위 하늘을 가리켰다.
“레니, 자외선 지수가 심상치 않아. 아침운동은 포기하렴.”
아침마다 갑판 위 트랙을 열 바퀴 뛰는 게 나의 아침 운동이다. 40여 년 전만 해도 자외선 지수는 1부터 10까지 있었으며 10이 가장 위험한 수치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10을 넘는 건 예사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늘 발코니 룸에서 밖을 바라보신다. 자외선 지수가 낮은 날에도 두 분은 햇볕 아래 서는 것을 두려워하신다. 피부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가 보름 남았는데 겨울 느낌이 하나도 안 드는구려.”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 입가에 미소가 떠돈다. 옛 시절을 떠올리시는 거다.
“우리 때는 겨울이면 눈이 펑펑 내리고, 얼음도 꽝꽝 얼고 그랬지.”
“눈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타곤 했죠.”
“그때가 좋았어.”
“암요! 그때가 좋았고말고요!”
아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는 늘 이렇다.
“땅에 발 딛고 살면 소원이 없겠는데…. 휴우.”
할머니의 깊은 한숨이 거실까지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 한숨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륙양용에 잠수함의 기능까지도 갖춘 배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어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땅이 무척 낯설다. 가끔 우리 배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고원지대에 정박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어질어질하고 발바닥 아래가 출렁출렁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감격에 겨워 흙에 얼굴을 대고 눈물까지 흘린다.
나는 내 방에 있는 모니터 화면을 보며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쳤다. 학기 말에 제출할 프로젝트에 대해 아빠의 조언을 듣고 싶어 서재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아빠의 얼굴이 무척 심각하다.
“루이 아저씨가 보낸 이메일을 보고 있었어. 들어와도 돼.”
아빠와 루이 아저씨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그래서 나랑 루이 아저씨의 아들 노아도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노아 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나는 살짝 걱정스런 마음으로 컴퓨터 화면을 보았다.
Our Watermelon Mountain is gone.(우리의 수박산이 사라졌어.)
짧은 글 한 줄이 두통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노아 아빠는 원래 다정한 인사에서부터 시작해 가족안부, 계절 인사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편지를 시작하는 분인데.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아빠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수박산? 수박산이 어디에 있는 건데요?”
아빠는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어릴 적 추억이 몽땅 들어있는 수박산이 사라졌으니 네 아빠의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 게다.”
어느 틈에 오셨는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거실로 이끌었다. 잠시 후, 엄마의 손에 이끌려 아빠도 거실로 나왔다.
“아빠, 수박산 얘기 좀 해주세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년 전, 아주 먼 과거 얘긴데 괜찮겠어?”
아빠의 말에 내가 씩 웃었다. 어른들이 과거 얘기를 자주 하면 살짝 짜증을 낸 건 사실이다.
과거의 지구, 과거의 생활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많이 배운 내용이다. 물론 옛날처럼 학교 건물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 출석해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시대 아이들은 모니터를 통해 온갖 것들을 배우고 익히고 있다. 과거 얘기는 세계뉴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는 얘기다. 환경문제가 일어나 결국 지구가 이렇게 되었다는 얘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내용이다.
“아빠의 개인적인 과거 얘기는 꼭 듣고 싶어요.”
이번에는 아빠가 씩 웃었다.
“열 살 사내아이들에게 눈 덮인 고원지대는 상상력과 모험심을 부추기는 곳이었단다. 루이와 나는 날마다 알프스 고원지대에 올라갔지. 그러던 어느 겨울날, 하얀 눈이 붉게 변한 걸 보았어. 우리는 호기심에 급히 그곳을 파 보았단다. 그런데 파면 팔수록 붉은 눈이 나왔어. 우리는 흥분했고 그곳을 ‘우리의 수박산’이라 명명하고 모두에게 비밀로 붙이자고 했지. 그런데 내가 수박산을 그림으로 그리는 바람에…….”
그때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아빠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 바턴을 넘겨받아도 될까?”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 할아버지가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 교수로 근무하던 시절, 이도와 루이는 쿵짝이 잘 맞는 친구였단다. 루이는 바로 옆집에 살았고 동갑이었지. 둘이는 학교가 끝나면 알프스 고원지대를 온통 헤매고 다녔어. 어느 여름날, 이도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제목이 수박산이었는데 고원지대의 중심이 붉은 색이었지. 그때 나는 미세조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거든. 그 붉은 눈이 마음에 걸려 이도에게 계속 물었지. 이 그림, 상상으로 그린 거냐고, 아니면 어디서 본 거를 그린 거냐고. 심상치 않은 눈치를 챈 이도가 붉은 눈을 보았다고 말했고, 나는 부리나케 연구팀을 꾸려 산으로 올라가 눈을 파헤쳤어. 그랬더니 이도가 말한 붉은 눈이 쏟아져 나왔던 거야. 눈치 빠른 신문사 기자들이 우리를 쫓아왔고, 그 모습을 죄다 찍어 신문에 실었지. ‘빙하의 피’라고 제목을 붙였고, 신문을 본 사람들은 신기한 일이라며 고원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어.
레니, 너도 알다시피 예전 지구는 빙하가 많았어. 해가 지날수록 빙하가 녹아내렸고, 나와 몇몇 학자들은 이게 나쁜 징조고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말했지만 그 일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어.”
할아버지의 말을 듣다 보니 예전에 배웠던 ‘빙하의 역사’가 생각났다. 옛날 지구에는 빙하가 많았다. 사람들이 환경을 더럽히면서 기후위기가 몰아닥쳤고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눈이 빨갛게 된 건 미세조류 때문이라고 했다. 미세조류가 좋아하는 이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많으니까 미세조류가 그걸 먹고 세력을 불린 것이라고. 색이 빨간 건 아마도 미세조류의 어떤 성분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지구는 뜨거워졌고 결국 빙하가 거의 녹아내린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말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레니,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야. 빙하가 녹았고, 전 세계 사람들은 난민 아닌 난민이 되었지. 그래도 오랫동안 각 나라에서 국토가 침수될 것에 대비해 많은 걸 준비해 놓아서 다행이야. 우리가 살던 곳은 완전 침수되어 우리는 배를 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빙하의 녹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고 서서히 세계 여러 나라의 국토가 침수되었다. 2050년까지,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해까지 침수가 진행되었다. 국토가 완전히 침수된 나라도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서해안과 남해안의 도시가 침수되었고 남은 땅은 1/3 정도뿐이다. 사람들은 자기 형편에 맞는 배를 구입했다. 배를 구할 형편이 안 되거나 바다에 떠 있는 생활을 거부한 사람들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 살고 있다. 국가마다 마련한 인공 섬에 사는 사람들도 꽤 많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나는 아빠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그러니까 아빠와 루이 아저씨가 처음 발견한 수박산이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는 거네요. 나는 아빠 마음을 아주 조금 알 것 같아요. 뭔가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느낌이겠죠?”
내 말에 아빠가 껄껄 웃었다.
“레니가 위로해 줘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여보, 이참에 우리 노아네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낼까요?”
그 말에 나는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를 질렀다.
“좋아요! 좋아요!”
“그래, 오랜만에 땅 좀 밟아보자.”
노아네 가족은 아직도 알프스 고원지대에 살고 있다. 프랑스도 낮은 지대는 침수됐지만 알프스 지역 높은 산은 건재했다.
그때 거대한 드론이 갑판 위를 빙빙 돌다 엊저녁에 엄마가 주문한 생활용품을 떨어뜨리고 갔다. 배가 있는 곳의 위도와 경도만 입력하면 드론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물건을 배달해준다.
우리 배는 지금 완전히 가라앉은 일본 땅 위를 지나 태평양 한 가운데로 나가는 중이다. 작은 섬나라들이 모두 사라진 태평양은 훨씬 더 큰 바다가 되었다.
삐삐삐~
거실 모니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커다란 모니터에 노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크리스마스를 우리 가족이랑 같이 보낸다며?”
“응, 그래서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아마도 크리스마스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걸?”
내 말에 노아가 활짝 웃었다. 주근깨가 더 많아진 노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번 학기 프로젝트 제목이 떠올랐다. 자외선과 주근깨에 대한 연구.
“노아야, 고마워.”
“뭐가?”
“그냥, 네가 있어서. 너희 가족을 만날 수 있어서. 옛날 지구처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내 말에 노아가 외쳤다.
“Are you crazy?(너 미쳤냐?)”
지금은 2060년 12월 10일. 크리스마스를 보름 앞두고 있다.(끝)
첫댓글 실감(?)나는 이야기네! 😢
이런 세상이 올까 봐 두려운 마음으로 썼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