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회견, 물어야 할 것 묻지 않는 한국언론
스스로 언론포기일 뿐 아니라 언론 막는 (反)언론
대통령의 방미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나온 가장 특징적인 장면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들이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인 한국에 손해를 입히는 것이 타당하냐”는 것과 “한국의 대통령실에 대한 도청 재발 방지를 약속했나”라고 바이든 대통령에게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이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그 질문이 한국 기자가 아닌 미국 기자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것에 있다. 한국 기자들로부터는 이런 질문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미국 기자가 질문을 하고, 한국 기자는 질문하는 미국 기자를 쳐다보고, 그것을 뉴스로 보도했다. 미국의 백악관에서 펼쳐진 이같은 모습은 지금의 한국 언론의 현실, 특히 한국언론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바로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의 언론, 질문을 하지 않는 한국언론이다.
YTN 화면 갈무리.
언론의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쓰는 것이고, 그래서 ‘기자(記者)’인 것이다. 그러나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먼저 쓸 무엇이 있어야 하는 일이고, 그 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질문이다. 그러므로 기자를 기자되게, 언론을 언론되게 하는 것은 질문에 있으며, 기자와 언론의 일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언론의 권력이며,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권리이며, 또한 같은 이유로 언론의 의무가 된다.
한국의 언론은 그렇다면 질문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언론이 집권권력을 향해 보였던 맹렬한 질문 공세를 떠올려보면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장관 후보자와 가족들을 상대로 한 한국언론의 수천 수만 개의 질문들을 기억한다. 그것은 언론의 이름으로 가해진 한 가족에 대한 망치질이었고, 난도질이었다. 질문을 잃어버린 언론과 질문의 융단폭격을 가하는 언론, 그 질문의 결핍과 난무에 한국 언론의 양극단의 현실이 있다. 언론이 잃어버린 것, 혹은 버려버린 것은 질문의 능력과 기술이 아니라 질문을 하려는 의지다. 질문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질문의 포기인 것이다.
특정한 시기에 질문할 의지를 놓아버리는 한국언론의 모습은 지난해부터 역병과도 같이 한국언론에 퍼지고 있다. 지난해 6월 언론비평 매체인 미디어오늘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과 답변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토 정상회의에 가는 대통령이 비행기 안에서 취재진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신의 부인을 소개했는데, 그녀의 등장에 취재진 사이에서 ‘와우’ ‘오오’ 라는 소리가 나왔다. 대통령은 부인에게 “한 말씀 하시라”고 했지만 별다른 답이 없자 취재진은 “비행 어떠셨나요? 여사님”이라고 물었다. 갖은 물의와 의혹을 빚고 있는 인물을 눈앞에서 만났을 때 기자들의 입에서 나온 일성은 그 의혹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인기 여배우의 등장에 환호하는 듯한 탄성이었다.
기자들의 환호가 터져나온 또 다른 장면이 있었는데, 7월 11일 대통령실이 코로나 재확산을 이유로 출근길 대통령의 질의응답(이른바 도어스테핑)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한 다음날 대통령이 출근길에서 “뭐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요”라고 말하자 취재진은 “오!”라고 환호했다. 한 기자는 “대통령님 내일도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다. 이 매체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상 하루 만에 대통령 출근길 질의응답 입장이 번복된 사유를 묻는 질문은 없었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질문하지 않는 한국 언론을 나라 밖으로까지 보여준 장면도 있었다. 박근혜 씨가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시절 국민들은 ‘질문을 받지 않는 대통령’을 내내 봐야 했다. 그때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담화 발표회나 낭독회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질문을 받지 않는 대통령은 ‘질문하지 않는 기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G20 정상회의 때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겠다고 질문해 달라고 거듭 요청해도 우리 기자들이 끝내 손을 들지 않던 모습은 그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린 장면이었다.
질문이 없다면 언론의 언론됨은 가능할 수가 없다. 질문이 없다면 아무리 부수가 많다 한들 그것은 하나의 소식지는 되겠지만 언론이랄 수는 없다. 사실은 그 소식조차 온전한 것이 못 된다.
언론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론이 언론에 못 미치는 것으로 되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문제인 진짜 이유는 언론이 ‘비(非)언론’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언론이 질문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언론 자신의 언론 실종에 그치지 않는 것은, 제대로 질문을 하고 싶은 이들의 질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국민들을 대신해 질문을 대신 해 주는 언론이 질문을 포기할 때, 그것은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질문의 기회를 막아버리는 것이 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비언론을 넘어 ‘반(反)언론’이 되는 것이다. 언론의 이름으로 언론을 막는 것, 그것이 질문하지 않는 한국언론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