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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엘리트의 민낯이 연이어 폭로되고 있다. 낙마한 김인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본인이 한국 풀브라이트 동문회 회장일 때 딸이 2년간 1억원에 이르는 풀브라이트재단 장학금을 수령한 것을 비롯해 김 후보자 본인과 배우자, 두 자녀 모두 재단 장학금을 수령했다는 사실이 언론의 검증과정에서 드러났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역시 두 자녀 모두 정 후보자가 재직 중이던 경북대 의대에 각각 지역 인재 특별전형과 편입으로 들어간 사실이 알려져 ‘아빠 찬스’ 의혹이 불거졌다. 그런가 하면 한덕수 국무총리 지명자는 고위 관직 사이사이에 두 차례나 김앤장 고문으로 고액 자문료를 받아 논란이 일었다. 한동훈 장관 딸에 대해서도 스펙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공통점은 엘리트의 지대추구적 행위와 지위 대물림 시도다. 지난 정권에서도 내내 논란이 되었던 내로남불과 불공정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논란을 기해 진영을 막론하고 이른바 한국의 엘리트 집단이 일반 국민에게 얼마나 ‘비루한’ 존재가 됐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 2019년 인사청문회 준비단에 도착해 입장을 밝힌 뒤 엘리베이터에 탔다.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혼자 미소짓는 게 우연히 포착됐다. [중앙포토]
우선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의 울분 얘기부터 해야겠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 첫 내각 인사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때의 논란만큼 국민적 반응이 뜨겁지 않은 데 대해 분통을 터뜨리곤 한다.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이들과 조국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논란의 법적 도덕적 경중을 따지기 이전에, 조국은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답지 않게 권위를 내려놓고 SNS로 열심히 소통한 덕분에 한때나마 대중 사이에서 지식인과 엘리트의 권위를 표상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몰랐던 어떤 지위 높은 아무개가 아니라 ‘존경하는 엘리트’에 대한 환상이 깨지니 심리적 후유증으로 그를 둘러싼 논란의 후폭풍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조국만 겪은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이번 분당갑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 국민의힘 후보 역시 한때는 청년들에게 존경받는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그러나 주요 선거에서 지지층의 요구를 배반하고 박원순·문재인과 정치적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그런 지위를 상실했다.
존경받는 엘리트의 실종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특히 ‘포스트 조국 시대’에 엘리트, 더 구체적으론 지식인의 위상이 한없이 초라해졌다는 사실이다. 갓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인사 잡음에서 대중의 분노보다 냉소와 허탈이 앞서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보편적인 존경을 받는 엘리트/지식인/학자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보편적인 서사와 이론의 힘이 약해지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전통적 의미의 보수라면 조국 전 장관의 추락에 고소해 하기 이전에 이런 냉소가 만연해진 분위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탈권위도 냉소만큼 깊이 생각해볼 주제다.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스스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회지도층의 탈권위를 촉진하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탈권위는 매력적인 지도자로 보일 수 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윤 대통령에게는 전직 대통령들처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스토리라든지 민주화라는 거대서사가 부재한다. 그의 사법고시 9수 이력은 자수성가형 미담이라기보다는 술 좋아하는 그의 성격과 더불어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같은 곳에서 밈(meme)으로 소비될 법한 유머 요소에 더 가깝다. 취임 첫날부터 경제와 안보정책 방향성보다 대통령 자신이 살 집과 근무처에 대한 화제로 언론이 도배될 만큼 그에겐 ‘큰 이야기’가 없다. 대중이 지도자로서 존경하기 어렵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백화점의 한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고 있다. [사진 독자 제공]
그럼에도 (간발의 차이였지만) 국민은 윤석열을 선택했다. 존경하지는 않더라도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조국 사태나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 같은 비상식적인 일련의 사태들을 겪고 나니 대중은 더는 ‘존경받는 어른’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많은 이들은 (최소한)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을 선택했다. 정책과 이념보다는 제스처와 태도가 대선 결과를 가른 것이다.
나는 고발한다. J’Accuse…! 다른 기사
그런 면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과 엘리트의 위상 추락은 상호 연동된 현상일 수 있다. 물론 각계각층의 전문성을 대표하는 엘리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중 일부는 유튜브나 SNS에서 유명세를 얻기도 한다. 과거와 달라진 건 그들을 소비하는 대중이 더 이상 그들에게서 지적·도덕적 권위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적·도덕적 권위보다는 (거대 미디어 플랫폼의 성장 속에서) 예능적 요소가 주목을 끄는 시대가 됐다. 대상이 아무리 엘리트여도 재밌는 스토리텔링이나 예능적 요소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엘리트는 대중의 눈에 그저 비루한 노잼들이다. 위선보다는 차라리 흥미로운 위악이 더 낫다는 여론이 다수를 점한 시대의 풍경이다.
지적·도덕적 권위 대신 예능만 기대
현재 한국의 엘리트 자신도 민중에 대한 부채감이 거의 없다. 사석에서 만나보면 엘리트 대다수는 매우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편적 관점을 견지하려 노력하는 전통적 의미의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오타쿠’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자신을 그 자리에 오게끔 해준 이 사회에 대한 ‘빚’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사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비판의 날을 세운 대상도 그러한 사회적 유대감을 상실한 엘리트의 정신적 퇴폐다. 대중도 이런 속내를 알기에 신뢰하기는커녕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과거엔 대중과 엘리트의 문화적 유대관계의 단절이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엘리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자신들이 출세하는 과정에서 지원해준 가족, 지역사회, 더 나아가 민중 전체에 대한 부채감을 의식했다. 좌파는 이를 제도적 재분배로 풀어나가고자 했고, 우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구현을 강조하는 등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사회계층이 굳어진 이후 그러한 상호 간의 유대감이나 부채의식 자체가 문화적으로 생경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엘리트의 사라진 부채의식
여기서 나타나는 중대한 역설이 있다. 엘리트와 대중의 유리는 불평등 심화의 결과이지만 정작 담론장에서는 이런 불평등이나 격차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섰다. 자칭 좌파라는 자들은 PC(정치적 올바름)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통해 대중을 가르치려 들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구별 짓기’ 하려 한다. 반대 극단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능력주의적 사고로 빠져든 채 엘리트의 지대추구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자정 노력 자체를 상실하고 있다. 저 둘은 달라 보이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더 이상 ‘보통사람’에게 공감할 수 없게 된 엘리트들의 비루한 민낯이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세를 떨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늘날 서구사회 정치를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가 주도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들 모두 대중의 이해를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 결과 트럼피즘이나 브렉시트가 나왔다. 어리석은 ‘트럼프 지지자’ 혹은 ‘브렉시트 찬성파’라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바로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박가분 작가
박가분연구자이자 작가
필명. 블로그 '밝은 서재'로 2010년대부터 이름을 알린 진보 성향 작가. 『일베의 사상』과 『혐오의 미러링』(공저) 『공정하지 않다』(공저)등의 책을 냈다. 경제학 박사이며 주 분야는 거시경제 및 정치경제다. 청년단체 '진보너머'의 운영위원이다.
중앙일보는 세대 갈등이 첨예하던 2021년, 2030세대가 기성세대를 향해 던지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 칼럼 시리즈 ‘나는 저격한다’로 온라인 공론장에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당시의 문제의식은 그대로 유치한 채 필진과 대상, 주제를 확장한 ‘나는 고발한다’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매주 월~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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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gd****50분 전
조국 서울대 교수에 대한 분노는 그 수법이 대중에게 익숙한 위조란 범죄에 의한 자녀의 계층 상속이란 점에서 국민이 분노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 직접적인 범죄없이 부모찬스를 활용한다는 도덕적 상실에 해당한다는 차이가 있다. 간단한 논리다. 학교에서 상장 한 장이 위조되어 대입에 활용되었다면 누구나 범죄로 인식하지만, 부모의 도움(인맥이든 재력이든~)으로 하나의 과제를 제출했다면 범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저 가진자들의 혜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즉 가진자들의 기득권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의 괸심이나 분노는 무딜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재력이나 기타 기득권이 있다해도 거리에 나서면 큰 차이가 없다. 별도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골프를 모르는 사람에게 필드문화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찮가지다. 냉소적이 이런 분위기는 사회가 한단계 더 발전해야 수면위로 나올 것이다. 재벌이나 엘리트를 더 이상 존경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적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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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pray****3시간 전
존경받는 엘리트가 사라졌다는 부분에 동의합니다. 시대 정신을 이끌어 나가던 지성이 이제는 잊혀지거나 쇠락했습니다. 그 이후 부분에서는 저는 좀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는데 대중은 '존경받는 엘리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보다 '필요 이상으로 엘리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의 발달이 연애인의 모공을 더 잘 보여주듯 우리는 엘리트도 같은 욕망을 가진 인간임을 목격합니다. 과거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는 알고리즘이 두 눈에 떠 먹여줍니다. 이런 흐름은 최근 들어 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은 어찌보면 더 대중 사회와 유리되어 살아가던 덕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탈권위라기 보다는 본인은 그것을 권위라고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권위지요. 대중은 두 도둑 손을 번갈아 들어주고 있을 뿐이지 않을까요. 그나마 옛날 도둑질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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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m****3시간 전
중앙일보는 완전히 망하려고 저런 우동사리류 종자의 글을 내보내는구나. 진보라는 것들이 어떤 망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협되고,싸가지 없고, 대충봐도 앞뒤가 맞지않는 말을 주장한다면 땅속에 묻고 꽉꽉 밟아줘야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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