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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산과 영취산을 이어탄 뒤 내려선 흥국사.
산행 마감시간이 촉박, 주마간산으로 카메라만 휘둘러대며 답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흥국사(興國寺)는 1195년(명종 25) 고려후기 승려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라는 흥국의 염원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 임란 때 경내에 300여명의 승병 수군이 조련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보물 396호)’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빗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대웅전 후불탱화(영산회상도)는 1693년(숙종 19)에 천신(天信)과 의천(義天)이 제작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1645년에 건립한 팔상전(八相殿)과 불조전(佛祖殿), 순조 때 건립된 ‘원통전(圓通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응진전·무사전(無私殿)·첨성각(瞻星閣)·적묵당(寂默堂)·심검당(尋劒堂)·노전(爐殿)·백련사(白蓮舍)·법왕문(法王門)·봉황루(鳳凰樓)·천왕문(天王門)·영성문(迎聖門) 등 15동의 당우가 있다.
이 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홍교(虹橋), 보물로 승격된 노사나불 괘불탱(掛佛幀), 사적비와 경전 93권, 경판 236매, 법수대사탑(法守大師塔)·경면당탑(敬面堂塔)·호봉당탑(虎峯堂塔)을 비롯한 부도 13기 등이 있다.
- 여수시 흥국사에서 보유한 문화재 -
1. 보물 제396호 _ 여수 흥국사 대웅전
2. 보물 제563호 _ 여수 흥국사 홍교
3. 보물 제578호 _ 여수 대웅전 후불탱
4. 보물 제1331호 _ 여수 노사나불 괘불탱
5. 보물 제1332호 _ 흥국사 수월관음도
6. 보물 제1333호 _ 흥국사 십육나한도
7. 보물 제1550호 _ 여수 흥국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8. 보물 제1556호 _ 여수 흥국사 동종
9. 보물 제1566호 _ 여수 흥국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 시왕상 일괄 및 복장유물
10. 보물 제1862호 _ 여수 흥국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11.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_ 흥국사 원통전
12.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 _ 여수 흥국사 심장보살도
13.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0호 _ 여수 흥국사 제석도
14.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_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
15.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8호 _ 흥국사
16.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_ 여수 흥국사 팔상전
< 계 보물 10점, 유형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2점 계 16점>
흥국사 뒷편으로 내려서는 '108돌탑길'은...
정성이 깃들어 있다.
흥국사 뒷편을 내려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당우는 원통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원통전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널리 두루 통한다.’라는 의미로 관세음보살이 모셔진 법당이며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여수 흥국사 원통전(麗水 興國寺 圓通殿)은 조선 명종 15년(1560)에 다시 지어졌다가 정유재란(1597)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앞쪽과 양쪽에만 있고 건물의 뒷쪽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흥국사 원통전은 선암사 원통전과 함께 사찰건물로는 특이한 양식에 속하는 건물이다.
원통전 안에는 '천수 천안 십일면 관음 보살이 모셔져 있고,
그 옆면에는 불화가 걸려 있다.
천수 천안 십일면 관음 보살상(千手 天眼 十一面 觀音菩薩像)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가진 관음보살상이며, 불상 뒤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다.
원통전은 ‘丁’자형의 건물로 돌출된 삼면이 모두 제각각 팔작지붕이다.
정면에 돌출된 툇마루가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불단을 중앙에 두고 참배객들이 불단 주변을 돌 수 있도록 하였다.
흥국사 원통전 안내판.
만월당.
해동선관 잠긴 문.
계단 높히 작은 문을 들어서면...
팔상전이다.
흥국사 팔상전(八相殿 전남 문화재자료 제258호)은 조선후기(17세기경)에 건립되어 중수한 다포계 3칸 팔작지붕으로 대웅전에 버금가는 부속건물이다. 어간문은 4합, 양옆은 3합문으로 빗살문과 정(井)자 문을 하였다.
기둥에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이 나타나 전통적인 형식을 띄고 있으며, 불단 위에는 ‘亞’자형 닫집이 있어 매우 호화롭게 하였다.
50여점의 조선후기 명문 기와가 확인되어 흥국사 불사의 연혁도 알 수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의 일대기를 묘사한 팔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평면구조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갑석이 있는 단층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높이보다 기둥 사이가 더 넓은 편이다.
이와 같은 평야적·남방적인 요소는 수덕사 대웅전과 무위사 극락전에서도 보인다.
앞면에는 모두 사분합문을 달았는데 밑에는 2단의 궁창판을 두었으며, 위에는 문의 일부를 구획하여 교창처럼 꾸몄다.
공포는 내외삼출목의 다포계이며, 귀공포의 구조가 매우 복잡하다.
이 건물은 포작의 안쪽에 연꽃과 서조를 새기는 등 장식적이면서도 견고한 면이 있으므로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괘불에도 화려한 용이 조각되어 있고, 이것은 대웅전을 반야수룡선으로 해석한 데서 나온 ‘법화신앙’적 표현이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네주는 배로 보기 때문이다.
대웅전 편액의 낙관을 확인하니...
'강희 48년 기축6월 일 조성 판자 시주 통정대부 찬민'.
‘대웅전(보물 396호)’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빗살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대웅전 후불탱화(영산회상도)는 1693년(숙종 19)에 천신(天信)과 의천(義天)이 제작한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우물천장 연꽃밭엔 용과 봉황이 장식되었고...
내부 바닥은 마루이며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괘불에도 화려한 용이 조각되어 있고,
흥국사 대웅전을 받치고 선 돌계단에는 거북, 게, 용 등이 새겨져 있다.
석등에도 민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난기 가득한 거북 받침 위에 사각형 돌기둥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는 공양상이 네 기둥 역할을 하는 특이한 형태의 화사석이 올려져 있다.
원래 이 석등은 이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는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을 그린 것으로 17세기 제작되었다.
대웅전은 석가 삼존불을 모시는 곳으로 인조 2년(16240에 계특대사가 흥국사를 다시 세울 때 지어졌다.
대웅전 후불탱 안내판.
대웅전 목조 석가여래 삼존상은 석가모니불,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로 각각 현세·과거·미래불을 상징한다.
범종각의 편액을 가까이...
범종각 편액.
여수 흥국사동종(興國寺銅鐘)은 1665년(현종 6) 순천 동리산 대흥사(大興寺) 혹은 대진사(大眞寺)에서 김애립(金愛立)이 주성하였다.
김애립은 조선시대 주종장 가운데 김용암(金龍岩)·김성원(金成元) 등과 더불어 사장계(私匠系)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동종이 어떻게 해서 흥국사에 보관되고 있는지 그 연유에 대해 자세히 밝혀진 것은 없다.
동종은 2008년 보물 제155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두 마리의 용은 밋밋하게 솟은 천판에 머리를 바짝 붙이고 양발로 천판을 딛고 서 있으며 하나로 연결된 몸체로 종 고리를 만들고 있다.
쌍용을 종 고리로 삼고, 천판에는 큼직한 연화문대를 돌렸다.
범종각의 사물은 법고와 운판, 목어, 대종을 말한다.
여수 흥국사는 널따란 부지에 조성된 절집이 아니라 당우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심검당과 적묵당에 에워싸인 대웅전).
'의승수군유물전시관(興國寺 義僧水軍遺物展示館)'.
1773년부터 1812년 사이 흥국사 승적에 오른 의승은 300명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흥국사에 있는 ‘법왕문’과 ‘봉황루’는 의승들과 연관이 있는 전각들이다.
‘공북루(拱北樓)’라는 현판도 흥국사에 승병들이 주둔하였던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작성된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장계(狀啓)에서 흥국사 승병들의 활약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승병들의 업적을 기리고 사찰 문화재의 도난 훼손 방지 및 보존·전시를 위해 2003년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여수 흥국사 강희 4년명 동종'(麗水興國寺康熙四年銘銅鍾 1665년 보물 제1556호)
'여수 흥국사 노사나불괘불탱(麗水興國寺盧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331호)'.
노사나불괘불탱은 절 법당 앞뜰에서 괘불대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만든 걸개그림 형태의 대형 탱화이다.
흥국사 원통전(圓通殿)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화.
개설 1723년(경종 3) 의겸(義謙) 등 10명의 화원(畵員) 비구(比丘)가 제작했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작품이다.
16나한도 가운데 조선 후기에 가장 먼저 그려진 불화가 바로 ‘흥국사 16나한도(興國寺十六羅漢圖)’이다.
좌우 각각 세 폭으로 여섯 폭이며, 서로 마주하도록 대칭되게 배치한 독특한 구성으로, 조선 후기 나한도의 선구가 되는 뛰어난 작품이다.
‘여수 흥국사 삼장보살도(麗水 興國寺 三藏菩薩圖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99호)’는 흥국사에 있는 조선시대(1741년)의 불화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작품 중에서는 빠른 시기의 작품이다.
‘여수 흥국사 제석도(麗水 興國寺 帝釋圖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99호)’
제석천을 주존으로 하는 제석천도와 호법신들을 그린 천룡도를 별도로 제작하여 2폭이 1조를 구성하는 형식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화기를 통해 1741년(영조 1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돌계단을 내려서면...
봉황루(鳳凰樓)와 선불장(選佛場).
'봉황루'는 부처님에게 예불을 드리고 제반의식을 행하는 장소로서 1729년 팔도 도총섭 덕린, 승통대장 찬민, 팔도 도총섭 자헌 스님 등 300여 승군들과 400여 명의 신도들이 뜻을 모아 세운 누각이다.
'선불장'은 2층 전각으로 선불도량(選佛道場) 또는 선불당(選佛堂)이라고도 한다.
승려가 부처나 조사가 되기 위하여 좌선등을 하는 수행을 선불(選佛)이라 하는 것.
천왕문을 벗어나면...
'영취산 흥국사 중수사적비(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1703년(숙종 29)에 건립하였다.
1703년(숙종 29)에 흥국사의 승려 성능(性能)이 최창대(崔昌大, 1669∼1720)를 찾아가 비문을 청하여 이진휴(李震休, 1657∼1710)로부터 전제와 비문 글씨를 받아 1703년(숙종 29) 6월에 비를 건립하였다.
뒷면의 발문은 흥국사 승려 혜일(慧日) 석철(碩哲)이 주도하여 정동호(鄭東虎, 1665~1706)에게 발문을 청하였고, 참여 협조한 시주질과 삼강록 등 140여 명의 인명록을 새겼다.
비문 건립 당시 흥국사는 순천 도호부에 속한 지역이었고, 흥국사에 주진하는 의승수군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을 받았다.
1897년(광무 1)에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여수에 속하게 되었다.
비의 상단에는 횡서의 전서체로 '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라는 비제가 음각되었다.
비신의 좌측에는 '有明朝鮮全羅道順天靈鷲山興國寺重修事蹟碑銘幷序'라는 비명이 종서로 음각되었다.
앞면의 전제는 ‘영취산 흥국사 중수사적비(靈鷲山 興國寺 重修事蹟碑)’이고, 비제는 ‘유명조선국 전라도순천영취산 흥국사중수사적비명병서(有明朝鮮國 全羅道順天靈鷲山 興國寺重修事蹟碑銘幷序)’이다.
비문은 22행으로, 1행 53자이다.
끝에 비문을 지은 이와 전서 및 비문 글씨를 쓴 사람, 그리고 연기를 적고 있다.
비문의 지은이는 ‘중훈대부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 최창대찬(中訓大夫 行弘文館脩撰知製敎 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崔昌大讚)'이고, 전서와 비문 글씨는 '가선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 이진휴병전(嘉善大夫 行承政院都承旨 兼經筵叅賛官春秋館修撰官 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李震休書幷篆)’이며, 연기는 ‘숭정갑신후육십년 계미육월일립(崇禎甲申後六十年 癸未六月日立)’이라 하여 1703년(숙종 29)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을 지은 최창대는 영의정 최석정의 아들로서 당대의 명문장이었고, 비문을 쓴 이진휴도 숙종대에 '통도사 사리탑비', '선암사 중수비' 등 많은 작품을 남긴 명필이었다.
이수는 일부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지만 측면의 구름 무늬와 그 안의 두 마리 용의 모습은 정교하게 양각되었다.
석비의 머릿돌 이수(螭首)는 머리가 비상(飛翔)하는 듯하고 비늘이 표현된 몸체가 구불구불 감겨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그래서 비신의 머릿돌인 비수(碑首)에 새긴 '이(螭)'라는 의미에서 이수라고 하는 것. ◇ 이(螭)는 뿔 없는 용.
이는 석비의 위상과 품격을 높이고, 비신에 새겨진 비문(碑文)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비의 귀부는 그리 섬세한 편은 아니나 귀갑문은 뚜렷하게 조식(彫飾)되었다.
'흥국사 중수 사적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고, 앞면과 뒷면에 비문이 있다.
앞면에 전제(篆題)와 비제(碑題), 비문, 비명이 있고 뒷면 위부분에는 발문, 아랫 부분은 참여한 인명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일주문이 가까워질 즈음,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승탑들을 모아 놓은 '흥국사 승탑군(興國寺 僧塔群)'이 배열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경서당탑(敬西堂塔), 응운당탑(應雲堂塔), 우룡당탑(雨龍堂塔), 응암탑(應庵塔), 보조국사탑(普照國師塔), 호봉당탑(虎峰堂塔), 금계당탑(錦溪堂塔), 능하당대사탑(凌霞堂大師塔), 취해당탑(鷲海堂塔), 무명탑(無名塔), 중흥당법수대사탑(中興堂法修大師塔), 낭월당탑(朗月堂塔)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12기의 승탑은 석종형 3기 외 모두 구형 승탑으로 16세기에 2기, 17세기 4기, 18세기 3기, 19세기 2기, 20세기에 1기가 건립되었다.
원래는 흥국사 관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으나 1986년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영취산 흥국사 일주문(靈鷲山興國寺 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면 맨 먼저 통과해야 하는 문이 바로 일주문이다.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이 하나라고해서 생긴 이름으로 이곳에서부터 절의 경내이니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해야 한다라는 의미.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찰이 일주문을 갖추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주문이 없는 사찰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흥국사 일주문 현판의 낙관엔...
'가원(嘉園) 이영식(李榮植) 서(書)'. 창원 성흥사 나한전의 편액도 가원 선생이 썼다.
일주문을 지나면 매표소. 문화재 관람료는 2,000원(경로우대).
소형차들이 주차할 수 있는 '남북평화통일기원' 자연석비 로타리 옆에는...
아치형 홍교가 있다.
'여수 흥국사 홍교(麗水興國寺虹橋 보물 제563호)'는 1639년 계특대사가 축조한 것으로 홍예석교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는 부채꼴 모양의 화강석 86개를 맞추어 틀어올린 홍예가 완전한 반원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석교다.
홍예석 위로는 잡석으로 석축을 올리고 시렁돌 4개를 가로로 설치하고 그 위에 돌기둥을 올린 다음 흙을 덮어 노면을 만들었다.
다리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홍예석 양쪽으로 돌출된 마룻돌 끝에 용의 머리를 새겨 다리 아래 하천을 굽어보고 있다.
흥국사에는 본래 일주문이 없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천황문 아래 영성문(迎聖門)이 정문(正門)의 역할을 해 왔다.
이 영성문은 수박다리(水薄다리: 나무로 시내를 건너질러 만든 다리)로서 성인(聖人)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있다.
즉 여수 흥국사 홍교를 건넘으로써 세속을 떠나 영성문을 통과하면 사천왕의 보호를 받는 불법의 사계(寺界)에 들어옴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여수 흥국사 홍교는 세속과 불국토의 갈림길이며 흥국사의 불이문(不二門)이라 할 수 있다.
홍교(虹橋)는 무지개 다리를 뜻하며, 흥국사 홍교는 현재 남아 있는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이 다리를 건너 부처의 나라로 가는 모든 중생을 보호하는 의미를 지녔으니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중흥저수지를 지나 조성 중인 대형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환자가 발생하였으나 무사히 귀환하였다.
환자를 매표소에서 기다리게 한 뒤 우리 버스가 태우러 올라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