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3 나해 대림1주일
이사 63:19-64:8 / 1고린 1:3-9 / 마르 13:24-37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왔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21)”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미’를 의미한다면, 사도 바울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 8:19)”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직’을 뜻합니다. 이 개념은 우리 신앙인들과 교회 공동체에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죽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그날 온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 나라가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우리는 그 임무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역사를 통해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구원을 향해 노력하고 그 진리를 전파하였습니다.
교회의 달력은 대림절(Advent)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대림이란 좁게는 태어나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넓게는 참된 구원과 진정한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 말하는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앉아서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구원과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이미’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쁨과 신비를 주위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mission)’입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이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특별히, 올 해 대림1주일인 12월3일은 교회력으로 ‘프란시스 사베리오(1506~1552)’기념일과 겹치는데, 저는 이 분을 통하여 선교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분의 이름은 서양언어마다 각각 다릅니다. 영어로는 프란시스 세이비어(Francis Xavier)라고 부르지만, 이 분이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스페인어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라고 부릅니다. 이런 여러 이름 중에서 저는 오늘 설교에서는 성공회 기도서에 나와있는 대로 프란시스 사베리오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 기도서는 이 날을 기념하면서 그 이름 뒤에 ‘선교사, 동양의 수호성인’이라고 이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동양의 수호 성인일까 궁금해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소개해 드릴 이 분의 생애를 들으시면, 왜 교회가 이분을 동양의 수호성인이라고 하는지 납득하시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 귀족가문 출신인 사베리오는 당시 유럽학문의 중심인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는 학위를 받은 후, 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학문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은 열망이 큰 젊은이가 어떻게 사제가 되었으며, 나아가 유럽을 떠나 저 멀리 인도, 동남아, 일본, 그리고 마침내 중국에까지 선교하러 간 것일까요? 그것은 파리대학 시절 기숙사 동료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동료는 다름 아닌 예수회라는 수도회의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입니다. 그는 당시 23세이었던 사베리오보다 10살이나 많은 만학도 였고, 전쟁으로 다리를 다쳐 약간 절룩거리며 걸었습니다. 이냐시오 역시 스페인 사람으로서 사베리오 가문보다는 좀 낮았지만 그래도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으로 부상을 당하고 치료와 요양 중에 성경과 신심서적을 읽다가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기도와 영성훈련을 하였고, 늦은 나이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제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에서 이냐시오의 신비로운 신앙체험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종교재판으로까지 회부되자 그는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프랑스 파리로 유학해서 성직을 준비하였습니다.
비록 나이가 많아 공부하는데 있어서 젊고 총명한 사베리오보다 어려움을 겪은 이냐시오지만 그는 자주 사베리오에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태16:26)”라고 인생의 참된 목적을 깨우치도록 조언하였고, 마침내 사베리오는 이러한 이냐시오의 영적권고를 받아들여 세속적 야망을 내려놓고 주님의 충실한 제자가 되기로 서원하였습니다. 이처럼 앞길이 유망한 일단의 파리대학의 젊은이들이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일하기로 약속하고, 파리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에 있는 성당에서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회는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1540년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럽은 대항해 시대에 들어서면서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무역로와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곳에 선교할 선교사를 교황에게 요청하였고, 교황은 갓 생겨난 예수회에게 이 임무를 맡겼습니다. 이냐시오는 이 막중한 임무를 그가 가장 신임하는 사베리오에게 맡겼고, 이리하여 사베리오는 서방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비 유럽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일본에서 최초의 선교사로 활동한 사비에르 신부는 한 번도 접하지 않았던 그래서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는 채 오직 주님의 인도에만 의지하여 낯선 민족, 언어, 문화 등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선교활동에 대하여 교회 역사는 사도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 중 한 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선교 중에 우연히 거기에 와 있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의 사정을 듣게 된 사베리오는 그 일본인을 감화시켜 세례를 주고, 그와 함께 일본으로 가서 선교를 합니다. 그러던 중, 동아시아에서 선교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동아시아 문명의 핵심인 중국을 선교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홍콩과 마카오 근처에 있는 상천도(上川岛)에 도착해서 중국본토로 들어갈 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열병이 걸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후, 그의 시신은 예수회원들에 의해 옮겨져서 그의 고향뿐만 아니라 그가 거쳐갔던 모든 곳에서 그의 영웅적인 선교활동과 신앙을 기리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마지막으로 희망했던 중국선교와 이곳을 통한 동아시아 선교는 그 후, 그의 후배들인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아담 샬(Adam Schall) 등과 같은 기라성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명나라와 청나라의 왕실과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1637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아담 샬과 만남을 통해 서양문물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사상에 깊은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백년이 흘러 1893년 이 강화도 땅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리스도교의 토착화 정신은 마침내 한옥성당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물 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강화도의 지식인들 중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던 선비들과 당시 우리 교회 관할사제인 조 마가(Rev. Mark Trollope)신부 간의 교류에서 저는 프란시스 사비에르, 마태오 리치, 아담 샬로 이어지는 그리스도교 선교정신의 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성공회는 비록 교단은 다르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아시아에 최초로 전달한 위대한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를 동양의 수호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 첫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늘 깨어 있어라(마태 13:3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날과 그 시간을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깨어 있는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했던 것처럼 주님의 빛으로 미몽에서 깨어나고, 그 기쁨을 이웃에 전하는 ‘활동적인 깨어 있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교회 역시 새해에도 ‘이미’ 오신 주님을 맛보는 기쁨을 얻고, ‘아직’ 오시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전도하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시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 내려주시길 빌며(1고린 1:3)”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