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끝나지 않은 전쟁
중공군의 막바지 대공세
이 시리즈의 앞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싸움이 1953년 7월 14일 강원도 춘천 북방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다. 당시의 미 8군 사령관은 역시 맥스웰 테일러였다. 아울러 나는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전황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당시 싸움은 매우 중요했다. 휴전이 맺어진 7월 27일을 보름 앞두고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은 약 30만 명을 동원해 금성 일대 아군의 전선이 북쪽을 향해 두드러져 있는 돌출부를 공격했다. 1951년 5월 말에 벌어진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 뒤에 처음 벌어지는 대규모 공세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화천 저수지 일대를 노렸다. 대한민국 유일의 수력발전소가 있던 화천 저수지를 손안에 넣고, 춘천 지역을 위협하는 상태에서 휴전을 맺었다면 중공군은 3년여 벌어진 6·25전쟁 전체에서의 승리를 선전할 수 있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도 그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고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그는 나름대로 자리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에게는 매우 가혹한 결과였다. 화천 저수지를 내주고 겨우 휴전협정에 조인한다면 그는 역대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참담한 패전을 장식한 지휘관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 전투의 결과는 소상하게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중공군 공세가 벌어진 7월 14일 오후 나는 그와 통화를 했다. “전선이 밀리는데 괜찮겠냐”는 내 질문에 그는 “아직 지켜볼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7월 15일 새벽 1시경에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젖어 있었다.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받아든 전화통 속 그의 목소리는 피곤에 지친 듯도 했다. 그는 내게 “백 장군, 당신이 전선으로 가줄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나는 “갈 수 있다”고 했다. 테일러는 “지금 장맛비가 내려 내 전용기를 대구로 보낼 테니 빨리 올라와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는 빗속을 뚫고 여의도에 내린 뒤 다시 소토고미로 가서 전선을 이끌었다. 내 활약상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나는 미 8군 사령관의 다급한 요청에 따라 전선에 도착해 그동안의 전쟁을 통해 익힌 한국 육군의 능력을 선보였다.
중공군의 막바지 대공세
이 시리즈의 앞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싸움이 1953년 7월 14일 강원도 춘천 북방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다. 당시의 미 8군 사령관은 역시 맥스웰 테일러였다. 아울러 나는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전황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당시 싸움은 매우 중요했다. 휴전이 맺어진 7월 27일을 보름 앞두고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그 전투에서 중공군은 약 30만 명을 동원해 금성 일대 아군의 전선이 북쪽을 향해 두드러져 있는 돌출부를 공격했다. 1951년 5월 말에 벌어진 중공군 제5차 2단계 공세 뒤에 처음 벌어지는 대규모 공세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화천 저수지 일대를 노렸다. 대한민국 유일의 수력발전소가 있던 화천 저수지를 손안에 넣고, 춘천 지역을 위협하는 상태에서 휴전을 맺었다면 중공군은 3년여 벌어진 6·25전쟁 전체에서의 승리를 선전할 수 있었다.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에게도 그 전투는 매우 중요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고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그는 나름대로 자리에 충실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라면 그에게는 매우 가혹한 결과였다. 화천 저수지를 내주고 겨우 휴전협정에 조인한다면 그는 역대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참담한 패전을 장식한 지휘관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그 전투의 결과는 소상하게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중공군 공세가 벌어진 7월 14일 오후 나는 그와 통화를 했다. “전선이 밀리는데 괜찮겠냐”는 내 질문에 그는 “아직 지켜볼 만하다”고 했다. 그러나 7월 15일 새벽 1시경에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에 젖어 있었다.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받아든 전화통 속 그의 목소리는 피곤에 지친 듯도 했다. 그는 내게 “백 장군, 당신이 전선으로 가줄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나는 “갈 수 있다”고 했다. 테일러는 “지금 장맛비가 내려 내 전용기를 대구로 보낼 테니 빨리 올라와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는 빗속을 뚫고 여의도에 내린 뒤 다시 소토고미로 가서 전선을 이끌었다. 내 활약상을 이야기하고자 함은 아니다. 나는 미 8군 사령관의 다급한 요청에 따라 전선에 도착해 그동안의 전쟁을 통해 익힌 한국 육군의 능력을 선보였다.
-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하기 직전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앉은 사람)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등 군 주요 지휘관을 소집한 뒤 촬영한 사진. /백선엽 장군
장관을 이뤘던 경춘가도
서울과 부산에서 급히 징발한 민간 트럭이 한국군과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화약과 전시 물자를 싣고 춘천으로 움직였다.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유일한 도로였던 경춘가도는 그런 트럭으로 거의 주차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붐볐다. 우리 대한민국 건국 뒤에 벌어진 가슴 벅찬 장관이었다.
그런 우리의 역량은 결국 전선에서 대규모 중공군의 공세에 허덕이던 한국군 2군단의 뒤를 받쳤다. 물론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 또한 병력의 이동을 살피기 위해 경기도 포천 이동으로 와서 나와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중공군 공세는 이틀 동안 이어지다가 아군의 역량에 막혀 다시 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 전투는 미군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우선 맥스웰 테일러 미 8군 사령관은 전투 결과에 매우 흡족했다. 자칫 커다란 패전의 흔적을 남긴 채 휴전협정 조인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에게는 아주 다행스러운 결과였던 셈이다. 이를 지켜보던 미군 수뇌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튼 콜린스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금성 전투에서 한국군이 그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줄 몰랐다”고 적었다. 하룻밤 사이에 9㎞가 밀렸던 금성 전투에서 한국군이 후방의 강력한 동원력을 발휘하면서 중공군 공세를 막아낸 점이 경이롭게 비쳤던 것이다. <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