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5일 수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어둠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빛을 보게 된다고 예언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티토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음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우리는 은총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 수 있다(제2독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본향인 베들레헴으로 갔다. 그런데 마침 마리아의 해산 날이 되어 그곳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그 아기는 곧 구원자라 전하며 수많은 하늘의 군대와 함께 하느님께 찬미드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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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몇 년 전 아랍 에미리트의 어느 호텔에 등장한 크리스마스트리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의 제작비가 무려 천백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20억 원이라고 합니다. 다이아몬드, 진주,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 값비싼 보석 181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호텔 측은 이를 기네스북의 등재를 신청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값진 크리스마스트리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화려하고 엄청난 크리스마스트리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더욱더 기리는 기념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값지고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여 태어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분께서는 냄새나고, 짐승을 기르는 마구간에서, 그것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과 120억 원짜리 크리스마스트리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성탄을 경축하고 있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기쁨이 넘치는 전례를 거행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가운데 서로 흥겨워하며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그친다면,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되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에 예수님께서는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시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성탄의 기쁨을 우리끼리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 특히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는 성모님처럼, 이 사회의 보잘것없는 곳에 가서 아기 예수님을 낳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탄을 기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 미사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질 구원을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어 그분의 상급과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우리가 의로운 일을 해서가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전한다(제2독서).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은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 부모와 아기를 찾아내고 하느님을 찬미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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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큰 영광 속에 오시지 않고 고요한 밤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첫 증인은 바로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첫 증인으로 삼으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로는, 목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그 어떤 이보다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는 주님의 탄생을 다음과 같이 예고하였습니다. “나는 그들 위에 유일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하겠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고 그 땅에서 사나운 짐승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러면 그들은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에서도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34,23.25). 이러한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으시는 착한 목자의 삶을 사십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당시 사람들은 목자를 매우 비천한 자로 취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목자들은 생계를 위하여 자기 주인 몰래 양과 염소의 젖, 더 나아가 양털을 내다 팔기도 하였으므로, 죄인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당시의 목자들이야말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 가장 힘겨워하는 이들, 그래서 죄인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주님 탄생의 첫 증인으로 내세우시면서, 예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이들을 먼저 보살펴 주실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목자들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우리가 주님 탄생의 증인이 되어 그분께서 보여 주신 착한 목자의 삶을 증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곧 하느님께서 직접 임금이 되시어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신다(제1독서). 구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마지막 때인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아드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제2독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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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하루(24시간)에 한 바퀴의 주기로 돕니다. 이를 지구의 자전이라고 하며, 밤과 낮이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구의 자전 소리가 있을까요?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있기는 있으나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우리가 듣게 된다면 귀가 터져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진위야 어떻든, 이 지구를 창조하신, 한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듣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하여 가늠할 수 있는 성경 대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직접 전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하셨지만, 때가 차자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듣고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친근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예수님의 강생은 이렇듯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와 만나시어 말씀을 나누고 싶으신 간절한 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
-조재형신부-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특별히 기쁜 것은 그분은 창녀나 세리에게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노인이나 어린이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죄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 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로 예수님의 정확한 탄생년도와 날짜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2000년 교회의 역사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그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성탄절은 가난한 아이의 모습으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주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시고 차가운 겨울날, 말구유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 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성탄 선물로, 새해를 시작하는 선물로 제가 아는 시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해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서공석신부-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루가 2, 1-14.
우리는 오늘 밤, 한 아기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복음은 나자렛의 한 서민 요셉과 그 아내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났고,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만삭인데도 로마황제 아우구스토의 호적등록 명령에 따라 남편인 요셉과 함께 먼 길을 떠났습니다. 타향인 베틀레헴에서 아기는 태어났고, 아기를 영접한 이들은 그 부근에서 밤을 새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이 만들어 기록으로 남긴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이 주님이라 부르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명령을 따라 무리한 길을 떠나야 하는 보잘것없는 서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여관에는 자리가 없어 그 아기는 가축을 위해 만들어진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그 시대 천민이었던 목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의 입을 빌려 선포합니다.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를 위한 큰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초기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성탄의 풍습이 기쁨의 표현들을 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쾌한 성탄 음악들과 화려한 장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 오가는 ‘성탄절을 기뻐하는’ 인사말과 선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역사 안에 남겨놓은 풍습들입니다.
어둠이 가장 길어진 동지섣달의 한밤중에 빛을 밝혀 놓고, 우리는 어둠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이 세상 우리의 삶에는 어둠이 많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웃에게 무자비합니다. 권력을 탐해서 소신을 접어두고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기 한 사람 입신양명(立身揚名) 할 길을 찾기도 합니다. 베풀어진 우리 생명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것이 구원이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에 헤맬 때도 많습니다. 지구촌을 강타한 금융 위기, 여기저기에 발생한 지진, 태풍과 해일 등의 피해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실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절망도 우리는 겪습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들입니다. 구약성서 코헬렛은 이렇게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런 어두움들의 한 가운데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그분은 율법을 잘 지키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이, 가난한 이,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유대교가 지배하던 땅에서, 그분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재물의 유무에 인간의 가치와 행복의 잣대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특별한 고행을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이라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진실을 보여 주는 빛이었습니다.
성탄축일은 예수님이 빈약하고 허약한 인간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호화롭고 호사스런 삶에는 흔히 허세와 허영이 끼어들어 인간 삶의 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허세와 허영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어둠 안에 살게 합니다. 인간 생명이 살고 자라는 건전한 온상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보살핌이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재물만, 혹은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보살펴야 하는, 허약한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인간 욕심이 뿜어내는 어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요한복음서(1,5)는 말합니다. 그런 우리의 어둠 안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다운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율법과 그들의 권위에 맹종할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맹종이 사람을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 생명이 하시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인간이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진실을 당신의 삶으로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9).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우리 욕심의 어둠이 만드는 각종 차별과 갈등을 그 근원에서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복수의 어둠이 만드는 악순환도 그 근본에서 차단합니다. 나눔은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의 차별을 없애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버림받은 이와 버린 이의 차별을 없애는 힘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하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데에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차별 안에 안전과 보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심이 두터워서, 비로소 안심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입니다.
오늘의 초라한 구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약하게 다가갑니다.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겠다는 사람 안에는 나눔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구유의 초라함과 연약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진실입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연약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없애는 보살핌을 실천할 때만, 성탄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 축일일 것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자비와 사랑의 보살핌이 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넘어서 하느님 생명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 빛이 오늘 밤 어둠의 한가운데에 비치고 있습니다. ◆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 미사
루가 2, 15-20.
우리는 어제 밤 어둠의 한가운데 불을 밝혀놓고, 우리 삶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들은 복음은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 이야기의 후반부입니다. 들판에서 밤을 새며 양떼를 돌보던 목자들이 베들레햄의 구유를 찾아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자는 그 시대의 천민(賤民)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서 처음 영접한 사람은 천민인 목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목자들을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목자들이 누구에게 알려주었는지를 이 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고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무대는 베틀레햄의 마굿간입니다. 그 무대에 등장한 인물은 요셉과 마리아뿐이고, 갓 태어난 예수는 구유에 누워있습니다. 여기에는 목자들의 말을 들을 사람도, 듣고 놀랄 사람도 없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가 탄생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신앙공동체의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발생한 현상을 겹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유대교의 사제나 율사와 같은, 그 시대 존경받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이 볼 때, 별 볼일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구유를 찾아온 목자들과 같이 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원리를 소중히 생각하며 삽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옛날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기본으로 한 원리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상을 받고,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교리는 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긍정하며 사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부감 없이 그것을 잘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며 용서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당연한 철칙(鐵則)으로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오늘 목자의 말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루가복음서 저자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초기 신앙공동체에서 볼 수 있었던 현상 하나를 겹쳐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초기신앙공동체의 복음 선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리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과응보를 진리라고 믿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소식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지만 제대로 알아들으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당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복음을 듣는 신앙인들과 신앙인의 모범이신 마리아를 대조하여 말합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의 수태고지(受胎告知), 곧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이야기 하면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말하며 예수를 영접한 사실을 이미 보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 탄생을 알리면서 복음서는 사람들은 기쁜 소식에 놀랐지만, 마리아는 목자들이 전한 말을 듣고 마음속에 그것을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영접하는 신앙인은 복음 앞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기가 기억한 것에 준해서 행동합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생명이 사랑할 줄 알고, 포악함을 보고 자란 생명은 포악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그것은 절대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성장과정에서 본인의 노력으로 새로운 것을 입력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공부하여 얻은 성숙한 인간의 교양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주었고, 그 새로운 기억에 준해서 어릴 때 입력된 기억을 넘어서 달리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되새기면서 그 간직한 것에 준해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의 말을 영접하여 예수를 낳은 마리아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그 모든 일을 당신 마음속에 새기어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보도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모든 일을 배워서 마음속에 새기어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발생한 기억은 신앙인의 삶 안에 실천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인은 계명을 지키고 재물을 봉헌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마음속에 새겨서 곰곰이 생각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그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생명이 하는 일, 곧 자비와 용서를 자기 마음속에 새기고 기억하여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성탄축일이 인류역사 안에 발생시킨 기억은 기쁨입니다.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관습들이 있습니다. 성탄 축일을 전후하여 사람들은 주변을 장식하고, 이웃에게 기쁨을 전하는 선물도 줍니다. 그 관습이 지닌 기쁨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자비롭고 용서하며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실천들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신앙인의 삶에는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요한 1,1-18.
지금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예수님의 기원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만 알립니다. ‘한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워야 하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생명으로 나타났고, 그 생명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는 빛과 같은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도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졌지만,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과 진리의 때가 시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삶은 우리를 위한 은총과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나타낸 은총이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보여준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면서 이스라엘 안에 죄인들만 많이 만들어 놓은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과 달리 가르치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죽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종교 기득권자들이 잘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는 장면에서 요한복음서(2,22)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요한 2,23).
그러나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현재 교회는 개인이 고해소에서 반드시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하느님이 용서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인고백을 수반하는 고해성사는 13세기에 도입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죄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죄의 대가를 치른다고 엄청남 고행을 하기에 그것을 막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본당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그 신부가 정해주는 보속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임의로 보속을 하지 못하게 신부가 보속을 정해주면서 하느님이 자비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발생한 개인고백고해성사입니다.
인류역사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한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권력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종교 집단의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권한이 하느님을 대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리고 짓밟혔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탄이 전하는 메시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기득권자들의 횡포를 정당화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의 작은 생명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선언하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생명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고치고 살리는 생명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전하는 그분의 삶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든 이를 고쳐주며, 절망한 이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에 충실하다가 당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은 그분을 오래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둠을 더 좋아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웃을 돌보기보다는 우리는 우리가 더 많이 갖기에 골몰합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잘못한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용서를 우리 삶의 빛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하며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 밖에 있습니다.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이 너무 많고, 해야 일이 너무 많아,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빛을 추방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말씀이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말씀을 우리 삶의 여백(餘白)으로 밀쳐놓습니다. 베푸는 일도 용서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씀의 빛을 외면하고, 어둠을 더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오늘 성탄은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강생하여 새롭게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진리로 충만하시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심오한 이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깊은 명상으로 도달하는 데에 있지도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용서하고, 살리는 우리의 실천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강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구유에 누운 한 아기와 같이 연약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야 하는 생명으로 계십니다. 진리는 그렇게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그 진리를 반영하여야 합니다. 용서하고, 고치며 살리는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어둠 안에 그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그 진리는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어제의 어두운 관행을 오늘 새롭게 하는 진리로 말씀은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삶 안에 진리를 발생시킬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십니다. ◆
참으로 은혜롭고 고마운 아기 예수님의 성탄
-양승국신부-
아기 예수님 성탄구유와 관련된 우화를 하나 읽었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 옆에 마리아와 요셉이 지키고 있을 때였습니다. 천사는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에 들어가기 적당한 동물을 선발하기 위해 동물들을 전원 집합시켰습니다.
첫 번째로 나선 동물은 사자가 으르렁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처럼 적합한 동물도 없을걸요. 아기 예수님 곁에 얼쩡거리는 동물들은 다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예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다 좋은데 너무 폭력적이로구나.”
이번에는 간사한 표정을 지으며 여우가 다가와 말했습니다. “저는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위해 매일 아침 가장 달콤한 꿀과 가장 신선한 우유를 훔쳐 올게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너는 그렇게 부정직해서 쓰겠나?”
뒤이어 휘황찬란한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가 다가와 자신의 날개가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 것인지를 한참 설명한 뒤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초라한 마구간을 화려하고 웅장한 왕궁으로 뒤바꿔놓을 겁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너는 대단한 허풍장이로구나!”
천사는 ‘이러다 아기 예수 옆에 서 있을 동물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슬슬 걱정이 커졌습니다. 그 순간 한 마리 당나귀와 두 마리 황소가 천사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머리를 처박고 계속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이, 자네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는데 뭔가 드릴께 없나?”
그때 황소 한 마리가 수줍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가끔씩 꼬리를 이용해서 모기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들이 적당하겠네.”
천사는 마리아에게 달려와 말했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제일 순한 두 마리 황소가 있습니다.”
요셉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여기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나귀새끼 한 마리가 있습니다.”
성탄이 다가오면 모든 본당이나 수도원, 그리고 많은 가정에서도 연례행사처럼 실시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성탄구유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성탄구유를 만드는 광경,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성탄구유 만드는 작업은 어린이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종교교육의 장이기도 합니다.
성탄구유 작업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한 위대한 인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어두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감사와 찬미, 경축이 성탄구유가 주는 핵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울로 네루다(1904~1973)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우리도 진실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마구간 탄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출생도 비로소 의미를 지니고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에릭 프롬(1900~1980)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의 첫 번째 과제는 자기 자신에게 빛을 주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성찰하고, 자신의 생애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더 사랑하라는 초대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바라보며 우리 각자의 출생의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름답게 꾸며진 성탄구유를 바라보며 그저 ‘멋있다!’ ‘아름답다!’ 외치며 사진만 찍을 일이 아닙니다. 이번 성탄 우리 모두 성탄구유 앞에서 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이 지니는 단순함의 가치, 본질적인 것의 가치, 침묵의 가치, 평화의 가치, 기쁨의 가치, 사랑스러움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 인생도 비로소 참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우리의 출생도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우리도 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롭고 고마운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 임마누엘: 사람은 ‘본성’상 혼자이어서는 안 된다 >
-전삼용신부-
연탄길 2’에 ‘어미새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짧은 사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영훈이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어미새를 따라 둥지 밖으로 나온 새끼 때까치 한 마리를 잡았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도 못한 새끼 새를 손에 쥐고 신이 나서 집으로 와서 끈으로 다리를 살짝 묶어 감나무 아래 밑동에 매어 놓았다. 그리고 싸리나무로 만든 흑갈색 병아리 막으로 새끼 까치를 덮어 놓았다.
그런데 잠시 후부터 그 감나무 꼭대기에서 새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분명 때까치였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영훈 머릿속에는 잡혀온 때까치의 어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불쌍한 새끼새를 빨리 놓아주라는 사촌형의 말에도 영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어두운 밤에도 어미새와 새끼 새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영훈은 일찍 일어나 메뚜기를 잡으러 뒷동산에 갔다. 새끼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다. 이슬비에 바지가 다 젖도록 돌아다닌 뒤 겨우 메뚜기 몇 마리를 잡아오고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새끼 때까치 주변에 죽은 메뚜기와 거미가 몇 마리 있었던 것이다. “혹시 형이 이 새끼새에게 먹이를 준거야?” “아니” “참 이상하네! 형이 넣어준 줄 알았는데” 아무도 먹이를 넣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어미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 틀림없었다.
영훈은 그때, 자신이 어린 새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끼는 어미새의 보살핌과 사랑 속에 자라야 하는 것이다. 곧바로 다리에 묶여 있던 끈을 풀어 동산으로 날려 보냈다. 새끼 까치가 어미새의 품에서 잘 자라기를 소망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사연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사랑의 위대함을 많이 보아왔고, 또한 이 사랑이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작은 동물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새끼새를 사랑해도 어미새 만큼 사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생명들은 이런 ‘사랑의 본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성이란 그것이 그것이 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만약 기러기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동해야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계절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본성 또한 무시된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태국에서 쓰나미가 단 10분 만에 5,000 명, 30분 만에 13만 명, 그리고 30만 명을 삼켜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성탄절 휴가차 여행을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한 스페인 가족의 실화를 영화가 근래에 ‘더 임파서블’이란 제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늘 일 때문에 바쁘기만 했던 ‘마리아’와 ‘헨리’는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세 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는 가족이었지만 또한 특별히 사이가 좋은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맞는 큰아들 루카스는 늘 부모에게 불만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거북하고 필요 없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쓰나미로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루카스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엄마는 물에 휩쓸려가는 루카스를 잡기 위해 자신이 잡고 있던 나무를 포기합니다. 그러다가 심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루카스는 자신을 위해 부당당한 엄마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는 말썽부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빠와 동생들을 찾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성탄 선물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며 살아왔던 가족간의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의 울타리, 또 그 사랑이 부담스럽고 거북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무시될 때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절에도,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랑의 표징으로 사람이 되셨어도 우리는 그 사랑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으로 더 자신을 채우려고 합니다. 마구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보다는 베들레헴의 도시의 어지러움을 택합니다. 그렇게 올 해 성탄절도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또 그래서 외로우면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 즉 우리의 창조자의 사랑이 아니면 결코 만족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사랑을 인정하려면 먼저 지금 내가 그분 없이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내 외로움을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채우려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혼자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제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엔 혼자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평택 시골에서 수원까지 봉고차를 타고 통학하였는데,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가 불량배에게 길에서 끌려갔다고 해서 저는 불량배들이 모여 있다는 곳까지 혼자 친구를 찾아갔고, 또 반 친구가 불량학생에게 맞고 있을 때 저 혼자 그들과 맞선 적도 있습니다. 영화가 애들 다 망친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런 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그 땐 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는 우정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싸움 잘하는 친구와 시비가 붙게 되었습니다. 물론 싸우지는 않았지만, 학교 쌈짱이라고 하는 학생에게 맞서는 제가 어리석어보였는지 저의 친구들은 모두 저를 나무랐습니다. 제가 잘못했더라도 친구들은 저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저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때였지만 저는 ‘결국엔 세상에 나 혼자구나.’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외롭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우울하게 다니자, 한 개신교 신자 친구가 우리가 다 아는 상투적인 충고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신데 왜 외로워~?”
저는 성당을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속으로, ‘웃기네!’ 하면서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나도 성당 오래 다녔는데 그걸 모르겠냐?’
그러나 학교 갔다 왔다 하면서 그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사실 친구들이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금 외로움을 채워 줄 수는 있었지만 영혼의 외로움은 채워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친구들의 우정으로 제 외로움을 채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진정으로 그분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예수님은 제 마음에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저와 함께 계셔주신 것입니다. 아니 항상 함께 계셨지만 처음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와 함께 계셨고 나를 지켜주셨던 그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외롭다면, 이젠 나에게 주어진 본성상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의 사랑이 있어야만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렇게 내 마음을 고요한 마구간으로 만들 때 그 마음에 오늘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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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