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로 본 친구 (요 11:1-4)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시간에 “나사로로 본 친구”라는 제목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친구라고 하신 사람이 구약에 하나, 신약에 하나, 둘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입니다. 약2:23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신약에는 본문 말씀입니다. 11절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하셨습니다.
부럽지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심도 감사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도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이나 나사로를 부러워하지 말고 오늘 나사로를 통해서 주님의 참된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사로를 통해서 본 친구란 어떤 것일까요?
1. 친구란 사랑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17:17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관계가 끊기면 친구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3절에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도 그 교통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5절에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본래’, 전에도 그래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베다니에 가셔서 쉬셨는데 누구의 집이었을까요? 나사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절에는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하신 것처럼 예수님과 나사로의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이처럼 진정 예수님과 친구가 되고자 한다면 예배와 기도로 사랑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15:15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신 것처럼 친밀하고 특별한 친구로 대접해 주실 것입니다.
2. 친구란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요15:13-14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이시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드려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나사로는 가장 어려운 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예표가 되기 위해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역입니다. 가장 어려운 역입니다. 4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이 암시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연극도 아니고 실제로 병들어 죽어 장사한 후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난 다음에 꽁꽁 동여맨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이 역입니다. 6절에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 것도 죽고 썩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주의 일에 십자가 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내가 지겠습니다. 내가 가겠습니다. 혹은 내가 죽겠습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친구가 100명인데 진짜 친구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돼지를 잡아 사람 시체로 꾸미고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으니 나를 도와 일을 처리해 주지 않겠나’ 하고 돌았는데 다 퇴짜 맞고 한 친구만 공범으로 몰릴 각오하고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만 정말 목숨 걸만한 친구가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과연 그런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3. 친구란 서로 돕는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을 보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로를 도우셔서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사46:4에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셨스ᅟᅥᆸ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구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친구는 돕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27:10에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잠17:17에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했는데 왜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 했습니까?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집에 불이 나면 제일 먼저 양동이에 물 담아 달려오는 사람들이 이웃입니다. 사람 살려, 혹은 도둑이야 외치면 도와줄 분들이 그들입니다. 가까이 사니까 너무 잘 아니까 귀한 줄 모르는데 그분들이 진짜 이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들이 진짜 이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친구라면 도와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4. 친구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13:1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나사로도 죽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요12:9-11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 때문에 믿는 사람이 많아지자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비롯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이 있고 난 뒤 나사로의 행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숨기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나사로는 두 번 죽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첫 번째도 주님을 위하여, 두 번째도 주님을 위하여, 이처럼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친구입니다.
세례요한도 요3:29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시기할 법하지만 그렇지 않고 기뻐하며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인계해 주었고 목숨을 걸고 두려움 없이 의를 외치며 메시야를 소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주님의 진정한 친구인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꼭 목숨 바쳐야 순교는 아닙니다. 진실로 주를 위해서 산다면 그것도 산 순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사로와 같이 기도로서 끊어지지 않는 사랑, 주님의 영광이라면 목숨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희생, 세상 끝 날까지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예수님의 참된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