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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두 번째 만남
창 42:18-25
18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창 42:18-25 / 사흘 뒤에 요셉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가 내가 내거는 조건을 그대로 따른다면 너희를 살려 주겠다. 19) 너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내게 증명해 보여라. 너희 가운데에 한 사람은 너희가 갇혀 있던 감옥에 그대로 있고, 나머지는 곡식을 줄 터이니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굶고 있는 네 식구들에게 곡식을 갖다주어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여라. 20) 그러나 너희는 막내 동생을 꼭 이리로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너희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너희를 사형에 처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사실 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21)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하고는 서로 이렇게 한탄하였다. `그래, 우리가 우리 아우에게 못된 짓을 한 벌을 받는거야. 아우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에 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대했더니 급기야는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고야 마는구나. 아우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그 아이를 돌아보았어야 하는건데.' 22) 르우벤이 답답하여 아우들에게 푸념하였다 `그러게 내가 뭐라 하더냐? 그 아이를 해치지는 말라고 진작부터 말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우리가 그 아이를 죽게 하였으니 우리가 그 대가를 받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냐?' 23) 요셉은 형들 사이에 통역관을 세워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서로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있었다. 24) 요셉은 형들이 있는 앞에서 떠나 마구 울기 시작하였다. 잠시 후 요셉은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형들 앞으로 나아와 형들 가운데에서 시므온을 지목해 내어 다른 형들 앞에서 그를 묶게 하였다. 25) 그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형들이 가져온 자루에 곡식을 채우고 또 그들이 곡식값으로 가져온 돈도 도로 그 자루에 넣게 하였다.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먹어야 할 양식까지도 챙겨 주었다.
형들을 감옥에 억류한지 3일째 되는 날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밝힙니다. 이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숨을 구할 새 방법(18-20) 아직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의 형들에게 요셉은 그들의 생명을 보존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들 중 한 사람만 볼모로 잡고 나머지는 먹을 양식을 가지고 가게하고, 그들의 막내 아우를 데려오면 볼모에서 석방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요셉은 과거에 자신을 구덩이에 던져 굶어 죽게 하려다가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 넘겼던(창 37:4) 상황을 되씹어 보는 자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의 섬기겠고 네 자손이 사 대만에 이 땅에 돌아오리니”(창5:13-16)라고 하셨던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어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형들의 뉘우침(21-23)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셉의 실행 불가능한 명령으로 인하여 그들은 괴로워하며 그들의 입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 …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행하였던 사악한 범죄 행위를 인하여 징벌을 받게 되었다고 괴로워합니다. 이에 르우벤은 요셉에게 행한 동생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실보다 그 죄를 회개하지 않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롬 2:5).
요셉의 통곡과 형들의 귀향(24-25) 요셉은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들이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듣고 르우벤이 동생들을 책망하자 형제들 간의 불화가 치유될 수 있는 실마리를 느끼면서 혼자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목전에서 시므온을 결박합니다. 그의 형제들이 애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조치이며 장자인 르우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시므온의 선택은 요셉이 시므온의 성품을 파악한 것인지 모릅니다(창 34:25; 49:5). 한편 요셉은 형제들 각자의 집으로 가져갈 양식과 여행 중 그들과 나귀가 먹을 음식까지 준비해 주며 그들이 지불한 돈을 다시 그 각 사람의 자루에 넣어 주었습니다. 요셉의 순수한 마음의 발로이었습니다.
적용: 용서가 없는 슬픔은 참으로 서글픈 슬픔입니다. 다른 것들은 찢어지는 것으로 더 악화되지만 마음은 찢어질 때 비로소 최선의 것이 됩니다. 당신이 죄 때문에 충분히 겸손해 진다면, 그 때 당신은 죄에서 홀가분하게 해방되어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싱거라는 사람이 가난한 생활을 하던 중에 병들어 누웠는데 그 부인은 용기를 잃지 않고 모든 가정사를 혼자 맡아 돌보며 자녀를 양육하고 간호하며 밤에는 바느질하고 낮에는 삯빨래를 쉬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용기를 잃지 않고 일하는 부인을 본 싱거는 어떻게 하여 아내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 중에 미싱을 연구해 내고 쇠붙이를 모아 그 어려운 병중에서도 조립하여 내었습니다. 이것을 발명 특허를 받아 그 미싱의 이름을 따라 ‘싱거’라 자기 이름을 붙이고 판매하여 많은 재산을 모아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바느질을 기계화하게 만들었습니다.
< 설 교 >
20년 된 속박에서 벗어나다
감출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침이고 또 하나는 가난이라고 합니다. 기침이야 감추지 못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가난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위신에 관계되는 일이겠습니다만,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감출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죽고 사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어떻게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요셉의 형들은 세 명의 어머니들에게서 나온 배 다른 형제들입니다. 원래 야곱이 사랑했던 여자는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은 참 예뻤거든요. 그런데 간교한 라반에게 속아서 못생긴 언니 레아까지 아내로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레아의 인생이 불행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세상은 공평하다는 듯이 라헬은 자식을 못 낳는 반면 레아는 아들을 넷이나 낳았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리고 유다가 그들입니다. 라헬이 예쁜 것이 장점이라면, 레아는 자식 잘 낳는 것이 경쟁력이었습니다.
씨앗 싸움에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데, 남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자식을 낳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 라헬은 언니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으로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헬은 꽤나 성깔이 있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은 여자 찾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좋으면 만족하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어쨌든 언니에 대한 라헬의 질투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자기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들여보내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빌하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들이 단과 납달리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이제 여섯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한 남편을 가운데 두고 자식 낳기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레아에게 갱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자 레아도 라헬처럼 자기 시녀 실바를 남편에게 줍니다. 실바도 아들 둘을 낳았는데, 갓과 아셀입니다. 야곱의 아들은 여덟으로 늘었습니다.
그렇게 자식 낳기 경주가 끝났는가 했는데, 갱년기를 맞았던 레아가 다시 배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둘을 더 낳았는데, 잇사갈과 스불론입니다. 그리고 딸도 하나 낳았습니다. 이제 야곱은 열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수십 년 불임이던 라헬이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낳은 것이 요셉이에요. 그러니 야곱이 얼마나 요셉을 애지중지 했겠습니까? 사랑하지 않는 여자들에게서 아들 열 명을 낳은 후에,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여인을 얻기 위해 14년 머슴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던 라헬에게서 아들을 낳았단 말입니다. 라헬로서는 소원성취를 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을 것 같은데, 라헬은 욕심을 부려서 아들을 하나 더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나이 들어 아이를 낳는 것이 무리가 되었겠지요. 야곱으로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그렇게 보냈으니,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만 유일하게 남은 삶의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열 명의 형들은 그러니까 자기들의 어머니들이 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불행하게 살았던 것을 잘 알았습니다. 자연히 요셉에 대한 반감과 미움이 작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꿈 이야기로 일이 꼬여서 노예로 팔아버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요셉에 대한 처벌일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잡아먹혀 죽었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고통을 안겨주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의 아들들은 또 아주 잔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동생이 세겜의 추장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그 부족을 학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형들의 성품이나 전력으로 봐서,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별로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완전범죄였습니다.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죽었다는 증거가 조작되어 제시되었습니다. 그들만 입을 다문다면, 그들의 범죄가 세상에 알려질 일은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묻히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완벽하게 감춰진 범죄입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으니, 그 일은 그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심리에는 선택적 기억이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경험하고 목격했어도 사람에 따라서 기억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나 또는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선택해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하지 않거나 불리한 내용은 기억에서 배제됩니다. 그러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기보다 무의식 속으로 깊숙이 파묻히는 것입니다. 일단 의식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파악이 되지 않고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종종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심리학 용어로 해리(解離, dissociation)라고 하는데, 일종의 선택적 기억상실증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의식 세계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알지 못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인격적 장애를 겪게 됩니다.
물론 요셉의 형들이 해리성 장애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의도적인 선택적 기억상실증 상태로 살고 있었습니다. 비록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기억에서 지울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생각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것입니다.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믿게 되고 그것이 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결코 몹쓸 짓을 한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 편히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살아온 형들이 어쩌다 애굽의 총리에게 붙잡혀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애굽에 내려가서 곡식을 사오는 것은 탐탁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들은 애굽과 관련된 일은 결코 만들지 않고 살았겠지요. 좀 고생이 되더라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할지언정,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애굽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깊숙이 묻어둔 비밀과 연결되는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늙은 아버지가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오기는 했습니다. 갈 수 없다고 둘러댈 핑계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탐탁지 않게 오기는 왔는데, 웬걸 애굽의 총리가 자기들을 붙잡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언제 봤다고 간첩으로 몰아붙이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간첩으로 몰리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20절에 보면 애굽의 총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간첩으로 몰리면 죽는 것입니다. 간첩 혐의를 벗으려고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다 보니 동생 하나는 없어졌고, 막내는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수였습니다. 집에 가서 막내 동생을 데려오면 자기들 말을 믿고 간첩 혐의를 벗겨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형들이 왜 원래는 열두 형제였다는 말을 했을까요? 원래 열 형제였다고 해도 애굽의 총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랬더라면 자기들이 노예로 팔았던 요셉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또 집에 가서 베냐민을 데려와야 하는 곤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때로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그런 일을 많이 겪습니다. 그렇지만 서양 속담에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는 말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곤란을 겪어야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그렇게 곤란을 겪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곤란을 겪을 것이 두려워 거짓을 말했다가는 거짓을 말한 것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하지요. 일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핑계 댈 일이 없습니다. 핑계가 많은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형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이들이 원래 열 형제였다고 말했더라면, 자기들이 행한 악한 일을 상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베냐민을 데려와야 하는 곤란한 일도 없었을 것이지만, 우리가 관찰하는 입장에서 보면 정말 큰일을 저지르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들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흘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들은 이제 꼼짝 없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흘이 지난 후에 애굽의 총리가 이들을 불러내더니, 혹시라도 그들의 말대로 집에 식구들이 굶주리고 있다면 안 되니까 우선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 대신 그들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한 사람은 남고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가 막내를 데리고 다시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 가운데 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0년 동안이나 묻어 두었던 그들의 악행을 회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괴로움은 그때 애걸하는 아우의 괴로움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누가 그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했습니까? 간첩 혐의로 몰린 이들이 뜬금없이 20년 전에 저지른 악행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20년 동안 숨겨온 비밀을 스스로 터뜨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20년 동안 그들을 속박하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그곳에 카타르시스가 일어나고 자유가 선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리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감추었다 할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범죄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사람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는다”(딤전 5:24)고 했습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그 죄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임종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만, 임종을 많이 지켜본 분들의 말에 의하면, 믿는 사람들은 일종할 때 평화스럽게 눈을 감는 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임종하는 순간에 공포에 질린다고 합니다. 악한 일을 많이 행하고 그것을 잘 감추어온 사람일수록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그 범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죗값을 치루거나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형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있는데, 그 상황이 어떤 것인가 하면 갑작스럽게 닥친 고난 속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평생 편안하게 잘 먹고 잘 살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니까 숨겨둔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고난의 위대함입니다.
고난처럼 훌륭한 인생의 스승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합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방탕하고 제멋대로 살았을 것인데, 고난이 나를 사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집 나간 둘째 아들 역시 고난 때문에 사람이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욥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합니다. 고난은 우리 속에 있는 더럽고 악한 것들을 걸러내는 정화장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속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고난을 합리화하기 위한 약자의 변명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오히려 마음을 걍팍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기 앞에 나타난 형들을 붙잡아 그들의 죗값을 치르게 하여 복수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도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범죄했다고 당장 잡아다가 벌을 주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회개하고 그 죄에서 떠나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형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요셉은 감정이 북받쳐 밖에 나가 펑펑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회개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 하나님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형들이 자기들이 죄악을 회개함으로써 20년 동안 숨겨왔던 죄악의 문제가 해결되고 노예로 팔았던 아우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사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와의 사이에 막힌 담이 있고 오랜 세월 숨겨온 비밀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 모든 굴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