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2
12월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kTXCGU3Og (김성현 마르코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랑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기초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직제자들, 곧 12사도들은 모두 수난당하시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스승님의 모범을 따라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한 사도만은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요한 사도가 자연사했다 할지라도, 순교자 못지않은 영광스러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도 어김없이 순교의 기회가 찾아왔었습니다. 기원후 95년 제2의 네로 황제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도미시아노 황제 박해 때, 요한 사도는 에페소에서 로마로 소환됩니다.
그리스도교를 등지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그에 응할 리 만무했습니다. 요한 사도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집행인은 그를 라틴문이라는 장소로 끌고 가서 200도, 300도 부글부글 끓는 초대형 기름 가마솥에 던져넣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 역시 그 옛날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불 화덕 속에 던져졌지만, 조금도 화상을 입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던 세 유다 청년들처럼 기름 가마솥 속에 던져졌지만 티끌만큼의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적대자들은 요한 사도를 소아시아 해안에 있는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그는 순교의 영예를 입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다 했고, 순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박해 앞에서도 죽지 않고 백 살 될 무렵, 달릴 곳을 다 달린 후 잠자듯이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한 사도는 스승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로 유명합니다. 주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셨을 때나 타볼산 위의 거룩한 변모 때에도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도 예수님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던 제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은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자신의 동생 안드레아와 더불어 최초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던지, 처음 예수님의 거처를 찾아갔던 시각까지 기억하고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복음 1장 39절)
마침내 주님의 수난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했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주님께서 한없이 약해진 모습으로 체포된 것에 실망해 도망가버렸습니다.
다른 사도들 역시 다들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다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같은 요한의 충성을 주님께서 눈여겨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미래를 그에게 맡겼습니다. 요한은 기쁜 마음으로 성모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지극한 효성으로 보살펴드렸습니다.
기원후 96년 도미시아노 황제가 암살되자 왕위에 오른 넬바 황제는 추방된 그리스도 신자들을 복권시켰는데, 요한 사도도 꿈에도 그리운 에페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고령이었지만 유일하게 생존한 사도로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지도했습니다.
너무나 노쇠해진 요한 사도였기에 홀로 걸을 수조차 없었지만,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강론대에 섰고, “아들들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만 거듭 반복했습니다. 그가 언제든 한결같이 사랑하라는 같은 말만 반복하자, 신자들이 구시렁구시렁 불평불만을 터트릴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말년에 다다른 요한의 입에는 오로지 사랑이란 단어만 흘러나왔으니, 사랑의 사도라 불릴 만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기초였습니다. 그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백 번 천 번 더 강조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DDuS0403NA
++++++++++++++++++
<하려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기도, 관상기도>
오늘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 가장 사랑받는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관상하는 단계에까지 올랐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이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다.”(요한 1,17-18)
요한은 그리스도와 3년을 함께 하였고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비밀스러운 것까지 물을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의 신성을 뵈니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까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고 정확히 기록한 이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보는 것을 우리는 ‘관상기도’라 합니다.
우리가 관상기도를 해야 하는 까닭은 그래야 그분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느님의 신성, 곧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굳은살을 관상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부모님을 보는 것과 그분이 고생한 흔적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님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 곧 부모님의 영광을 보아야 부모처럼 성장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느님의 영광, 곧 사랑의 표현, 어쩌면 표징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1코린 3,17-18)
이는 분명 관상기도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곧 ‘나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분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조물 본성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변하는 방법은 ‘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세처럼 얼굴에 너울이 씌워져 있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어땠어야 할까요? 부모님의 영광, 곧 부모님의 사랑을 보았어야 합니다. 처음에 부모님을 의심할 때는 부모님처럼 되지 않습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리 밑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굳은살을 통해 부모님의 영광을 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부모님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사랑을 믿고 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무덤에 도착합니다. 물론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궁금하기도 했을 테지만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고 나서야 요한도 들어갑니다. 요한도 분명 무언가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장으로 뽑아주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이 능력이 오히려 관상기도를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관상기도는 사실 원하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믿지 못하면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애정 결핍으로 부모의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부모를 괴롭히는 금쪽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히는 이유는 단 하나, 불안함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녀임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부모는 더 지쳐갑니다. 그래서 더 조를수록 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을 혼자 키울 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힘들게 자신을 키운 부모의 손을 잡아주고 발톱을 깎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줍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힘이 냅니다. 그렇게 더 높은 사랑의 표징이 나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이 표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믿음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은 지칩니다. 그러면 그들을 관상으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관상기도는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더 요구할 것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지금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려 하지 않으면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부모님의 영광은 발밑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의 발을 만져보고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면 그 영광을 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볼 때는 라면 한 그릇도 그분들의 살과 피가 섞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께서 주시는 모든 사랑 안에서 그분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이 써 보내신 편지는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의 영광은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 담겨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따라서 내가 겸손하여지지 않으면 그분들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위만 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해지면 그분의 영광을 봅니다. 제가 어머니께 드린 용돈을 어머니는 쓰셨을까요? 저에게 다시 주기 위해 하나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다 모아놓으셨습니다. 감사해야 그분이 지치지 않고 더 큰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무덤은 그저 그분께서 묻혔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계시지 않는 곳입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그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그녀는 무덤에서 한없이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분이 남긴 자취가 무덤뿐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분이 남겨놓은 사랑에 머무를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 영광을 찾으려 해야 할까요? ‘성체’입니다. 보잘것없는 밀떡이지만 그 밀떡 안에 완전한 하느님 신성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았냐고 물으면 신자들은 못 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려는 겸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직접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육체는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남겨놓고 간 흔적에서 그분을 발견하려고 머물러야 합니다. 이 겸손함이 진정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다른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인데 저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신부님은 문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기도 하고, 어떤 신부님은 동양의 고전을 접목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자캐오 통장’을 만들었다는 신부님의 강론도 제게는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피정이나 특강 때 받은 강사료는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축일에 받은 축하금도 따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 통장의 이름은 ‘자캐오 통장’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장에 있는 ‘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때로 자캐오 통장을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한 강론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으니 신부님의 강론은 살아있고,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의 강론을 쓰기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제들 강론의 원천은 ‘복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4개의 복음서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입니다. 마르코, 마태오, 루카의 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표징을 전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는데 있어서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3개의 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아예 예수님의 탄생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만 전하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공동체에는 예수님의 탄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은 ‘신앙의 조상’이었습니다. 마태오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담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전합니다. 루카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을 넘어서 모든 인간의 원형인 아담의 후손이며,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다른 차원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이 사실과 현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표징과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도 새로운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로고스 찬가’입니다.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 숙명입니다. 그러나 애벌레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얀 날개가 날린 나비가 됩니다. 이제 나비는 다시는 땅 위를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를 읽으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웅장한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면서 요한복음의 세계로 잠시 들어가면 어떨까요? 저는 요한복음 13장을 묵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2-8: 부활 날 아침 무덤에 간 제자들
오늘은 사도 요한의 축일이다. 본시 전례는 성탄 다음 날을 성 스테파노 축일로 정하였고 그다음 날을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게 하고 있다. 스테파노 성인은 교회사에서 첫 번 순교자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을 처음으로 생명을 바쳐 증거하신 성인을 먼저 지내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다음 당신의 일생을 통해 그분이 사랑이심을 증거한 사도 요한을 오늘 기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도 증거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이 항상 사랑의 삶으로써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빈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 무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무덤에 먼저 들어가지 않고 베드로 사도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베드로의 으뜸 수위권이 나타난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고 자신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첫 사람이 된다.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는데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한 곳에 잘 개켜져 있었다고 한다. 이 수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얼굴에서 수건이 치워진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고,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빛나서 바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얼굴은 인간으로서 관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봄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므로 더는 수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제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예수님과 나누었던 친교는 그 당시 제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사도 요한은 이 모든 친교를 전 교회 공동체가 나누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갖고 그분과 진정한 친교 안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의 형제자매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이 특권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 특권은 한 번 가지면 끝까지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특권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 순간 사랑의 삶을 살기 위해 나를 주님 앞에 낮출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실천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신 그분을 닮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성탄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그분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기쁨이 나의 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에게 전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사도 요한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일 것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어야겠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첫 번째 부활 이야기입니다. 20장 1절에서 언급된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은 안식일 다음 날,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앞선 수난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면서 예수님 부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려 줍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빈 무덤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합니다.(20,1-18 참조) 오늘 복음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하여 증언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베드로보다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는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고, 그에게 빈 무덤을 먼저 확인할 기회를 줍니다. 여기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베드로가 자리하는 ‘첫 번째’ 위치, 곧 그의 권위와 역할(6,68-69; 21,15-19 참조)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첫 번째 부활 이야기에서 무덤에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의 위치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20장 8절에서 “보고 믿었다.”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가시적 현실을 넘어 부활의 초월적인 신비 현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사람’으로 밝힙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와 같은 인물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의 모습을 통하여 요한 사도가 증언한 믿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생명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한 성 요한 사도>
제 1독서 : 1요한 1,1-4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복 음 : 요한 20,2-8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오늘은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하나로 특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라고 표현된 요한이 그 주인공입니다. 복음사가란 복음서를 쓴 저자라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일반적으로 요한 복음서, 요한 서간, 요한 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즉시 달음질을 하여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쫓아갔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이 문구를 통해서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 뽑히기 전까지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습니다. 아버지는 제베대오이고 야고보와 형제지간이었지요.
마르코 복음 3장 17절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뽑힌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천둥의 아들이란 별명은 그들이 아주 활달한 성격임을 말해 주는데 실제로 그러한 불같은 성격을 드러내는 대목이 루카 복음 9장 5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갔다가 냉대를 받는데 그때 이들 형제가 이런 제안을 합니다.
-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예수님께 꾸짖음을 들을 정도로 치솟는 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 참여합니다.
-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마태 17,1) 그뿐만 아니라 이들 형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었으면서 또 동시에 아주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이렇게 자리를 부탁했던 사람들이 이 형제들입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지만 사도 요한 만큼은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안장하는 장면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직접 뵙고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요한 복음사가는 이 표현을 아주 많이 사용하였지요.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글로 남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기록이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간들, 그리고 요한 묵시록입니다. 오늘 우리가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기억할 것은 어떠한 처지에 있던지 주님에 대한 체험을 각자의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글로써 주님의 말씀을 전했고 사도 바오로는 행동으로써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신자 중에도 요한 사도처럼 글로써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소설이나 시, 또는 수필이나 논문 등으로 예수님을 전하고 있지요.
또 화가는 그림으로, 조각가는 조각으로, 음악가는 음악으로써, 또 의사는 의술로써 복음을 전합니다. 체육인들도 복음을 전합니다. 축구 경기 중 골을 넣고 기도하는 선수들을 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열심히 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요.
누구나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장사하면서, 택시를 운전하면서 또 어린 초등학생들은 친구와 사이좋게 놀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 축일을 맞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복음 선포의 과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똑같지만, 그 방법은 각자의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내가 몸담은 삶의 현장에서 정말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성당에서만 하느님의 말씀을 새긴다고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몸담은 곳에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직원과 동료들이 아직도 내가 신자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웃 사람과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고 다른 얘기만 잔뜩 하고 살아간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그러셨듯이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삶의 주님으로 모신 분을 증언하고 전하는 일, 이것이 우리가 오늘 실천해야 할 사명 중의 하나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복음을 증언할 때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참으로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복음서는 이천 년의 역사와 함께 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복음의 사명,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심을 내 안에만 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전할 때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노력하면서 오늘 요한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야 하겠습니다.
=====================
[원주교구 박용식 시몬 신부님]
<예쁜 짓을 하자>
사도 요한을 ‘사랑받던 제자’라고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바로 요한을 두고 한 말이다.
사도 요한이 각별한 사랑을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요한은 다른 사도들보다 사랑받을 행동을 더 많이 한 모양이다.
흔히들 사랑을 말할 때 ‘사랑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사랑받는 것’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사랑은 주는 것만이 아니라 주고받는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주기만 하고 받을 줄 모르는 사랑은 짝사랑, 일방적 사랑이지 진정한 의미의 완전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다.
곧 사랑받게 행동하는 것, 사랑스럽게 행동하는 것, 상대가 나를 사랑하도록 행동하는 것, 사랑받을 짓, 예쁜 짓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누구를 사랑했어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그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는 사랑을 주었을 뿐 받을 줄 몰랐고 사랑받도록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편 잘못이지만 아내에게도 사랑받게 행동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며느리에게도 사랑받게 행동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는 것이므로 주려는 노력과 함께 받도록 행동하자. 예쁜 짓을 하자.
=====================
[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달음>
미사 중 ‘신앙의 신비’를 외칠 때,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합니다” 하고 힘차게 알립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는데도, 제자들은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앞에 그들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의 ‘빈 무덤’ 소식이 있고서야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는 달려가서 목격하지만, ‘그때까지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음을 향한 내달음은 빈 무덤에 이어 부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다시는 헛되거나 덧없는 죽음이 아니고, 부활을 향한 과정입니다.
어두운 밤을 피하려면 석양을 보고 달리지 말고 어둠을 뚫고 지나가서 새벽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죽음은 그것이 다시는 끝이 아닙니다.
죽음을 향해서도 내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죽음을 남달리 전하며,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냥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입에 대고 외쳐야 합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선포를 말과 글로 하였다면, 순교자들은 목숨으로 하였고, 교회학자들은 해석으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제각각 고유한 선포의 방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요한 20,2-8 (부활하시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랑>
사랑은
사랑을 낳으니
사랑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사랑을
사랑하는 제자가 됩니다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된 제자는
사랑으로
사랑이 묻히신 곳에
먼저 다다르고
사랑으로
사랑이 묻히신 곳에 들어가는
첫 자리를 내어주며
사랑으로
사랑을 보고
사랑으로
사랑을 믿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물론 없는 사랑을 있는 척해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은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그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모습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 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넘어졌을까?”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고 “자비와 연민의 눈길”로 봐야 합니다. “의인은 자신의 판단과 판결을 미안해합니다. 의로운 판결은 편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옛말이 ‘기쁨을 나누면 시기,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라고 바뀌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감옥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한다.
2) 가장 실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감옥에서 벗어난다.
3) 다른 수감자들과 친해져서 탈옥을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다.
아마 대부분 두 번째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법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의 감옥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의 자유를 가로막는 감옥에 갇혀 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나를 가둬놓고 있습니다. 돈, 명예, 욕심, 죄…. 이런 것에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감옥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돈’만을 외치고 생각하고 있다면 ‘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매번 ‘명품’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명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다면 ‘미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탈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만을 바라보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알려진 요한 사도는 오로지 주님 안에만 있으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늘 예수님 곁에 있었고,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예수님 부활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무덤 앞으로 뛰어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무덤 안에 먼저 들어가는 것을 베드로에게 양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제자이니 무덤에 먼저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니 그 무덤 안으로 먼저 들어가도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를 존중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 안에서만 머물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세상의 틀이 아닌,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가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1요한 1,2 참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식의 사랑과 우리 식의 사랑>
요한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라고 하고, 최후 만찬의 복음에서는 "그때 제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 곁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였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요한뿐이었겠습니까? 오늘 같이 무덤에 달려간 베드로는 주님께서 사랑치 않으셨고, 열두 제자 중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다 사랑하셨어도 혹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사랑하지 않으셨을까요?
혹 인간 중에는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럴 리 없다는 것이 예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이 유일하게 얘기하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나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사랑을 주고받는 데 두 가지가 있고,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데 주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와 사랑을 주는데도 받지 않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후자의 경우 정확히 얘기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받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누가 사랑을 받는 것은 양쪽이 일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지요. 받고 싶은데 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받을 수 없고 주고 싶은데 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줄 수 없는 거지요.
그런데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습니다. 똑같이 사랑하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엄마와 자식 간에는 사랑의 기울기가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자식의 사랑보다 훨씬 크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자식은 엄마만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엄마보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이성이나 다른 사람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보다 못한데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줘도 내가 받아야지 받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받지 못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받지 못하는 거겠습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 식의 사랑은 우리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고 그래서 귀로 고백을 들으며,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껴안으며 아무튼 감각되어지는 사랑입니다.
남녀 간에 '꼭 말로 표현해야 알아?'라고 하면 '말로 표현해야 할지!'라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도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임을 강조하여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신 분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이 볼 수 있는 분, 만져볼 수 있는 분으로 오신 거라는 얘기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와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도 감동과 감탄을 하며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또 보고 싶어서 성탄 구유를 만들어 베틀레헴의 성탄을 재현하기까지 하였잖아요?
그러나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줘도 받아야 받는 것처럼 보여주셔도 봐야 보는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애제자>
- 사랑의 사도, 성 요한 -
성탄밤미사시 성체를 영할 때 177장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성체 성가를 들으며 제 가장 좋아하는 성가를 확정지었습니다. 그동안 가끔 들을 때 마다, “참 좋다!” 생각했는데 엊그제 새롭게 각인되었고 어제는 하루 종일 틈틈이 불러 보았습니다. 3절까지 내용도 다 좋습니다만 1절만 다시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며, 저 광야의 험난한 길 사십 년을 걸어갔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올해는 제가 수도원 입회후 만 40년이 되는 해라 더 각별한 느낌입니다. 얼마나 위로와 평화가 넘치는 멋진 가사에 곡인지요! 말씀이 살이 된 것이 성체요 바로 우리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체를 영하면서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참사람임을 확인하는 참 은혜로운 성가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축일을 지내는 주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이 된 느낌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이었고 오늘은 사랑의 사도, 주님의 애제자 요한 축일입니다. 두 성인이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요한이라는 뜻은 ‘주님께서 은혜로우시다’인데 참으로 천수를 누리며 은혜로운 삶을 살았던 요한 사도였습니다. 6년경 베싸이다에서 태어나 에페소에서 100년경 선종하셨다닌 무려 90대 중반까지 장수했던 사도였습니다. 12사도중 유일하게 피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유일한 사도입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순간마다 대동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고, 바로 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았음은 그의 주님 사랑이 탁월했음을 제자들도 인정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 요한의 상징은 독수리인데,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구세 사업만 기술한 반면, 그의 저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관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주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인생 말년, 90대 중반 나이에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의 부축을 받았다 합니다. 성 예로니모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항상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래도 신도들이 같은 설교 내용에 대해 불평하자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좌우간 사랑의 사도 요한답습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끈질긴 도전이 영지주의입니다. 신종의 영지주의는 여전합니다. 아마도 세상 끝나는 날까지 영지주의도 계속될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영육이원론, 성속이원론의 뿌리 깊은 이단입니다. 물질세계나 인간 몸을 죄악시 했습니다. 육신은 감옥이요 무덤으로 구원은 육신의 무덤에서 감옥에서 탈출이라 생각하여 육신을, 물질세계를 천시했습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이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정녕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사셨다.”
이 한 말씀이 결정적으로 영지주의 이단을 끝장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인간의 몸도, 물질세계도 구원받아 거룩해 진것입니다. 영육(靈肉) 이원론이, 성속(聖俗) 이원론을 일거에 해결해 버렸습니다. 어디나 성(聖)과 속(俗)이 하나인 성속일여(聖俗一如), 강생의 신비로 거룩해진 몸이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래서 성체성가 177장이 그렇게 고맙고 반갑습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1서 요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 또한 영지주의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진리에 대한 애제자다운 요한의 고백입니다. 생략할 것 없이 전부 인용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유령이나 투명인간이 아니라 참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셨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적으로 와닿는 사도 요한의 증언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에 참여함으로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교, 그분의 첫째 증인들과의 친교, 그리스도인들과의 친교로, 친교의 끈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친교중에 살아감으로 충만한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친교의 교회를, 친교의 기쁨을, 충만한 기쁨을 선사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애제자 요한의 주님 사랑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수제자 베드로 보다 빠른 사랑의 발걸음이었지만 그의 겸손한 사랑은 수제자 베드로 다음에 빈무덤에 입장합니다. 베드로와 달리 애제자 요한은 말끔히 정리된 빈무덤을 일별(一瞥)하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 주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보고 믿었다” 요한 사도의 믿음의 눈, 사랑의 눈이 바로 빈무덤의 상황을 일별하는 순간 주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재미있는 주석을 읽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비교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을 뵈러 갈때는 너울을 벗었지만 나와서는 빛나는 얼굴의 광채때문에 백성들 앞에서는 너울을 썼다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이제 인성의 너울, 얼굴을 쌌던 수건 아마포는 쓸모없게 되어 그대로 신성의 얼굴로 아버지께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예수님 얼굴을 반영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는 날, 우리 모두 인성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처럼 신성에 빛나는 얼굴로 하느님 아버지를 뵈올 것입니다. 의인이자 마음 바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은 화답송 아름다운 시편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내리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쏟아진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시편97,11-12)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사랑의 사도가 되자!'
오늘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첫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그의 형은 야고보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13,23;19,26;20,2;21,20)였습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고,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함께했습니다.
오늘 복음(요한20,2-8)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을 알리는 '빈무덤 사건'을 예수님으로부터 큰 은총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으로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를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 곧 요한 제자에게 알립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요한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는데, 이 모습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제자의 모습,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 사랑을 받고 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너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을 잘 받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잘 받고,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을 잘 받는 사람이 사랑도 잘 나눕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1요한1,1.3)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받고, 지금도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매일 받고 있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사랑을 잘 받고, 이 사랑을 잘 나누는 사랑의 사도가 됩시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kKgJoZhnZYo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 4)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장소도 맑아집니다.
감정이 아니라
마음을
일깨워주시는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입니다.
결승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걸어온
이 여정입니다.
이어달리기처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성탄의 여정입니다.
성탄으로
요한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낯선 곳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아의 허물을 벗고
먼저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한
사랑입니다.
심판이 아닌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만이
진짜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합니다.
성탄도
부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매순간이
성탄이며
부활입니다.
결코 마르지 않을
하느님 사랑을
다름아닌
우리 마음의 독에서
만나게 됩니다.
더욱 소중해지는
삶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은
출렁이는
은총입니다.
풀어주시고
끌어안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탄과 부활이
결합작용을 하듯
사람은 말씀으로
태어나고
말씀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는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라는
길을 다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