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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니고데모 #중생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찾아왔을때만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때까지는 믿음도 없었고 의롭다 여겨지지도 않았을것이다.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을때 아리마대 요셉과더불어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냈으므로 적어도 그때에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과 이에따른 의롭다 여김도 받았을것이다.그렇다면 니고데모의 믿음과 회심과 칭의는 예수님께 찾아온날 이후부터 예수님께서 죽으시기전 어느때라고 볼수있다.그런데 아직 믿음이 없던때에 그가 예수님께 찾아올수있었던 이유와원인은 무엇인가?사람이 자기자신만의 의지로 주님께 나아올수는 없으므로 그의 의지와 발걸음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수밖에없다.그렇다면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의 거듭남은 그가 예수님을 찾아뵙고자 마음먹기 이전의 어느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벨기에신앙고백서 17.타락한 인간의 회복
We believe that our good God, by his marvelous wisdom and goodness, seeing that man had plunged himself in this manner into both physical and spiritual death and made himself completely miserable, set out to find him, though man, trembling all over, was fleeing from him. And he comforted him, promising to give him his Son, "born of a woman," to crush the head of the serpent, and to make him blessed.
우리가 믿는 바는,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이로운 지혜와 선하심으로, 사람이 이 불순종의 방식으로 자기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사망에 내던져 버려 완전히 비참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려 하시나 도리어 사람으로서는 모든 방면에서 두려움에 빠져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기만 할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안위하시고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주시려고 “여자에게서 나게” 하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어 사람으로 복이 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우선적으로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최고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표현은 다른 신적 존재들보다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즉 완벽한 선은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딱히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선하시다는 진리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묘막측한 일들을 거의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거나, 자기한테 안좋은 일들이 생기거나, 자기만의 정의 기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생기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과연 정말로 참되게 완전무결하게 선하신 분이 맞으신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나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신자라고 하면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복음을 배교하는 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복음 사역과 봉사에 헌신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주님께 속한 형제들이 아니라 한낱 대적이 뿌린 가라지에 불과하며, 이 또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절대적으로 선하신 공의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신 성도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선하심을 믿음으로 주님의 지혜를 바라보고,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선하심을 믿음으로 능히 넉넉히 감당하며 이겨낼 것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의인이 핍박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선하심을 믿음으로 의인이 받을 상급과 악인이 받을 형벌을 바라본다.
불순종과 범죄의 결과가 영혼과 육체의 전 인격적인 죽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지극히 선한 창조의 상태를 경험했던 아담과 하와조차도 단지 일시적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빠졌었을 뿐,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9백여 년이나 살아가는 동안 처음에 느꼈었던 비참한 감정들은 희미해져 갔을 것이다. 하물며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서 죄악된 성향을 물려받은 후손들이야 더욱 죄의 비참함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렇게 인류가 이룩해 왔고 앞으로도 이룩해갈 모든 문명과 역사와 학문과 기술과 종교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을 정죄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자기들만의 유토피아와 엘리시움을 이루려고 한다. 돈과 권력과 음욕을 탐하거나, 정치투쟁과 국가지도자 비방을 일삼거나, 유신진화를 주장하거나, 무교회주의를 부르짖는 가나안교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고의적으로 멀어지고 도망치는 교회 내 악인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써 성경을 통해 죄가 비참하고 영원한 죽음을 초래한다는 것과, 그렇게 영원히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경대로 영원 전부터 사람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셔서 모든 구속사역을 이루셨다는 것과, 그 모든 일들이 오로지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점진적으로 깨닫게 되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하여 어떤 어려움과 유혹 속에서도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20210208
#신명기 #Deuteronomy 2:8-25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10 (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16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멸망한 후에
17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19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20 (이곳도 르바임의 땅이라 하였나니 전에 르바임이 거기 거주하였음이요 암몬 족속은 그들을 삼숨밈이라 일컬었으며
21 그 백성은 아낙 족속과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컸으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22 마치 세일에 거주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하심과 같으니 그들이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였으며
23 또 갑돌에서 나온 갑돌 사람이 가사까지 각 촌에 거주하는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느니라)
24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
25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자기 두 딸과 관계해서 낳은 아들들의 후예인 모압과 암몬 족속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침범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신다. 암몬 족속은 에돔 족속처럼 아마도 이스라엘이 두려워서 철저하게 방비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모압 왕 발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금지 명령을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친 염려로 술사 발람을 사주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다가 실패하고 발람의 계획대로 미디안 여인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수령들을 음행에 빠뜨렸다가 결국 이스라엘에게 멸망을 당하는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만약에 모압 왕 발락이 암몬 족속처럼 굳건하게 방비만 했더라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좀 더 국가를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세는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이 자기네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밝히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것과 같다고 기록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의 죄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신 것과 같이,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에게도 이전에 살던 원주민의 죄를 처단할 권한을 주시고 에서와 롯에게 주시고자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 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의 경고가 되는 것은, 만약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족속처럼 범죄하게 되면 언제든지 이방 족속처럼 쫓겨나거나 멸망 당할 처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 범죄할 때마다 자기들이 쫓아냈던 가나안 족속에게서 침략과 지배를 받기를 반복하였고, 왕국 시대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원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무리 한국 교회가 선교사들과 초기 목회자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듯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하고 양적인 성장을 폭발적으로 이루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모습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족속이 물리친 원주민이나, 이스라엘이 쫓아낸 가나안 족속이나, 앗수르와 바벨론이 멸망시킨 이스라엘 왕국의 패역부도한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으므로, 외부 요인에 의해서건 내부 요인에 의해서건 일곱 배의 일곱 배나 더 극심한 재앙과 멸망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모세는 가나안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굳이 38년 전 부모 세대들의 돌이킬 수 없는 죄악과 그로 인한 여호와의 진노와 그들에 대한 징벌이 어떠하였는지를 끄집어낸다. 그 때의 사건은 모세 자신에게도 너무나 뼈아픈 것이어서 어쩌면 모세로서는 그냥 언급하지 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세는 이를 묵과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더 빠르게 방만하게 되는 것보다는 옛날 일을 끄집어내는 심신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스라엘이 자기 부모 세대의 죄악과 심판을 떠올리며 각성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모세는 이미 오래전의 일인데다가 당시 범죄한 성인 모두가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음으로써 모든 대가를 치른 죄를 드러내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오늘날 교회는 겨우 수 년 전에 일어난데다가 제대로 그 대가를 치르지도 않아 그저 악성 종양처럼 그대로 남아있는 죄들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교회를 힘들게 하고 분열시키는 짓이라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두고 방치해 둔 죄는 점점 더 교회에서 몸뚱이를 키워가며 결국에는 교회를 죽이게 된다.
만군의 주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순종하는 한 이방 족속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령하고 외적인 두려움을 주셨고, 친히 이 땅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신 후에는 당신의 영이신 거룩하신 성령을 주신 교회와 성도에게는 세상으로부터 당하는 불편부당한 핍박과 환난을 온유와 겸손과 선행으로 인내하게 하심으로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하고 신령하며 내적인 두려움을 갖게 하신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의 부귀영화나 세속 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복음의 빛과 소금으로써 세상을 두렵게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코로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선한 행실이 아니라 국가와 이웃의 안전을 인질로 삼는 패악질로 세상을 두렵게 하는 것 같다.
#신명기 #Deuteronomy 2:26-37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시혼을 치다(민 21:21-30)
26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27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큰길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28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내가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내가 마시게 하라 나는 걸어서 지날 뿐인즉
29 세일에 거주하는 에서 자손과 아르에 거주하는 모압 사람이 내게 행한 것 같이 하라 그리하면 내가 요단을 건너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르리라 하였으나
30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32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3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34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35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3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37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이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 위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이라 선포한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시혼이 거절하자 또 에돔 때처럼 돌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실망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스본은 에돔이나 모압이나 암몬처럼 여호와의 특혜를 입지 못하였으므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점령할 것을 명령하셨다. 이처럼 악인이 의인에게 계속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완악하고 패역하게 행하는 것이 당시에는 답답하고 힘들고 아무런 나아질 가망이 없어보인다 하여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을 열 번이나 보내기를 거부한 바로와 같이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일 뿐이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정당한 권세를 비방하고 해하려는 악한 자들의 행태가 비록 지금은 답답해 보여도 저들의 마지막은 영원한 멸망인 것이다.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는 사법부와 윤석렬 검찰, 거짓으로 시민들을 선동하는 언론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여념이 없는 교회와 목사들, 조두순이나 조주빈이나 손정우나 장하영이나 안성은 같은 흉악범들 등이 비록 이 땅에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고 멋대로 하는 것처럼 보여도 저들은 애굽의 바로나 헤스본의 시혼의 처지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을 주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주실 것을 표상하셨다. 그리고 구속사역을 이루신 오늘날에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물리적인 영토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령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신다. 즉 오늘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나라는 이 땅의 물리적인 영토가 아니라 복음의 빛과 소금과 향기가 퍼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수구세력들은 마치 미국의 정치 경제 체제만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것이라며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교회와 성도의 삶의 목적은 어떤 특정 통치 체제 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어떤 사회 체제이건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순응하면서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가장 교묘한 이단 세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만을 절대시하고 다른 모든 체제는 배척하는, 전광훈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죄많은 이방 족속이라도 성인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이게 하느냐며 하나님을 사랑이 없는 무자비한 신이라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도덕 관념을 수천년 전의 그 때와 동일시 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하며, 죄악이 관영한 이방 족속의 여자와 아이들은 구원에서 배체된 악의 후예들이고 멸망의 자손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기준과 잣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제한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부당할 뿐이다.
#20200208 #창세기 #Genesis 31장. #야곱 #라반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23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은 야곱을 미워했기 때문에 야곱이 자기에게 알리고 떠났건 몰래 떠났건 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라반은 마치 야곱이 자기 소유를 도적질이라도 한 듯이 무리를 이끌고 추격한다. 라반은 야곱을 추격한 이유로 자기 딸들을 억지로 데려갔다는 것과 자기 신 드라빔을 훔쳐갔다고 하는데 후자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전자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딸은 이미 자기 아비 라반이 자기들을 창기와 이방인으로 여겨 팔아먹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야곱이 가진 자기보다 많은 소유를 탐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라반은 어쩌면 야곱을 죽이고 그 모든 양떼들을 가로채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 애굽의 바로와 그랄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사라를 지켜주신 것처럼 이번에는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탐욕스러운 악인이자 우상숭배자인 라반조차도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너무나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등장하셔서 악을 막아주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 중에서도 어떤 신자에게는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지켜주시기도 하고 어떤 신자에게는 스데반이나 야고보나 여러 순교자들처럼 죽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한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전자처럼 짜잔하고 구해주시기를 원하지만 이 땅의 환난에서 건지실지 죽기까지 두실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택하신 신자에게는 그들이 견뎌낼 수 있는만큼의 고난만을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도저히 우리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고난의 욱여쌈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주셔도 감사해야 할 일이고 우라의 재산이나 부모나 형제나 자녀들이나 명예나 권세나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놓게 두고 보시더라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버리게 된 것은 하늘에서 백 배의 상급으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라반은 야곱을 해하려는 악한 의도를 숨기고 모든 잘못을 야곱에게 떠넘긴다. 라반은 딸들을 사랑하거나 아끼지 않았으면서도 자기가 미리 알았으면 선대하여 떠나보냈을 것이라며 거짓말을 한다. 게다가 전날 밤에 꿈에서 하나님을 뵈었으면서도 그 하나님만 아니었다면 자기 손으로 야곱을 죽였으리라는 섬뜩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만약 라반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그를 막지 않으셨다면 라반은 야곱만 쳐죽이고 그의 딸들과 자녀들과 모든 양떼를 갈취하여 돌아갔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마귀와 악인들을 어떻게 이용하시는지를 조금 가르쳐 준다. 마귀와 악인들은 자기들의 악한 의지로 스스럼 없이 악을 행하지만 그 경계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악인들이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시더라도 그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전부 지정해 놓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눈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악을 적극적으로 조장하시는 것처럼 보여서 하나님께서 악의 근원과 책임이 있지 않는가 하는 망령된 생각에 젖기도 한다. 실제로 어떤 망령된 자들은 그런 생각에 젖어들어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으므로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도 주장하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은 멸망의 길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라반에 대한 야곱의 예상과 판단은 옳았다. 그대로 라반과 있다가는 무슨 해를 당하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몰래 도망쳐 라반의 수중에서 벗어나는 것도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빠져나갈 방도가 없을 때 하나님께서 라반을 막아주시고 야곱을 지켜주신 것이다. 야곱은 아내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친 것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그동안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한대로 라반에게 맹세하였다. 이는 우리가 선인이건 악인이건 누구를 대하건 우리의 신앙 양심에 위배되지 않도록 정직과 성실함으로 대해야 할 이유이다. 만약에 우리가 선인을 속였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고 악인을 속였다면 악인은 그것을 빌미로 우리의 약점을 잡아 참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 정부가 악을 제거하고 공의를 세우는데 비록 답답할 정도로 더디게 보이더라도 우리는 믿고 기다리며 응원과 격려를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권선징악을 빌미로 악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즉각적으로는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머지않아서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러자 라반은 야곱과 그의 아내들의 장막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많은 영화들에서 범죄 집단이나 정부 비밀기관이 용의자의 집을 수색하는 장면을 보면 절대로 젠틀하지 않다. 거의 수색하는 대상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데, 라반이 야곱의 장막을 수색하는 것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자기 드라빔을 찾는다는 이유로 무언가 자기가 더 가져갈 것이 있을까 싶어서 야곱의 장막을 전부 뒤집어 놓고 헤질러 놓고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마귀와 악인들이 의인을 참소하는 방식이 이와 같다. 마귀와 악인들은 성령으로 깨끗하게 청소되고 정돈된 우리 심령을 헤집어 놓아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참소하며 정죄한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범죄하므로 마귀의 참소와 정죄에 죄책감을 가지고 무력함과 좌절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마귀가 찾아낸 것이라곤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하게 되어 더이상 우리를 정죄에 빠뜨리는 효력이 없는 것들이므로 그리스도만 굳게 붙잡는다면 마귀의 수색 따위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핑계로 우리의 죄성과 범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고 더욱 그런 죄성을 미워하고 성령충만함을 즐거워해야 한다.
라헬이 아비 라반이 미워서였건 드라빔이 탐났건 드라빔을 숭배하기 위해서였건간에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훔친 것은 하마터면 자기뿐만 아니라 남편 야곱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초래할 뻔 하였다. 첫 여자 하와 때부터 여자는 남자보다 내적인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더욱 언행을 신경쓰고 조심하여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첫 명령인 남자를 지혜롭게 돕는 의무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기 소견에 좋아보이더라도 남편 몰래 한다거나 남편의 의견을 거슬러서는 안되고 매사에 남편의 뜻을 듣는 것이 아내인 여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설령 남편이 아내의 좋은 의견을 반대하여 잘못된 결정을 내림으로써 안좋은 결과를 초래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남편을 무시해서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