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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불교tv(무상사) 법화경 산림법회 제5강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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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T.V 무상사 무비스님의 법화경 산림
무비스님의 행복특강
법화경, 꽃을 피우다
2009년 5월 6일
제 5 강 - 2
무비 큰스님 법문
2009년 5월 6일
제 5 강 - 2
이것을 맨 제일 1번 단락만 같이 함께 합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여래의 지혜를 이렇게 드러내어서
찬탄합니다.
‘내가 성불한 뒤로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써 여러 가지 교법(敎法)을 널리 이제 말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사리불이여, 여래의 지견은 넓고 크고 심원하다.
이 지견, 불교에서는 지견을 지혜로써 표현을 합니다. 지견이나 지혜나 같은 말인데, 부처님의 지혜는 넓고 크고 심원하다!
그래서 한량없는 마음, 이렇게 했습니다. 이 한량없는 마음을 한문으로 사무량심 [四無量心 ; 慈無量心, 悲無量心, 喜無量心, 捨無量心], 그래요.
사무량심하고 자비희사(慈悲喜捨),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많이 들으셨을 줄 믿습니다.
자비의 마음, 희사의 마음, 또는 이제 자(慈)의 마음, 비(悲)의 마음, 희(喜)의 마음, 사(捨)의 마음, 이 한량없는 마음, 이걸 우리가 좀 배워야 됩니다. 이건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 입니다마는 또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그런 인격자가 우리도 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한 생각 돌이키면은 이와 같은 마음을 우리도 쓸 수가 있어요. 왜냐? 소질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모든 사람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느냐?
정법을 모르는 것, 진리, 참다운 이치, 사람이 살아가는데,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다운 이치를 모르는 데 대해서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는 그 소중한 부처님이, 자신이 부처님인 줄도 모르고 종인 줄 알고, 죄업 많은 중생인 줄 그렇게 잘못 알고, 또 뿐만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독거노인들, 또 무의탁 아동들, 굶고 있는 사람들, 그것 보다도요 정말 북한 문제라든지 저기 중동의 문제라든지 모두 이해관계로, 또는 민족이나 종교의 차별로 무수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엄청난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이게 어리석은 사람들이에요. 그래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그런 일을 우리는 해야 되는데 참으로 힘은 부족하고 뜻만 클 뿐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것이 한량없는 마음인데, 그래서 진정한 불자는요 그런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불행들, 그런 그 불행들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야 됩니다. 이게 불자예요. 이게 불교인입니다.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불행과 그 부정과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야 그게 진짜 불자예요.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을 도와야지, 하는 그런 마음에서 밤잠을 설쳐야 되고, 그런 이들이 눈에 밟혀서 잠이 오지 않아야 이게 진짜 불자예요. 뭐 깊은 이치 어쩌자는 말이요, 그래.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공이 어떻고, 뭐 무아가 어떻고, 연기가 어떻고 그거 아무 것도 아닌 거예요. 진정 불교는 이 지구상에서 아, 참 비참한 사람들, 정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생각을 해서 그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야 되고, 밤잠을 설쳐야 되고, 그들이 눈에 항상 밟혀야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내 이 미약한 힘으로 도울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을 늘 연구하고 그들이 눈에 띄어서 내 손이 미치는 데 까지 도와주고자 하는 그러한 마음, 이게 뭐라고?
한량없는 마음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그런 마음이에요.
뭐 그냥 넘어 가버리면 한량없는 마음인갑다, 하고 이렇게 하죠. 내가 설명 드린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마음입니다. 정말 어느 때 보다도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보다도 오히려 세상은 많이 풍요로워졌고 발달했다고 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게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게 제일 우선이고,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면 그런 문제가 아주 많이 감소됩니다. 그래도 절대빈곤이라든지 이런 것은 어리석음 하고 또 관계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물질적으로 도와주어야 되겠죠. 물질적으로 도와주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이제 정말 부처님의 한량없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 여래의 지견은 넓고 크고 심원하여 한량없는 마음이 있다.’ 여기에 그냥 가슴에 서늘해야 돼요.
우리 불자들은 진정 부처님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내 가슴에 녹아든 사람이라면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불행들이 눈에 쓰윽 이렇게 참, 영화필름처럼 지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한량없는 마음 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량 있는 마음이라도 좀 내어 봐야 그게 참다운 불자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또 걸림 없는 변재라고 해서 ‘사무애변[四無碍辯;사무애지(四無碍智)]’주1) 이라고 그렇게 하는데 부처님의 갖추고 있는 그건데 교법에 대해서 걸림이 없어요. 교법, 부처님의 교리가 얼마나 복잡다단합니까? 그런데 대해서 걸림 없는 그런 능력, 그 다음에 교법의 뜻에 대한 걸림이 없는 능력, 그 다음에 말에 걸림이 없어야 돼. 말에 걸림이 없어야 돼.
아무리 뜻을 잘 알고 법을 잘 알아도 표현하는데 걸림이 많아도 그것도 이제 법을 전하는데 문제가 있죠.
그 다음에 ‘낙설[요설]무애(樂說無碍)’라고 해가지고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좋은 이치를 남에게 일러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 남에게 일러줄 때 기뻐야 돼.
‘아, 이건 바른 이치입니다. 저건 정말 진리, 참다운 이치입니다. ’라고 이렇게 일러주고자 하는 그런 즐거운 마음이 있을 때 그게 이제 불자의,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죠. 부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 ‘힘’이라고 그랬어요.
‘힘과 두려움 없음과’, 라 했는데 힘도 열가지 힘[十力]이 있다고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드리면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열 가지 힘 중에서
1. ‘도리에 맞는 일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판별하는 힘[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이랬어요.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가정사라든지 뭐 회사일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매일 매일 새로운 일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 일이 도리에 맞는 일인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인가? 아, 이 판단이 안 서는 거야, 이게.
판단이 안 서면 머뭇거리기라도 하고, 연구라도 해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논이라도 해봐야 할 텐데 덥석 일을 저질러 버리네. 판단도 안 서는데 일을 부터 저질러 놓는 거야. 그러니 참 중요한 일인 거여. 부처님은 그 힘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도리에 맞는 일인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인가?’를 판단하는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그 우리 한번 부처님은 그런 힘이 있다는데 우리는 그런 힘이 없으니까 일을 서둘러 하지 말고, 결정도 내리지 말고 좀 미루는 그런 그 훈련이라도 쌓아요.
하루를 미루고 이틀을 미루고 삼일을 미루고,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아, 이 미룰 일이 아니라’고 그러지. 절대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빨리 서둘러서 결정해야 이익이 많다, 당연히 그러거든요. 절대 그 말에 속지 마십시오.
그것은 틀림없이 꿍꿍이속이 있는 말입니다.(일동,웃음)
무조건 미뤄요. 참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하고 의논 해 보고 또 생각해 보고 그러면 없던 지혜도 생기게 돼요. 지혜도 생기게 되어서
‘아 그 일이고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는 일인데 내가 큰일 날 뻔했구나!’
나중에 그렇게 알았지. 여기 어디 저 세상을 많이 산 노련한 거사님들이 많이 계시는데 아마 옛날에 멋도 모르고 많이 당했는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네요.(일동, 웃음)
보살님들은 뭐 안 그런 것 같이 보이는 것 같아요? (일동, 웃음) 다 마찬가지예요. (예. 일동, 웃음) 신문에는 보살님들 일이 더 많이 나. (일동, 웃음)
‘도리에 맞는 일과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을 판별할 줄 아는 힘이 있다.
그 다음에 또 부처님은 이런 힘이 있어요.
2.하나하나에 업의 원인과 그 과보와의 관계를 여실히 아는 힘[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그래요.
우리가 이런 일을 하면 무슨 과보가 오겠다, 무슨 결과가 오겠다, 하는 것을 부처님은 하기 전에 그냥 촥~ 떠올라.
같은 씨앗을 심는데 땅을 살펴보고 내가 이것을 열매를 맺을 때까지 보호해주고 거름도 주고 물도 주고 김도 매줄 수 있는가? 이것을 씨앗을 심을 때부터 딱 나와 버려야 나와 버려야 된다구. 책임도 없이 씨앗을 심어놓고 거름도 못 주고 김도 못 뽑아주고 엉망 진창된 그런 열매들이 얼마나 세상에 많습니까? 여기도 성문들은 곡식이나 과일만 생각할 것이고 연각들은 자식이나 무슨 친구도 생각할 것이고 생각 수준 따라 다 다르네, 이 말 한마디에.
보십시오. 부처님 말씀은요 이렇게 간단하게 보면 간단하지만 그 속뜻을 들여다보면 참 이렇게 참 천차만별입니다.
곡식을 심는 일이 어디 뭐 하필 곡식을 심는 일이겠습니까? 여기 농사짓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러나 우리 다 농사짓습니다. 가까이는 법화경 공부라고 하는 이 농사를 짓습니다.
오늘 이 순간 법화경이라고 하는 이 씨앗을 뿌립니다. 이 씨앗을 뿌리면 좀 비뚤게 심지 말고 바로 좀 심읍시다. 이 법화경의 씨앗이 무서운 씨앗이 되어 가지고 이 씨앗을 비뚤게 심어놓으면 나중에 비뚤게 나와 사람 골치 아프게 하고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줘요. 그런데 이것을 바르게 심고, 그래서 잘 가꾸면 이건 우리가 당당하게 이 세상을 하나님으로, 신으로, 부처님으로 정말 근사하게 인생을 세세생생 살 수 있는 그런 씨앗이 됩니다.
이 한 시간의 씨앗도 그런 역할을 해요.
그 다음에 부처님의 많은 힘 가운데
3.‘중생의 근기의 우열을 아는 힘[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나도 이것 좀 알았으면 싶을 때가 많아요. 이 이야기를 해서 아니, 나부터 라도 이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근기인가 아닌가,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다 아신다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실은 부처님은 이렇게 대형 법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경전에는 여기 뭐 17만 명이 모였다고 법화경에서 했지마는 부처님 당시 때 정말 살아 생전에, 이건 오백년 후에 결집한 것이고 부처님의 사상을 좀더 제대로 구체적으로 펴기 위해서 나중에 부처님이 이렇게 재구성한 것이고 실지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한 생애동안은 일대일 법문입니다.
거의가 상담식 법문이에요. 상담식. 그러니 한 사람이 문제가 있어서 오시잖아요? 오면 그 사람 문제는 딴 사람에게 해당될 수도 있고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모이고, 모이고 하다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서 오늘날 경전으로 남죠.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의 우열, 우열을 환~히 아시고 그 사람에게 정~말 적절하게, 적절하게 그렇게 일러 주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시 때 어떤 문제 있는 사람이 와서 질문을 해가지고 헛걸음 한 적이 없습니다. 헛걸음 한 적이 없어요. 저는 사실 나에게 , 사람들이 문제가 있어서 와서 질문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정말 소득을 줬는지 안 줬는지 내가 지금도 의문이야. 그 사람 근기를 명확하게 모르니까 그 사람 속을 내가 명확하게 모르니까, 참 이런 것이 부럽더라구요.
부처님은 그것을 속속들이 환~히 알아가지고 정말 헛걸음하는 사람이 없도록 전부 소득을 주는 거야. 이치를 일러주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이렇게 하시는 힘이 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경전에.
또
4. ‘중생의 갖가지 소망을 이해하는 힘[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 있어요.
갖가지 소망, 와서 ‘법화경을 나는 사경을 하는데 뭐 어떻게 하는 게 좋습니까?’, 그 무슨 소망으로 와서 하는지 내가 알 수가 없어. 무슨 소망을 가지고 법화경을 사경하는지 그게 궁금하다니까, 사실. (웃으심)
어쨌든 하십시오. 많이 하시다 보면 바른 길로 가게 되어있어요. 안 하고는 바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여기 저기 뭐 시행착오도 하고 헛걸음도 하고 그러다보면 결국은 바른 길 찾게 되어 있어요.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은 중생들이 무슨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환~하게 들여다본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5. ‘중생과 제법의 본성을 아는 힘’[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또
6.‘중생의 가는 곳을 아는 힘’[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7.‘자신과 남의 과거세일을 생각해서 아는 힘’[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이것도 한번씩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저도.
내가 첫째 과거에 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고, 그 다음에 어떤 사람들 참 답답할 때, 아무리 상담을 해도 도대체가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은
‘아 저 사람은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 전생에 어떤 업을 가지고 살았을까?’이것 알면 정말 제대로 된 처방을 할 수가 있겠는데 아 이걸 모르니까 정확한 처방을 내리지가 못해서 그야말로 그 저기 저 침대롱을 잘못 꽂아서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수도 있어요, 잘못하면.
그래 부처님은 그런 것이 문제였었나봐. 그래서 부처님은 나중에 그런 것을 환~히 꿰뚫어 아는 그런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런 등등 [8.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9.사생지력(死生智力) 10.누진지력(漏盡智力)], 이 힘이라고 하는 글자 한자에 아, 이렇게 깊은 뜻이 있다니까요.
이걸 여러분들이 종이가 구멍이 나도록 읽고, 참고도 하시고 여러 가지 해설서 같은 것, 사전 같은 것 이런 것들을 좀 두루두루 참고를 하셔서 이해를 하시면 그 뜻이 더욱 깊어집니다.
그 다음 ‘두려움 없음’, 부처님의 덕인데, ‘두려움 없음’ 이라고 하는 이것도 네가지 ‘두려움 없다’는 게 있습니다.
부처님은 네 가지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다[사무소외(四無所畏);四無畏;catur-vaisaradya]. 그럼 뭐 그 전엔 부처님도 두려움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죠, 부처님도 두려움이 있죠. 깨닫기 전에야 어떻게 이것이 정법이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알기 때문에 경전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알아서가 아니라 경전가지고 이야기하니까, 경전가지고 정직하게만 이야기하면 당당할 수가 있습니다.
크게 떨 필요가 없이 부처님 경전을 전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심을 가지고 경전을 전하면 어디엔가 문제가 있죠. 그래서 여기 보면
1.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해서 전혀 의혹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
2.또 온갖 번뇌를 끊어서 두려움이 없다[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
3.또 악법을 설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다[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그랬어요.
비법, 불법이 아닌 것, 이것을 과감하게 이야기한다. 성문법이다, 연각법이다,
이것은 초등학교 과정이야. 이것은 중등학교 과정이야. 이런 것을 과감하게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소승을 믿지 마라. 소승은 부불법외도다.
불법에 붙어있는 외도가 소승이다, 성문·연각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사성제, 팔정도, 이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성제, 팔정도, 37조도품, 공이니, 연기니, 무아니 이것만 가지고 지 혼자 편안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은 부불법외도다. 불법에 붙어있는 외도다. 이랬어요. 소승은 그런 것이라. 성문 연각은 소승이거든요.
그렇게 부처님은 소승을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대승으로 정말 바람직한 법으로 공부하기를 그렇게 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유언으로, 눈을 막 감으면서 유언삼아 하신 말씀 가운데 ‘의요의(依了義) 불의불요의(不依不了義)[요의경(了義經)에 의하되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依)하지 말라)]’,
요의경(了義經), 완전한 가르침을 의지하고 완전하지 못한 방편으로 설하신 가르침을 의지하지 마라. 너희들도 다 수명이 다 있고 한데 언제 그 다 공부하고 마지막에 와서 대승법을 공부할 기회가 있겠나? 바로 대승법으로 공부해라! 그러니까 이런 이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요 한국불교의 모든 교양대학의 교재를 전부 대승경전으로 바꿔야 됩니다.
무슨 불교 입문서니, 무슨 뭐 언제 그런 거 하고 언제 이런 좋은 그 법화경 같은 것을 접할 기회가 있습니까? 보장도 없어요. 불교 교양 대학에 며칠 나오다가 그 다음에 소식도 없어. 어떻게 된 지 알 수가 없는 거지 그거는. 보장이 없잖아요. 졸업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 위에 또 경전반으로 올라가서 공부한다는 보장을 누가 합니까? 그 보장을 , 부처님도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나도 귀중한 시간이야. 그래서 가장 값있는 것부터 공부해야 된다니까.
오늘 이 순간뿐이에요, 인생이란.
내일 어떻게 보장합니까? 이 순간뿐이에요. 이 순간이 전부예요! 이 순간이 전부다!
그러기 때문에 불법을 공부하는데, 불교를 공부하는데도 정말 가치 있는 것부터 공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가장 높은 최상승법을 공부하고 나서 그래도 시간이 남거든 그때는 이제 ‘이 성문법은 뭔가? 공이니 무아니 이것은 무슨 소식인가?’
이렇게 한번 궁금해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래서 부처님은 장법을 설하는데, 장애되는 법을, 바르지 못한 법을 설하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다[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당당하다 말이야, 어떤 외도든지 어떤 소승학자든지 와서 다 따지라!
나는 생명 걸고 정법을 말하겠다.
그렇게 부처님은 두려움이 없었어요.
4. 그 다음에 고통을 벗어나는 이치를 말하는데 있어서 두려움이 없다[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
‘설출도무소외(說出道無所畏)’라고 하는 그런 그 두려움이 없는 등등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이란 말속에는 그런 것들이 또 담겨 있습니다.
그다음에 선정, 아주 깊은 ? 저기 태산처럼 요지부동한 선정에 들어가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 해탈은
생사해탈,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순간순간을 해탈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순간순간 해탈이라는 것은 현재 상태에서 보다 더 발전된 내 자신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현재에서 벗어나야 돼요. 늘 새롭게, 여기서 법화경을 공부했지만 법화경보다도 더 우수한 공부가 또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또 법사가 저런 설명을 했지만 법사보다도 더 깊고 오묘한 내용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이 경전 구절 속에서 또 발견해 내려고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고정관념, 또는 현재 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지 말고 부단히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노력, 이게 해탈이에요. 이게 해탈입니다. 생사해탈해서 어쩌자는 거요? 말은 하지만 그건 아무도 답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답 한 사람 없어요. 답을 보여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아주 현학적으로 깊이 설명한들 지금 우리하고 별 상관없는 거예요. 졸음만 오는 그런 설명, 나도 잘 합니다. 학인들 모아 놓고 평생 그것만 한 사람이니까.
그런 건 지금 우리에겐 필요치 않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단락 우리가 한번 읽어볼까요?
3. 사리불이여, 여래는 가지가지로 분별하여 모든 법을 능숙하게 설하므로 말이 부드러워 대중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라. 사리불이여, 요점만 들어 말하자면 한량없고 그지없는 미증유한 법을 부처님이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舍利弗아 如來가 能種種分別하사 巧說諸法하시니 言辭柔輭하야 悅可衆心이니라 舍利弗아 取要言之컨댄 無量無邊未曾有法을 佛悉成就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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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않습니까?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을, 미증유한 법을 부처님은 모두 성취하였다. 참, 설명 어떻게 다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도 ‘요점만 들어서 말하자면’, 끝에 와서 이제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그리고 이제 밑에 ‘그만 둬라!’,
당신이 깨달은 그 깊고 오묘한 법을 다 설명하려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게
먹혀들 것 같지 않고, 설사 좀 먹혀든다 하더라도 다 이해해질 것 같지를 않아. 그러니 괜히 목만 아프고 그냥 입만 아프고, 뭐 그런 생각이야 했겠습니까만 아 부처님이 법문을 하시다가 꼭지만 떼놓고는
4. 그만두어라. 사리불이여, 굳이 다시 말할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부처님이 성취한 제일이며 희유하고 알기 어려운 법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이니라. 止하라 舍利弗아 不須復說이니 所以者何오 佛所成就第一希有難解之法은 唯佛與佛이라사 乃能究盡諸法實相하나니라 所謂諸法에 如是相이며 如是性이며 如是體며 如是力이며 如是作이며 如是因이며 如是緣며 如是果며 如是報며 如是本末究竟等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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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그만 두어라!’라고 참 부처님이 이럴 때도 있어요. 세상에 그 자비로우신 부처님이 어찌 사람들을 십칠 만 명이나 모아놓고 ‘그만 두자, 법회 걷어치우고 그만 두자!’아 이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야. 앞으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정말 궁금하기 이를 데 없고 기대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가 잔뜩 그 기대를 가지고 다음 시간에 우리가 또 기다려야 될 것 같습니다.
이상입니다. (법회청중, 박수)
무비스님의 법화경 산림 ≪법화경, 꽃을 피우다≫ 불교 T.V 무상사
(2009년 5월 6일 법문 끝)
참고
※사무애지(四無礙智) 주1) 마음의 방면으로는 지(智) 또는 해(解)라 한다. ①법무애지(法無礙智) ②의무애지(義無礙智) ③사무애지(辭無礙智) ④요설무애지(樂說無碍智) ※사무애변(四無碍辯) 입의 방면으로는 변(辯)이라 한다. ①법무애변(法無碍辯) ②의무애변(義無碍辯) ③사무애변(辭無碍辯) ④요설무애변(樂說無碍辯) - 무비큰스님 법문 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