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역은 군자, 군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 안내방송의 낭랑한 목소리에 나는 살짝 풀어진 정신을 부여잡고 서둘러 내릴 준비를 했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인파로 빽빽했던 전철은 어느새 듬성듬성 비어있었다. 잰걸음으로 역사 밖으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이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나는 저항 없이 그 속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장수처럼. 생각해보니 오늘은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 오전에 수업하고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와 지금까지 여기저기 돌며 수업을 하다 보니 편의점까지 들를 시간이 없었다. 보통은 30분 정도 시간이 남으면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데 오늘은 수업이 길어지는 바람에 그마저도 먹지 못했다. 그런데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의아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서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이 쓰러져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다시 허겁지겁 집을 나선다. 과외선생님이 되어 바쁘게 생활한 지 어느덧 8개월째라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 이 일상이 낯설다. 작년 봄까지만 해도 나는 외무고시 준비를 위해 신림동 고시촌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고시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때라면 지금쯤 고시 식당에서 저녁을 간단히 해결한 후 가볍게 산책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또래에 비해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모범생이자 우등생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수능 시험에서 한 번 발목이 잡히자 재수, 삼수, 사수까지 총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어렵게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급함이 앞서 학업 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외교관이라는 꿈을 위해 외무고시를 결정했다. 이런 나의 결정에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했지만 나는 부모님의 반대와 주변의 염려를 뒤로하고 고시촌으로 들어갔다. 네 번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공부가 버거운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친구들은 자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 때로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합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고 자신의 모든 걸 뒤로 미루고 내 뒷바라지만 하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합격만 하면 이 모든 고생은 끝이고,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길 거라는 기대감으로 버티곤 했었다. "좀 늦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하는 게 엄마의 바람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건데, 그런데…."
지난해 봄이 끝날 무렵, 엄마는 시험을 치르고 나온 나에게 혼잣말 하듯 두서없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엄마의 모습은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가득해 보였다. "너희 아빠가…. 아빠가 간암이라는 구나." 메마른 목소리와 달리 엄마는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나는 순간 둔기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없이 작아진 엄마를 품에 안고 울음을, 슬픔을 토해냈다. "시험 보느라 애썼다. 놀랐지? 괜찮아. 아빠는 괜찮아." 지금도 기억난다. 도리어 나를 다독여주던 아빠의 떨리던 손길이. 다음 날부터 나는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과외 교사로 일했고, 아침에는 친구의 소개로 한 스타트업 회사에서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제는 내가 가장이 되어야만 한다는 책임을 실천해나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아빠가 건강해질 수 있다면 내 꿈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이젠 내가 아빠를 뒷바라지하겠다는 치기 어린 결심도 했다. “엄마, 식초랑 올리브유 주문해놨어요. 토마토 병조림 만들어서 매끼마다 아빠 드실 수 있게요." "아빠, 조기 튼실하죠? 고기도 생선도 많이 드셔야 해요. 참, 색전술 시술하고 나면 물도 많이 드셔야 해요. 생수도 주문해놨어요." "아보카도가 건강에 좋은거 아시죠? 밍밍하니까 레몬이나 과일이랑 함께 드세요. 엄마도요." 내가 부모님의 일상을 챙기면서 가라앉아있던 집안 분위기는 조금씩 가벼워졌고 마주 보며 웃는 일도 잦아졌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우리만의 또 다른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쩌면 나는 외교관보다 강사가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엄마. 오랫동안 수능 공부를 하고, 외교관 준비를 해오며 쌓아온 공부 이력들 덕분에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저도 차라리 이게 좋아요. 공무원 시험은 나중에 봐도 되니까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내가 '일타강사'가 될 지도 모르잖아요, 하하. 우리 일단 아빠만 생각해요." 이따금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에게 하는 말이지만 실은 내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너무 멀리 내다보지도 말자고. 그저 오늘을, 지금을 충실히 살자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소중함으로 하루를 구석구석 채우자고. 그런 행복을 내 손으로 이어가고 싶다. 심호흡을 크게 내쉬어 본다. 그리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딘다. 나에게 다가오는 것들, 그 속으로. 정희원 (2024 샘터상 생활수필 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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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고운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는
행복한 휴일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