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우대석 /조성국
분홍 덮개 씌운 시내버스 의자에서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가 벌떡 일어서서 자릴 내주자
내심 당황했다
처음 닥친 일이라서,
선뜻 앉을 자릴 내주기만 하던 내가
인자부터 그지간 내준 걸
되돌려받을 나잇살깨나 먹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해서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없으면서
우대받듯 해서
달리는 유리창
괜히 밀어젖히고 찬바람이나 쏘이며 오래
오래 흰 머리카락만 휘날렸다
- 시집 『해낙낙』 (시인의 일요일,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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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국 시인
1963년 광주 출생. 조선대 졸업
1990년《창작과비평》 등단
시집 『슬그머니』 『둥근 진동』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해낙낙』
동시집 『구멍 집』,
평전 『돌아오지 않는 역사 청년 이철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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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강아지의 엄마 역할을 하는 아이는 큰 딸입니다.
큰딸의 대학 입학 기념으로 입양한 강아지이니까요.
다만, 큰딸은 학기 중이면 서울에 올라가 삽니다. 방을 하나 얻어 주었습니다.
내 생각엔 충분히 통학이 가능한 거리이지만, 힘들어 죽겠다고 투정을 부려서 학교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아지를 돌보는 것은 둘째와 막내입니다.
잠은 둘째 방에서 자고, 제일 많이 놀아주는 딸은 막내입니다. 조금씩 역할이 분담되어 있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반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아이들도 강아지를 키워본 경험이 없습니다.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헤어질 때 얼마나 힘든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집 안에서 강아지 냄새도 많이 나고, 돈도 많이 들어갑니다.
안 그래도 대가족인데, 식구가 늘었습니다.
큰딸아이, 강아지가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저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할아버지 손주 귀여워 해주세요”라고.
끔찍합니다. 할아버지라니요. 생각해 보면, 제 어머니는 쉰이 갓 넘어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만 해도, 쉰이 넘으면 누구나 다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입니다. 아, 할아버지라니!
나이, 참 쉽게 먹습니다.
세월만 지나가면 나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
세월은 몸에 고스란히 쌓입니다. 세월은 몸도 늙고 마음도 늙게 만듭니다.
제가 워낙 새치가 많아, 이제 염색하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습니다. 그래도 제 얼굴에 잔주름이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얼굴은 그리 늙어 보이지 않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아내에게 “아직 삼십대로 보이지 않아”라고 말하지만,
아내는 웃으며, 제 나이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제가 사는 집이 아파트 4층인데요, 3층의 할머니가 저를 보고 이렇게 부릅니다.
‘아기 아빠’라고요. 저 같은 중늙은이한테 ‘애기 아빠’라니요.
말이 참 우습지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좋습니다.
저에게도 애기 아빠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딱 10년 전입니다. 나이 마흔에 가까워질 때 막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한층 더 젊어졌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젊어졌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막내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요.
십 개월간 아이의 뛰어노는 풍경을 바라봤습니다. 함께했습니다.
젊은 엄마들 틈에서 시간을 보내니, 더 젊어집니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학생들 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행정부서를 떠나 교학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학생들과 형·동생 할 수는 없어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젊어짐을 느꼈습니다.
저도 이렇게 저렇게 나이를 먹겠지요.
막내가 대학에 들어갈 즘이면, 오십 대 중후반을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명예퇴직을 하고 어디선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요.
젊어 보일 필요도 없어 염색하지 않으면, 저도 시 속의 화자처럼 초등학생이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소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지요.
삶이 뭐, 별것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늙어가는 것이지요.
- 시 쓰는 주영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