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보물을 품은 지혜의 백발
PACOMIO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1독서: 1열왕 3,5-6ㄱ.7-12 <너는 분별력을 청하였다.>
2독서: 로마 8,28-3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복음: 마태 13,44-52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제목: 보물을 품은 지혜의 백발
1. 들을 줄 아는 마음이 만드는 진짜 지혜
삶의 온갖 풍파를 견뎌낸 노년의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깊이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상은 흔히 속도나 효율, 돈 버는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는 인생의 황혼은 결코 시들어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삶 속에 정성껏 심어놓으신 은총의 열매가 무르익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 상권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백성을 다스려야 했던 솔로몬 임금의 겸손한 기도를 들려줍니다. 주님께서 꿈에 나타나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부귀영화나 장수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낮추며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솔로몬이 청했던 이 ‘듣는 마음’은 단순히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마음을 열고 삶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식별의 지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곁을 지키시는 어르신들이 바로 이 듣는 마음을 한평생 몸으로 살아내신 분들입니다. 수많은 시련과 기쁨, 실패와 성취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견뎌온 연륜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학문도 대신할 수 없는 참된 지혜의 원천입니다.
2.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빛나는 노년
어르신들이 지나온 길에는 때로 서글픈 고통과 외로움, 육체의 쇠퇴라는 시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허투루 버려지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8)
우리가 마주하는 노년의 존재는 단순히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 태초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단일하고 완성된 구원 계획 안에 서 있는 거룩한 실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어르신들이 짊어져 온 삶의 십자가와 희생은 예수님의 고난을 닮아가는 거룩한 과정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꽉 찬 시간들을 통해 당신 자녀들을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노년의 삶은 쓸모가 없어진 빈 껍데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가 완성되어 가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3. 숨겨진 보물을 알아보는 기쁨과 세대 간의 사랑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아주 알기 쉬운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어르신들은 우리 신앙 공동체와 가정이라는 밭에 숨겨진 거룩한 보물입니다. 겉보기에는 힘없고 소박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한 가정을 일으키고 교회를 지탱해 온 신앙의 유산과 기도가 가득 들어차 있습니다. 이 보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은 큰 기쁨을 느끼며,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심을 기꺼이 내려놓고 어르신들을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모습도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2)
어르신들은 오랜 신앙의 보물을 지키고 전해주는 파수꾼이고, 젊은 세대는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가는 다음 세대입니다. 우리는 옛것과 새것을 편 가르지 않고 잘 어우러지게 해야 합니다. 젊은이든 어르신이든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귀한 보물로 알아보며 기쁘게 안아주어야 합니다.
4. 품격 있는 삶과 영원한 희망을 향한 여정
오늘 교회가 지내는 ‘조부모와 노인의 날’은 어르신들을 단순히 돌봐드려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날이 아닙니다. 어르신들이 지닌 신앙인의 품위를 되찾고, 할아버지·할머니와 자녀·손주가 거룩한 믿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기쁜 날입니다.
자녀 세대는 부모님과 조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며, 외로움과 병고로 힘들어하시는 어르신들 곁을 든든하게 지켜드려야 합니다. 어르신들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의 황혼기를 감사와 기도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주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다가올 영원한 생명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재물이나 건강은 언젠가 놓아주어야 할 일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신앙의 지혜는 영원히 빛납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 안에서 하루하루 품격 있게 살아가고, 마침내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품위 있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