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 채무가 증대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언제 어떠한 사정 하에 누구로부터 얼마를 차용하여 어디에 사용하였는지, 언제 어떠한 사정 하에 무엇을 구입하였는지 시간
순서에 따라 상세히 기재하여 주십시오)
< ~ 1999년말 >
1997년 2남1여중 외동딸로 태어나서, 평범한 가정에서 아버지,어머니,오빠,남동생과 오순도순 순탄하게 살아왔습니다. 부모님 께서는 식당을 하시다가 아는분 소개로 다단계를 알게되어 조금씩 부업으로 하시다가 IMF를 만나 식당운영이 어려워졌고, 아버지께서도 부동산업을 하시다가 결국은 두분모두 당시 “삼왕인터네셔날” 이라는 다단계를 본격적으로 하시게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다단계가 무언지도 알지못했고 별관심도 없던터라 그럭저럭 지냈고 , 저는 고교를 졸업하고 전공이었던 무용으로 서울로 진학하려했으나, 어머니께서 “여자아이가 어린나이에 집떠나사는거 엄마는 싫다“고 너무나 심히 반대를 하셔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대덕연구단지내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푼더벌어보려고 야간에는 집근처 커피숖에 시간제 일도 하면서 정말 바쁘게 살았습니다.
별탈없이 다니다가 99년초 인원감축으로 인하여 퇴사를 하고, 친구의 소개로 백화점아르바이트를 하겠되었고, 기타 인테리어 사무실 경리직 등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나갔습니다.
※ 1996년 5월~1998년 12월(한국전자통신연구소 사원) : 평균 월급 75만원
※ 1999년 1월~1999년 12월(미진콜렉션 판매원) : 평균 월급 80만원
< 2000년 01월 ~ 2000년 12월 >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신성실업이라는 사무실에 경리직으로 일을하게 되었습니다.
빠듯하게 운전면허를 취득하게되어 기쁜 나머지 연습을 하다가 바로 차를 카드로 10월경 400여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건지 아찔하기만 합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다단계를 하고 계신상태라 수입이 일정치않으셨고 , 오빠는 결혼을 했기에 가정을 꾸리기에 급급했고 또한 동생마저 군대에 있었기에 저도 차량구입으로 빠듯했지만 부모님을 매월 도와드리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현금서비스를 간간히 받아 생활하고 월급으로 메우는 상황이라 간간히 생활은 되었습니다.
2000년 말경이되어서 저는 퇴사를 하였고, 부모님께서는 “어느정도 자리가 잡혀간다고.... 너희들이 아는 그런 피라미드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고 , 저또한 그곳의 기능성속옷을 입고 체형이 어느정도 바뀌어져갔고, 주변 친구들한테 소개를 하고 있었던터라 어느정도 호감이 가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아버지께서는 “니가 와서 기능성속옷 체험도 했겠다,,,아버지가 한달에 월급 100만원씩 줄테니 그만두고 오라고” 계속 말씀하셨고 저또한 부모님을 도와드리면서 내일을 할수있다는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단계니 피라미드니 그런건 부모님께서 같이 하시기에 우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 2000년 2월~2000년 11월(신성실업 경리) : 평균 월급 80만원
※ 2000년도말 부채총액 : [ 5,426,100 원 ]
LG카드 : [ 4,370,000 원 ] / 농협BC : [ 921,600 원 ] / 외환카드 : [ 134,500 원 ]
< 2001년 01월 ~ 2001년 12월 >
부모님께서는 계속 같이 하기를 권유하셨고, 저또한 퇴사후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있었기에, 3월23일 본격적으로 앨트웰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어느정도 물건이 있으셨고 전 다른건몰라도 기능성속옷을 입고 체험하였기에 우선 속옷이 있어야 판매를 할것이기에 카드로 물건을 400여만원어치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백화점에서 옷이며 시계며 판매를 안해본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이걸 주위에 아는사람에게 판매를 하려니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업으로 소개만 해줄땐 자신감있게 했지만, 내가 직접 해보려니 그리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월급을 주신다던 아버지도 직접와서보니 꾸준한 수입이 아니셨고, 저는 계속 제자리 걸음만 하고있었고 교육만 듣고 집에가는 그런일의 반복이었습니다.
수입이 없다보니 결국은 현금서비스를 받아 생활하고 그러다보니 카드값은 주체하지 못할정도에 이르게 되었고, 동료에게 우선 빌려 카드를 막고 내것풀리면 그동료 갚아주고 그러다가 한도가 줄어들고 결국은 갚지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발만 동동구르며 잠도 못이룰때, 당시 교제를 하던 오빠가 이사실을 알고 “같이 해결해보자”고 오빠카드로 같이 돌리게 되었습니다. 양쪽집안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하던사이였고, 서로 장래를 약속할 관계였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아니구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내동생도 제대후에 같이 이일을 하고있었고, “기왕 시작한바에야 뭔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일을 해나갔습니다.
그것도 잠시뿐 판매는 뒷전이고 결국은 사람을 데려와 나처럼 투자를 시켜야만했고, 저와 동생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카드값은 오빠의 도움으로 그런대로 돌려막아갔고 , 수입은 제자리였지만 벌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계속 이런식으로는 않되겠다고 생각은 하고있었으나, 부모님과 동생이 같이 했던일이었기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나갔습니다.
※ 2001년 4월~12월(다단계-앨트웰) : 평균수입 50만원
※ 2001년도말 부채총액 : [ 4,477,460 원 ]
LG카드 : [ 2,399,400 원 ] / 농협BC : [ 1,260,060 원 ] / 외환카드 : [ 818,000 원 ]
< 2002년 01월 ~ 2002년 12월>
시간만 흘러가고, 카드값은 오빠것마저 불어만갔고 도저히 이대로는 아니다싶어 전 저녁에 커피숖 아르바이트를 했고, 오빠는 대리운전을 해나가면서 버텨보려 애를 썼지만 이미 불어버린 카드값은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오빠는 어머니께 말씀드려 카드를 셋이 같이 돌려서 우선 신용불량자라도 면해보자고 결국 이게 아님을 느끼고있었지만, 어머님카드까지 돌려막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이러다가 세명 모두 신용불량자가 되는건아닌지” 정말 잠이오질 않았습니다.
5월경 오빠는 다른일을 하겠다고 앨트웰을 그만두고 고모부님 사무실로 나가고 7월경에 저도 그사무실에 경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경리일을 하면서 오빠일을 돕지않을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오빠는 “인터넷 광고 자판기사업”을 추진중이었고, 고모부님 사무실에서 “복권자판기 총판사업”에 몰두하고있었고, 저도 경리일을 하면서 같이 “복권자판기 사업”을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서로 벌면서 카드값에 충당을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거대해져버린 카드값은 꿈쩍도 하질 않았습니다.
당시 로또복권열풍으로 인해, 복권자판기사업은 제자리걸음만 치고있었고 어마어마하게 불어버린 카드값은 빈독에 물채우기 바빴습니다. 잠도 오질않고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가면갈수록 힘만 들었습니다.
※ 2002년 7월~12월(유니온파트너스 경리) : 월급 60만원
※ 2002년도말 부채총액 : [ 16,276,520 원 ]
LG카드 : [ 2,313,220 원 ] / 농협BC : [ 823,300 원 ] / 외환카드 : [ 660,000 원 ]
현대카드 : [ 2,200,000 원 ] / 한미카드-론 : [ 3,000,000 원 ] / 현대캐피탈 : [ 2,080,000 원 ]
한솔저축은행 : [ 1,000,000 원 ] / 롯데캐피탈 : [ 2,000,000 원 ] / 대우캐피탈 : [ 2,200,000 원 ]
< 2003년 01월 ~ 12월 >
카드돌려막기를 세명카드로 막아보는한 최대한 막아봤지만, 2월부터는 손을 댈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그리많지않은 금액이었고, 오빠카드로 어머님카드로 돌려막다보니 결국은 세명모두가 연체가되어 무시무시한 채권추심을 받게되었습니다. 너무나 미안했고 죽고싶었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오빠는 “인터넷 광고자판기 사업”은 회사가 없어져버려서 발만 동동굴렀고, “운세복권자판기”는 구매후 판매부진으로 결국 폐기처분하는 결과만 오게되었습니다. 사는게 이렇게 힘든지 새삼 느꼈습니다.
채권추심은 가면갈수록 극성이었고,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신용불량만은 면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결국 대환대출을 받아야했고, 결국 1월27일 LG카드-동생(박형진)보증으로 대환대출하고 2월엔 농협BC카드를 무보증으로 대환대출, 또 현대캐피탈을 동생(박형진)보증으로 대환대출 그리고 3월엔 외환카드를 동생(박형진)보증으로 대환대출을 했습니다.
정신없이 대환대출을 돌렸지만 앞으로 갚는게 더 문제였습니다. 처음엔 채권추심을 피해보려고 대환대출은 해놓았고 무슨일을 해서라도 갚아야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직장을 구한다는게 그리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거기다 동생을 보증인으로 대환을 해버려서 내가 못갚으면 동생마저 빚더미에 앉게 해버린다는 생각에 도무지 살길이 막막했 습니다.
2월초 전 직장마저 힘든상황이오고, 3월에 취직한 “굿모닝”이라는 종합카드사도 카드대란의 영향으로 미진한 상태였고 월급도 밀려나오는 상황에 그만두어야할 상황에 이르렀고, 장항에서 인테리어일을 배우던 돌아온 오빠와 7월부터 부동산업무를 배우며 부동산에 취직을 했습니다.
신용불량자였기에 취업도 그렇고 결국 같이 부동산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2003년 1월 (유니온파트너스 경리) : 월급 50만원
※ 2003년 3월~6월 (굿모닝 사무직) : 월급 60만원
< 2004년 01월 ~ 현재까지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채, 돈버는일에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부동산은 실적제이다보니 오빠는 야간에 대리운전을, 저는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을 했습니다. 빚에는 손도 대지못한채 그저먹고 사는데 급급했습니다.
중간에 다른일을 알아보려 팔방으로 알아봤지만, 신용도 신용이고 나이가 애매한 결혼할나이가 들어서 결국은 부동산과 짬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2005년에 들어서자, 오빠는 파산을 해보자고 말을 해왔고 빚 때문에 결혼도 계속미루는 상황에서 저는 이래저래 피해 살수만은 없고, 그렇다고 상황으로 볼때 빚은커녕 이자만 산더미처럼 불어나고있는 현실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애인 그리고 애인 어머님까지 파산신청을 하게 이르렀습니다.
※ 2004년~현재일까지 (부동산등 기타) : 평균수입 70만원
※ 2005년도 01월기준 부채총액 : [ 43,413,247 원 ]
LG카드 : [ 14,559,036 원 ] / 농협BC : [ 2,012,826 원 ] / 외환카드 : [ 5,633,806 원 ]
현대카드 : [ 6,773,078 원 ] / 한미카드 : [ 2,800,000 원 ] / 현대캐피탈 : [ 3,120,724 원 ]
한솔저축은행 : [ 1.037,796 원 ] / 롯데캐피탈 : [ 3,361,667 원 ] / 대우캐피탈 : [ 1,895,116 원 ]
롯데카드 : [ 294,970 원 ] / LG할부금융 : [ 1,369,318 원 ]
KTF : [ 253,680 원 ] / K T : [ 90,700 원 ] / 하나로텔레콤 : [ 210,530 원 ]
제7 지급이 불가능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언제부터 매월 얼마 정도의 금액을 어떠한 사정 하에 지급할 수 없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재하여 주십시오)
2003년 02월부터는 도저히 애인카드,어머니카드 그리고 제카드에 번돈을 다털어도 당해낼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연체가 되었고, 신용불량만은 면해보려고 대환대출을 받았지만 그게 더욱더 힘든상황을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가 동생을 보증인으로 세워 동생마저 기존채무에 보증채무까지 더해져 결국은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헤어나보려고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았고, 제가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직장을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만큼 힘이들어 결국은 아르바이트에 부동산에 안해본일 없이 해보았지만 결과는 간신히 생활하는데 그쳤을뿐, 빚은 손도 대지못하고 이자만 불어만 갔습니다.
처음에 무심코 발급해서 써버린 신용카드가 결국은 나뿐만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을 힘든상황으로 만들어버렸고, 결국은 파산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아직은 살날이 더많은 저에게, 한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