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 교수의 부음을 접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 선뜻 문상을 가지 못 하다가 오늘 오후에서야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찾아간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 특 1호실. 하얀 꽃들에 둘러쌓여, 장교수는
문상객들을 향해 여전히 예의 밝고도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듯 했다. 성당에서 온 많은 교우들이 연도를 하고 있었고, 식장은 당연 엄숙했다.
몇해 전인가 “서강 영문학의 밤”을 장 교수가 개최하여 아주 성공리에 행사를 마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많은 교수님들과 서강 영문학도들 앞에서 아주 당당하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speech 하던 장 교수
모습이 생각났다.
행사 때문에 며칠 동안 밤잠 못 자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아주 캄캄한 밤에 텅 빈 홀에 홀로 서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했다. 그 이후 며칠 간 서강 문학의 밤에 선.후배들이 참석 안하고 Grand Ball Room (Grand Inter Continental Hotel) 이 텅비어 있다면 어쩌나 노심초사
했었다고…물론 선 후 배들이 너무 많이 참석했었고, 찬조금도 많이 걷혔고, 약정도 하여 크게 성공한 행사 였었다. 장 교수는 늘 밝았고, 말씨는 아버지를 닮아 매우 빨랐고, 항상 열정이 차고도 넘쳤었다.
조화가 가득한 장례식장의 monitor에서는 장 교수의 생생한 모습들이 동영상으로 뜨고 있었다. 3살 되어보이는 장교수를 안고 역시 활짝 웃고 계시는 아버지 故 장 왕록 박사님 의 젊었을적 모습,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 가족 사진들, 퇴원한 후, 양쪽에 지팡이 짚고 학교 강의실을 찾은 장 교수와
사랑하는 제자들의 환호 하는 모습들 풍선으로 강의실을 가득 채웠었는데 (TV 에서 보았슴)…
어제 온종일 내렸던 비도 오늘은 멎고, 너무도 화창한 초 여름 날씨…장 교수는 이제 이 아름다운 파란
하늘과, 흰 구름과, 햇빛, 나무들을 못 보는구나, 그래도 천국에서 아버님을 만난다고 했으니…아직도 마음이 짠 하다.
이 남주 교수가 올린 기사 가운데. “거의 완성된 논문을 잃어버리고 다시 써야 했던 일, 완성된 논문을 도둑에게 헌정한 일화”를 읽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때가 여름방학? 뉴욕 공항에 마중나온 친구가 차 한잔 하자고 권하여 차를 그 집 앞에 두고 잠시 들어간 사이 들고 간 luggage를 몽땅 도둑맞았고..그래서 겨우 찾아간 곳 장 교수가 머물렀던 뉴욕 주립대 그 기숙사. 햇빛 차단 방장을 드리운 채 캄캄한 기숙사 방에서 몇 날을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전화벨이 한없이 울려도,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 물도 한 모금 마시지도 않았고… 그게 몇 날 이었던가, (2주 or 3주?). 그러다가 어느 날 일어서려니, 힘이 없음은 물론 심한 현기증을 느꼈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어느 미친 여인의 몰골에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라, 세수 한후 하나밖에 없는 그 T shirt 입고, 동전 주머니 털어 찾아간 곳, 뉴욕 주립 대학교 교수님…사주신 햄버거 몇 개를 몇 분만에 다 먹고서야
교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 왔다고 했다. "다시 시작 하라고…" 그래서 Copy본도 없이 원본을 모두 도둑맞았는데도 다시 시작한 논문… 내 기억에, 이 칼럼은 특히 대학교 입시에 낙방한 수험생들을 위해 기고했던 글 같았다. 2월 초였던가? 학생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며, 다시 시작 하라고…나도 다시 시작하여 박사 논문을 끝내었노라고 하면서... 나는 장 교수가 너무 불쌍하여 많이 울었었다.
어제 신문기사의 일부 “장 교수가 엄마에게 마지막 쓴 편지는 단 네 문장, 100자다. 지난달 28일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가기 직전, 병상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사흘 걸려서 썼다고 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또 한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장 교수 언니 되는 내 친구 장 영자씨는 내 고교 (이화 여고) 1년 선배이자, 서강대학교 영문과 1년 선배였고, 재동초등학교를 같이 다녔었다. 내가 서강대학교에 발을 디딘 것도 그 언니 덕분이었다. 그 당시 내게 보낸 편지에 신부님들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썼었는지…그래서 나는 서강대 생이 되었다.
하얀 국화꽃 한 송이 내밀어 장 교수에게 명복을 빈 후 상주들에게 인사하는데, 장교수 막내되는 순복이 내 손을 꼬옥 잡고 부탁한다. “언니, 우리 언니 영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여러 동문들도 그리 하리라 생각하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 빌어본다.
양 문자
첫댓글 감동적이 조사입니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날 듯!
잘 읽었습니다...너무 멋있게 쓰셨어요...그분이 장영자씨 동생 이었군요...
장영자씨는 누구이신가 ? 혹시 물리학과 선배는 아닐련지 ? 그런 이름의 여자선배 한명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 카나다로 이주하셨다는 소식도 들린듯한데...
귀한 소식, 좋은글 고맙습니다.
지금 쯤 추모미사도 끝났겠네요. 장교수님, 이제 육신의 모든 굴레와 고통에서 해방되었으니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지난해 서강 행사에 갔다 먼빛으로 본 장교수, 너무 훌륭한 후배라 가슴 뿌듯했는데, 이리 빨리 하늘나라로 간 뜻은 창조주 그분만이 아시겠지요. 마지막 어머니에게 남긴 글, 가슴에 울립니다.
Oxcal님께서는 아마도 장 명자 선배님, 前 장 면 국무총리 (故人) 따님, 과 약간 혼동이 이으신것 같습니다, 이번 상을 당한 장영자 선배는 영문학과 출신입니다. 이름이 거의 비슷 하지요? 장 영자 선배는 현재 LA에 거주, 문 채령 선배님, 기타 서강 동문들과 모이신다 합니다,
빈소를 다녀오고, 장례미사를 다녀오며 '참, 행복한 삶을 살았구나' 싶었답니다. 순간순간 삶의 절망과 고통을 살기는 했지만 마지막 결산 카드에 올라온 최상급의 등급, '사랑'이었습니다. 동료도, 가족도, 지인들도, 장영희 교수에게 보내는 사랑이 간절하고 지극해, 하느님도 놀라며 마중을 나오시진 않으실까, 시련을 이겨내고 사랑을 남기고 온 당신의 딸을 받아 안고 있으실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겐 너무 애석하고 아깝지요. 그 미소 자체로 희망이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