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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2주일설교 요한복음1:19-34
본문: 요한복음1:19-34
제목: 나는 누구인가?
오늘은 요한복음1:19-34의 말씀을 가지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인가?“
난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난 멋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난 충성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난 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그럴까요?
정말 착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어떤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심하게는 메시아라고도 하고
감람나무라고도 하고
예수라고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누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라고 불러 불러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사람, 누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어떻게 불러준다고 해서 그렇게 될까요?
누가 나를 착하다고 해서 착한 사람입니까?
누가 나를 나쁘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됩니까?
오늘은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누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는 누구라고 불리길 원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며
우리가 누구일지 누구로 살아야 할지를
살펴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1.나는 아니라!
세례 요한은 당시 유명인이었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어쩌다 만나는 암벽 사이에 있는 꿀이나 따서 먹는
생색은 초라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광야로 나왔으며
그 말씀을 따라서 행동하였습니다.
헤롯 왕 조차도 그가 그의 죄를 고발했을 때
함부로 잡아 가두지 못하고 주의 깊게 들었고
그 말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세례요한을 가리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한 일은 빛에 대한 증거였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빛은 아니었지만
빛 되신 예수님을 증언하러 온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세례요한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리스도가 아닌가?
엘리야가 아닌가?
그 선지자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일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고통이나 배고픔이나 억압을
벗어나게 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요한은 메시아처럼 보였고
아니면 마지막 때에 올 엘리야처럼 보였고
아니면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이 누군지 조사하기 위해서
그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지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숨기지 아니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네가 엘리야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묻기를
네가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냐 대답하라고 합니다.
요한 계속해서 나는 아니라고 합니다.
왜 이들은 이렇게 질문을 하였을까요?
그리스도란 소문이 있었기에 그렇게 물었고
아니라고 하니 곧바로 엘리야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말라기서4:5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가장 능력 있었던 엘리야 선지자를 기다렸고
또한 출애굽과 광야에서 인도했던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들만이 지금 당하는 고통과 아픔과 억압에서
건져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소망을 있었기에
세례요한이 행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물었던 것은
나름 성경을 근거로 해서 물었습니다.
그저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아도
단지 침묵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언제나 대답은
‘나는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대답을 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은 답답하였습니다.
그저 아니라는 말만이 아닌
진짜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그 대답을 들어야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경을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가 아니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메시아가 엘리야가 그 선지자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이 아니라고
거듭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 말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서
자신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에 말씀하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누가 말하는 것에 따라 생각합니다.
아니면 내 생각에 따라 정하고 행동합니다.
누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좋은 사람인 줄 알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 나쁜 사람인 줄 압니다.
그렇습니까?
그럴까요?
하지만 그것은 큰 오판을 할 수 있고
틀릴 가능성이 너무나 높습니다.
오직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알려주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아야
내가 누구인 줄 알 수 있고
그것을 따라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도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이고 진실입니다.
2. 세례요한은 누구입니까?
유대에서 보낸 자들의 추궁에
요한이 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자신을 어떤 사람 인격이 아닌 소리라고 합니다.
자신은 단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
오시는 메시아, 그리스도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이는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 예수를 부각 시키려는
의도적으로 취한 어휘로 보입니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왕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말하는 소리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사명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그의 성품을 드러낸 모습입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우선 이 세상을 바로 잡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건축을 하기 전에 헌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새롭게 터를 고르고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위해
그렇게 구부러지고 여러 문제가 있는 그 땅을
바로 잡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왜 세례를 베풀었냐고 합니다.
그리스도도 아니면서 엘리야도 아니면서
그 선지자도 아니면서 세례를 베풀었느냐고 말합니다.
세례는 베푸는 행위는
그들에게 그런 인물만이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왜 세례를 베풀었냐고 말합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자신의 세례는
메시아적 세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베푸시는 분을
다만 알려주기 위해서 수행하는
물의 세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행하는 물의 세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거듭난다는 사실을 알게 하도록
물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수를
그 신비스러운 인물을 “내 뒤에 오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은 선구자였고
먼저 예수보다 이 세상에 온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들리기에도
합당하지 못하다고 고백합니다.
신발끈을 푸는 행위는 노예들이 하는 일이어서
유대인 종들에게 조차도 시킬 수 없는 천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례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있습니다.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직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겸손하게 나타내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해야 할 일은
나를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을 행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이 등장하시다.
그렇게 행동하던 세례요한 앞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자신 앞에 등장하였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는 소리라고 자신의 존재를 고백한
세례요한 앞에 그 주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오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던 그 앞에 주께서 나오심을 보았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세상을 향하여 외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무슨 말일까요?
유대교 개념에서 어린양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 번째는 ‘유월절 양’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할 때 문설주에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집만이 죽음에서 벗어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청중은 예수의 피를 통하여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둘째, ‘대속적 양’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말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그 죄값으로 속죄양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속량 받은 것처럼,
예수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죽어서
그 죄를 대속하는 속죄의 상징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적인 죽음을 당한 유월절 양이기에 예수는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요19:14,29,36)
셋째, ‘유대묵시사상에 나타나는 양’의 개념입니다.
묵시사상에 따르면 세상 마지막 때에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양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말합니다.(계5:6,8)
그래서 예수님은 미래의 궁극적 심판자이며
역사의 주관자의 의미를 갖습니다.
넷째, ‘이사야 후반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 때문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비유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그런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서
우리를 희생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심판하실 왕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례요한은 32절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는 보았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물로 세례를 주는 자신과 다르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성령이 비둘기같이 머무시는 분이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것은 성령 사건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듣는 것이요
두 번째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균형잡힌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만나는 사건과
성령이 임재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오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재하였을 때
제자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진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세례요한은 세상의 평판에 따라서
자신을 알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자신을 알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이
그 어떤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주께서 주신 사명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내 생각이 어떠하든지가 아닌
주의 말씀이 나에게 하라고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이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은혜이며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신발끈이라도 매어 드릴 수 있다면
그것처럼 영광스럽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살아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역사하려면
성령이 임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보혜사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행함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생명력 있는 신앙
균형 잡힌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