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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의료봉사기
대구광역시 의사회, 치과의사회, 한의사회, 약사회, 간호사회,로 구성된
대구지역 5개 의료단체와 대구 시청 관계자등 62명의‘메디시티대구
해외나눔의료봉사단‘은 지난 6월 4일~11일 6박8일간의 일정으로
카자흐스탄 카라간다에서 우리의 우수한 선진의료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약사회에서는 이한길 회장님, 오한희, 조용일 최은숙 부회장
김정희, 조미경 단장 ,양수석 사무국장님 그리고 필자 등 8명이
동참했습니다.
2014년 네팔 카트만두를 시작으로 작년 베트남 빈증성 지역에 이어,
지난 6월에 있었던 해외 의료 나눔 활동의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조각을
되새김질 하면서 필름을 3개월 전으로 돌려봅니다.
문득 돌아보면 어느새 이 만큼 와있나 싶다.
어찌 소유만을 위해 이리도 숨 가쁘게 달려왔는지,,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듯이,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인생은
무엇을 위해 종은 울리었는가?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잊고 살아사는 시간이 더 많이 않은가?
藥師를 만들어준 모교에 대한 빚,,
약국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약사회에 대한 빚,,
현재의 내가 있도록 사랑해준 주변사람들에개,,
무엇보다 세상에 와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사는 삶에 대한 감사는
나의 재능이, 지식이, 나의 손길이 필요한 지구촌 어느 가족을 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떠나는 날까지 빚 가림을 하는 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해외의료 봉사를 떠나는 비용은 봉사자 자부담이지만,
봉사에 필요한 물품과 의약품 대금 등 많은 부분을 ‘메디시티 대구’에서
지원해주는 관계로 우리는 메디시티 대구를 알려 의료 관광을 촉진시키고
우리보다 못한 나라에 순수한 의료봉사를 해야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번 카자흐스탄 봉사가 두 가지를 다 충족시켰던 봉사라 여겨진다
봉사단은 8차례의 사전회의에서 많은 준비의 시간을 가졌으며,
6월 1일에 대구 시약 회관에서 각 단체로부터 수집한 엄청난 양의
수하물을 부치고, 각 단체에서 차출된 6명이 2박 4일간 사전답사까지 했지만,
미지의 나라로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문제가 어디서든 불거지게 된다.
약을 가지고 들어가는 문제부터 그리 녹녹지 않았다.
투약에 필요한 약 중에서 현지에서는 55종만 허락하고 ,
사전조제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우리 약사팀은 긴장하고 있었다.
봉사를 위한 약인데도 관세문제가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들이 있어, 대구 의료관광진흥원에 주무가 전반적인
카자흐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현지에서는 사말이란 여성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번 카자흐스탄 봉사는 인천에서 비행기로 수도인 아스타나로 들어가
1박하고,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카라간다로
여기서 봉사활동을 펼치며 4박을 하게 되고, 다시 아스타나로 버스로
돌아가서는 바로 비행기로 남쪽도시 알마티로 이동하여
아시아나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일정이었다.
내륙도시 카라간다에서
3일의 봉사를 위해 4일간을 이동에 쓰야 하는 것이다.
해외 의료 봉사를 끝내고 혹시 시간이 허락되면 그곳 관광지를 돌아보는
팁을 받게 되는데,이번에는 그곳에서 둘러볼만한 따로 관광계획은 없다는
사전답사팀의 설명이 있었다.
6월 4일(토) 10시 대구 시청 광장에서 출정식을 거행한 다음
리무진을 타고 인천공항까지,,
인천에서 18시 30분 아스타나행 국제선을 타고 7시간을 날아
아스타나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시간 밤 10시 30분,
(한국시간 새벽 1시 30분)
1시간 이상을 기다려 짐을 찾아 나오니
12인승 봉고차 5대와 짐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5대 차가 이제부터 카자흐에서 봉사기간내내 이동할 때 타야 될 차인데
봉사대원들은 각자 배정된 차에 나눠 타고
숙소인 IBIS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를 훌쩍 넘겼다.
밤에 본 아스타나의 첫 인상은
우리가 의료봉사를 떠나오면서 가졌던 예상에서 빗나갔다.
야밤에도 빛나는 루미나리에와 다양한 건축물에 놀라게 된다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나?
새벽에 한국시간으로 깨어나 김정희 미경 두단장과 함께
아침 산책을 나가 1KM 떨어진 이슬람 사원앞까지 다녀온다.
카자흐스탄 국민의 50%이상이 이슬람 신자라서
도시 곳곳에 이슬람 모스크가 눈에 띈다.
오늘은 호텔 조식 후, 캠프를 차릴 카라간다로 이동해서 내일부터
있을 봉사일정에 대비해야 하는 날이다.
아스타나에서 카라간다로 이동하는 도중 시내를 관통하면서
만나게 된 신 행정수도 아스타나의 풍경은 후진국이라 여겼던 우리의
생각에 수정을 하게 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카자흐의 97M 하얀 탑 Baytenek tower,,
높이가 97M인 것은 지난 97년에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이전했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97M를 올린 탑이라 한다..
그 탑이 있는 광장에서 보면 다양한 건축물 숲에 놀라게 된다
제2의 두바이를 꿈꾸듯, 세계 각 나라의 유명한 건축물을 본떠 만들었고
같은 형상의 건축물이 하나도 없이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의 전시장 같다.
원래가 소련령이 었던 도시라 러시아 인이 전도시 인구의 50%이상이라
러시아 인을 다스리기 위해 누르술탄 대통령의 지시로
남쪽 알마티에서 천도하고 건설한 도시인데
90년대 소련붕괴이후, 차츰 러시아인은 줄어들고 지금은 70%이상이
카자흐인이라하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허나 빠른시기에 겉보기에 치중하여 건설한 도시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한다.
겨울에 아스타나가 너무 추워 영하20이하를 기록하는데,
여름엔 모래 쓸고 겨울에 눈쓸고,부실 건물 투성이등 문제가 많다 한다.
2017년 아스타나 엑스포 개최를 앞두고 그것을 알리는 현판과 공사가 도시 곳곳에 진행되고 있다. 아스타나의 발전을 선보일 좋은 기회라 야심차게 준비 하고 있지만 지금 카자흐의 내수부진,원유에 의지하고 있는 경제가 유가 하락,화폐인 탱게화의 가치
하락등으로 경기침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다.
Republic of kazahstan
카자흐스탄은 유랑자,독립인 이란 뜻이다
13c 징기스칸의 후예들의 전통적인 유목민이 이룬 나라이고
북으로 소련과 동쪽에 몽골 남쪽에 우즈베키스탄등에 인접국가이고
서쪽엔 카스피해등 인접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북쪽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면적으로는 9위,남한의 27배의 땅덩이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구는 2001년 통계로 겨우 1700만명이 채 안되는(한국의 수도권 인구와 비슷하다)
나라다.
수도는 아스타나이고 주요도시는 알마티와 카라간다등인데
우리는 이번에 이 3대도시를 다 훓고 지나왔다.
전세계 3600민족중 카자흐스탄에 104개 민족이 살고 있다 한다.
다민족인 만큼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최상류는 러시아가 누리고 ,
주요 인종은 카자흐인 51% 러시아인 32% 우크라이나인 4% 독일인 3%
고려인은 1%가 채 안되지만 우리에겐 카레이스키의 나라로 기억된다.
수십만의 한인들이 1937년 스탈린의 정권하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이 한인을 이용해 간첩으로 쓴다는 우려와
한인수의 증가에 따른 자치요구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면서
중앙아시아의 농업개척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소수민족 분산지배 정책등의 정치적 이유로 화물차와 가축운반 철도로 추운 시베리아로 한 달 여에 걸쳐 횡단하게 되었는데, 인가하나 없는 황량한 황무지..우슈토베란에 수십만의 한인들을 아무런 대책없이 내려놓았고, 집이 없어 언땅을 파서 들어 앉았으며,추위와 긂주림으로 다수가 사망하였다 한다.
카자흐스탄은 1991년 구소련의 소비예트연방에서 독립하여
현재는 공화제의 형태로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북한에 각각 92년 1월에 외교관계 설립하였고,
1990년 대통령이 되면서 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현재가지 36년간 장기집권하고 있는 누르술탄 나자르비예프 대통령은
2007년 개헌으로 종신직을 하게 된다 하는데,,
어지간한 광물은 매장량이 순위 안에 드는 자원부국, 에너지 부국으로,
지하에 매장된 자원은 많지만 갑자기 잘살면 국민 정신이 흐트려 진다고
조금씩 끄집어 내어 국가발전에 쓰고 있다 한다,
어디를 가나 대역사가 진행중인데,
도시는 거대하고 큰 도로가 건설중이지만 우리가 지나가는 로변의
농촌은 마치 우리 70년대를 보는듯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 나라임엔 틀림없다.
아스타나에서 4시간을 달려 카라간다로 들어가는데
달려도 달려도 쨍쨍한 햇살과 푸른 하늘과 파란 초원뿐,,
동영상을 찍으면 파란 초원의 지평선과 하늘뿐인,
사진처럼 한 장면만 계속 연출된다
아마 이곳은 시간이 멈추어 선듯하다
몇 만년전이나 지금이나 아마 이 느낌,이 풍광이었을 것이다.
누가 이땅을 침략하려고 해도 달려도 달려도 끝없는 이 초원을
기마병이라야 침략 했을 것이고, 끝없는 이 초원에서 지겹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이 초원을 굳이 싸우면서까지 점령해야할 이유가 있었겠나등
상상에 나래를 펴가는데, 2시간을 달려 반정도 지점에 있는 어느 휴게소에
잠시 차를 세운다.
6월의 햇살이 엄청 따갑고 하늘은 드 높고 날씨는 너무 쾌청하다.
화장실을 가는데도 한국돈 600원을 받는다.
다시 2시간을 더 달려 카라간다 외곽으로 접어들자 인가가
나타나는데 차창밖에 보이는 농가는 조그만 함석집에 허술하기 짝이 없다.
도시의 그 화려함과 농촌의 빈곤함이 대비가 된다
자원부국의 富가 농민까지 뻗칠려면 시간이 꽤나 걸리겠다 싶다,,
카라간다 시내로 접어들고,카라간다 주립대학 병원에 도착하니
그곳 병원관계자와 우리 봉사대원, 그리고 현지 통역등이 참여하는
환영식을 열어준다. 각 단체의 회장께서도 한마다씩 하는데
인사말을 하시자 통역이 다시 통역을 하니 시간이 꽤나 걸린다
카라간다에 도착해서 각 파트가 자리 잡기까지 진통이 있었다
의료봉사가 좋은 뜻을 가지고 들어 간다해서 현지에서도
무조건 우호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카라간다 주립대학병원에 의사회, 치과의사회,간호사회가 캠프를 차리고,,
경직된 공무원 사회 분위기 탓에, 약국을 같이 못 두게 하여 한의사회와
약사회는 대학병원에서 버스로 30분거리에 있는 SIAM center에다 약국을
차렸다. 이런 돌발 상황에서도 은인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미스 카라간다 출신 사말이란 여성이 경영하는 이 SIAM center 스파에서
3일동안 봉사를 하게 되는데 이 스파 역시 자기 손님을 포기하면서 까지
우리에게 장소를 제공해주는 그야말로 봉사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카라간다에서 4일밤을 보내야 하는데
첫날은 어느 허름한 먼지가 듬북 쌓인 유스호스텔에서 묵고
남은 3일은 좀 나은 시설로 이동하게 된다.
나는 조미경단장과 룸메이트를 하게 된다
늦은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왔는데 白夜현상으로 밤10시가 넘은 시간에도
환하다. 잘려고 누우니 방이 환하길래 커튼을 당기니 그대로 내려앉았다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다가 잠이 들었다.
카라간다 2일째 아침이 밝았다.
비로소 본격적인 의료봉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본국에서 임상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약은 처방하지 못하게 하여
당연 약종류도 규제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극히 제한된 약을 가지고 들어왔고 예제가 안된다 하여 사전조제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조제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 병원과 떨어져 있어
의사선생님과 소통이 안되어 더 긴장하게 된다 .
현지의 의료시스템은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
진료과의 분류체계도 우리 나라와 완전 다르고
완전 의약분업이 시행되어 있고 정착한지 오래지만
의료 수준은 너무 낮아 의사회에서는 진료뿐만 아니라,
그곳 의사들을 상대로 우리 한국의 선진 의료를 보여주는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현지 의사들이 큰 관심과 함께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병원을 이용할려면 만성병 환자들은 2~4주전에 사전 예약 후,
공공의료 서비스를 받는 방식인데 물론 무료라 한다.
그래서인지 약국에서 투약받는 분들은 작년 베트남때와는 완전 다르다.
봉사중 만난 분들은 극빈층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고 중산층 이상인 듯
당당하고 자신의 건강과 투약하는 약에 대한 관심을 크게 드러냈다.
하나 하나 자신의 약에 대한 질문과 심지어 어떤 환자는 약통을
가져오라 해서 유효기간을 확인하는등,,
아마 인터넷 신청으로 예약한 제한된 환자만을 만나서 그렇했을 것이다.
관심은 많았지만 건강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지한 것 같았다.
영어는 전혀 통하지 않고, 카자흐 현지 통역‘미로’란 아가씨가 약국
통역을 맡았다
카자흐 말은 완전 생소해서 통역에 의존해야 해야 해서 느릴 수밖에 없고
밀릴때는 몇 명을 더 조달해와서 진행을 하곤 했다.
우리 약사회 8명과 통역과의 팀웍이 꽤나 유쾌하다.
세분의 아버지(이,오,조)께서 분위기를 잘 이끌어 봉사기간 내내 즐거웠다.
봉사 첫날 오전은 진료센타와 떨어져 있어 다소 소강상태였지만
오후 들면서 환자가 몰려 들어 줄을 세우게 된다.
의자를 가져와 환자를 앉히고 최대한 안락하게 투약을 받도록 한다.
좋은 팀웤에 스파 큰방에 약국을 차려 크게 불편함은 없지만
환자들의 자신의 약에 대한 꼼꼼함에 환자 한분당 시간을 많이 소모하게
되는데 지난 두해 봉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다.
병원에서 진료환자가 3800명을 넘어섰다는데,,30분거리에 약국이 있어
중간에 누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투약한 환자가 3일동안 약 1,200건의
조제와 투약을 시행했으며, 많은 환자들이 상세한 투약내용설명과
복약지도에 많은 고마움과 만족감을 전하기도 했다.
가끔 어눌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고려인(카레이스키)이다.
봉사도중 80대의 한씨 성을 가진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서
어눌한 한국말로,아버지가 전라도 전주사람으로 2차대전때 징병되어
떠돌아 다니다가 이곳에 정착을 했고,,돌아가셨다면서,친척을 찾아달라고
몇시간을 눌러 앉아서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2차대전 당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자 한인들이 적성민족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후방의 노동전선(탄광과 산림벌채등)에 동원되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고려인의 후손은 현재 11만명, 교민도 10만5000명 ,,
풍습은 한민족과 같이 손님접대를 중요시 한다 했다.
현지인이 어색하게 구사하는 한국어는 반갑고 마치 피붙이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들의 한의 역사를 떠올리기에 더 그러했을 것이다.
한의학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이다.
우리가 약국을 차린 시암센타 지하에 한의원을 차렸는데 사전예약자에게만
특혜가 주워져 소문듣고 오신 분들이 진료를 받고 싶어 안달이지만
예상인원을 이미 넘겨 진료가 불가능한게 참 안타까웠다
마지막 봉사를 마치는 날 밤,,사말이 갈라쇼를 개최해줬다.
잠시 사말에 대한 소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34세의 미스카라간다 미인대회 출신인 대단한 여성이다.
발폭이 넒어 사업적 수완 또한 대단하고 그녀가 거느린 사단만으로도
유목민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게 해주고,멋드리진 공연에다
대단한 현지 미인들이 보여주는 패션쇼등 다양한 것을 맛보았다.
이 여인이 메디시티대구에 카자흐인 의료관광을 유치하는지라
대구시에 오면 귀빈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카라간다에서 마지막날,,
아스타나로 들어가는 날인데,도중에 당시 소련의 강제 격리 수용소에 들렀다.
기록에 보면 스탈린 당시,다른 민족 출신 지식인들과 함께 고려인들 또한 수용되어 있었는데 학살 당하고, 격리당한 노동군으로 탄광과 공장에서 후방노동에 투입되었던 기록과 함께, 지하에 남아있는 당시 학살 현장을 보면서 가슴이 찡해옴을 느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로 노벨문학상을 탔던 솔제니친이 한때 이 수용소에
근무한적이 있었던 곳이고, 그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제 왔던길로 다시 아스타나로 들어가서
비행기로 남쪽 도시 알마티로 이동하는 날이다..
알마티에서 다시 아시아나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면 일정은 끝이 나는 것이다,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기전 2시간 정도 시간을 이용해서
알마티 시내를 돌아보며 스치듯 지나왔지만,
오랜 수도였던 도시답게 큰 키의 가로수가 인상적인,
정비가 잘되어 있고 참 아름다운 도시다.
언제 시간이 된다면 한번쯤은 더 방문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만난 유일한 산,,북쪽으로 천산산맥에 만년설이 둘러싸인
도시가 무색하게 날씨는 40도라 하는데 습기가 없어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만했다..
여태껏 했던 식사는 거의 메뉴가 같았지만,
설산을 배경으로,정원에 앉아 하는 식당에서 카자흐에서 마지막 식사가 퍽
인상적이었다.
샐러드가 나오고 고기가 나오고 나중에는
볶음밥이 나오는 메뉴는 어디서든 거의 동일하다.
양고기만 먹고도 충분한데 볶음밥이 큰 접시에 산더미같이 나오지만
아무도 손데지 못한다..대접을 중히 여기 사람들의 예법이
식사에서도 보이나 싶었다
알마티 현지시각 새벽 1시 50분 알마티 발, 인천행 비행기안에서
이륙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응급환자가 발생했으니 의료인 있으시면 나와 달라는 기내 방송을 듣고
새벽시간임에도 바로 일어서시는 선생님들이, 환자를 뒤로 이동시켜 여기서도
진료봉사를 펼쳤다.
의사선생님들은 이럴 때 순간,, 부담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을 포기하면서 부담스러운 인술을 펼치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존경심이 들었다.
환자는 최은숙 부회장 옆자리에 타신분으로,,협심증으로 가슴통증을 호소하고
벌벌떨고 있었다 하는데, 카자흐스탄인 49세인 이 남성은 친구들이 거두어준
돈으로 서울에서 수술받기로 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었고, 살 수 있는
천운을 타고난 것이다.
우리 봉사단원중 의사회 김종서 전회장님과 박원규기획이사 두분이 곁에서
응급처치와 산소공급을 하고 같이 동행했던 통역관이 환자를 안심시키면서
무사히 인천공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후문에 그분은 수술을 잘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며 한국에 대한 특별한 감사를 전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카자흐스탄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인구유입과 인구정책등을 통해 국내인구를 늘려 내수를 늘리는
것이 이곳 산업의 첫 단초가 아닌가 생각해 봤다.
개발이란 미명아래 파괴되지 말로 천혜의 자연을 오래토록 보존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비만과 성인병에 찌들린 국민들의 건강계몽이 우선되어야 하겠다.
젊은 여성은 참 날씬하고 예뻣지만, 육류위주의 식생활로 비만체질로 급변,
중년이 되면 그냥 체형이 무너지고,모두 심혈관질환은 심각한 수준이고
혈압이 혈압계로 잡히지 않을 만큼 심각한 환자도 봉사중에 만났다.
식생활도 문제지만 겨울이 거의 6개월이나 되고,,
자신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컷지만 관리라든가 예방에 관한 인식등,
몸관리에 어쩌할바를 몰랐으며 식생활 개선 예방의학등,
그 부분을 정부차원에서 주도해야 할것이고,,무엇보다 시급한 사항인 것 같았다.
내장기가 초음파로는 지방층 땜에 보이지 않는 환자가 수두룩하다고
내과 선생님께선 하루에 200명쯤의 환자들 초음파를 보셔서 손목이 아프다 하셨고,
치과의는 진료하는 모든 사람들이 충치가 심각하다고 하셨는데,
타락죽에도 설탕을 넣어서 먹을 만큼 단맛과 짠맛에 길들어져 있어
전국민 식생활 개선이 시급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간호사회는 고아원과 학교를 방문하여 건강계몽과 한국의 사랑을
한껏 펼치고 돌아왔다 한다.
재미난 것은 이곳의 남녀 性비가 1:4라 하는데,
결혼할 때는 남자 쪽에서 모든 것을 다해가고 여자 집에 돈을 줘야 하고,
결혼 후에 생일한번 안차려줘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하니 우먼파워 또한
대단한 것 같다.
불과 몇 년새 우리나라 노령인구가 급격히 느는 건 식생활과 건강관리에
관한 많은 관심과 정보를 접하고 무엇보다 의료혜택등,,,
의료보험제도가 한 몫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봉사란 무엇인가?
이번 봉사는 의료가 취약하고 빈곤한 지구촌 사람들게 인술을 펼치고 또한
메디시티홍보와 현지 병원과 경북대 병원이 의료협력 및 의료관광 MOU체결등으로
의료관광을 추진하고 의료관광유치에 더 큰 성과가 있을거란 확신이 드는 의료봉사였다.
메디시티 대구,,2011년에 5000여명의 의료관광으로 시작되어 올해 2만명시대를
열어감은 그동안 대구시의 노력과 함께 ‘메디시티 대구‘의 브랜드를 알리고
위상을 높여주는 의료봉사 또한 큰 역할을 했음이다.
내년에 해외 의료 봉사는 우리 약사회가 주관하는 차례인데, 의료봉사지역 선정과 함께 진행에 많은 부담이 되겠지만,,미지의 세계에 도전이 더 큰 보람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카자흐스탄 의료 봉사후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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