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섞인 아이
안선모
학교는 바로 길 건너편에 있다. 승주는 아빠와 함께 3층 교무실로 올라갔다. 입학 수속을 마치는데도 무척 힘들었다. 아빠와 승주 둘 다 한국어에 서툴렀기 때문이었다.
“5학년 9반으로 배정되었으니까 4층으로 올라가세요.”
중심소학교에는 2반 밖에 없는데 여기는 9반까지 있다고 한다.
긴 복도를 한참 지나 드디어 5학년 9반이라고 쓰인 교실 앞에 도착했다. 노크를 한 후 앞문을 열고 들어가니 앞자리에 앉은 몇몇 아이들이 흘낏 쳐다보았다.
박정임 선생님이 승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빠가 불안한 눈길로 돌아섰다.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박정임 선생님의 말에 승주가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헛기침을 크게 두 번 했다.
“흠흠, 저는… 중국… 헤이룽장성 하르빈에서 온…… 서승주입니다.”
승주의 말투를 듣고 아이들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헤이가 어디야?”
“헤이가 아니고 헤이룽 어쩌구 한 것 같은데?”
“선생님! 하르빈이 어디에 있어요? 우리나라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하르빈? 하얼빈을 말하는 거지?”
박정임 선생님이 승주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알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그 역 말이야. 그곳이 바로 하얼빈이야.”
“아하! 안중근 의사? 책에서 읽었던 것 같아.”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동안 승주는 조금 여유를 찾았다. 교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노란 빛깔의 1인용 책상, 1인용 의자, 그리고 환하게 햇빛이 들이비치는 창가, 그 앞에 나란히 놓인 예쁜 화분들과 넘실대는 녹색 잎들. 도리 조선족 중심소학교와는 느낌이 너무 달랐다.
“얘들아, 승주는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 왔어. 승주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듣기로 하자. 승주야, 저기 맨 뒤 소연이 옆에 앉아라. 1교시 시작되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모르는 거 있으면 아이들에게 물어 보고.”
선생님이 가리킨 맨 뒷자리에 빈 책상과 빈 의자가 한 개 있었다. 승주는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승주는 교무실에서 받아온 교과서와 안내장 몇 장을 꺼내며 물었다.
“오늘은 컴퓨터 과목 없어?”
승주의 말에 여자 아이가 툭 대답했다.
“거기 주간학습안내표 있잖아.”
“주간학습안내표?”
여자아이가 승주가 갖고 온 여러 장의 안내장 속에서 종이 한 장을 찾아냈다.
“이게 주간학습안내표라는 거야. 컴퓨터 과목은 따로 없고 실과시간에 배워.”
승주는 친절한 짝꿍을 만난 것이 고마웠다.
“내 이름은 지소연이야. 하얼빈에서 북경까지는 얼마나 머니?”
“북경? 하얼빈에서 북경을 가려면 하루 종일 기차를 타야할 거야.”
“그렇게나 멀어? 중국이 넓기는 정말 넓은 나라구나.”
승주는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건네주는 소연이가 고마웠다. 소연이와 얘기를 하면서 승주는 학교생활이 재미있을 거라는 예감에 기분이 좋았다.
2교시가 끝나고 중간놀이 시간이 되었다. 중간놀이 시간은 30분 동안 하고 싶은 놀이를 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승주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홍민우야. 우리 반 반장이지. 만나서 반갑다.”
민우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승주는 민우의 손을 잡았다.
“신고식! 신고식!”
반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신고식’을 외쳐댔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승주를 보고 소연이가 말했다.
“너는 우리말이 좀 서투르니까 네가 잘하는 거 하나 보여줘.”
승주는 무얼 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승주 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도 할 게 없으면 중국말이라도 해 봐라. ‘나는 바보다’가 중국말로 뭐냐?”
“동방박사! 그만 해라!”
민우가 남자아이의 목에 장난스럽게 팔을 둘렀다.
“이 녀석은 우리 반 체육부장이야. 이름은 박동방이고, 별명은 동방박사! 동방이가 너한테 장난치는 거야. 그러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장난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난 진심이라고! 저 녀석이 바보같이 굴잖아!”
그 말에 승주는 벌떡 일어나 교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교실 앞에 있는 탁자를 옆으로 치우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승주는 체조 시간에 배운 몇 가지 기술을 보여주었다. 공중돌기와 옆으로 연속 돌기와 텀블링 등이다. 승주가 마지막 텀블링을 끝내자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너 또 잘하는 거 뭐 있어?”
아이들이 앞으로 몰려나와 승주를 둥글게 에워쌌다.
“송화강 겨울수영대회에 나가서 입상한 적이 몇 번 있어.”
“뭐? 송화강은 또 뭐야! 겨울에 강에서 수영을 한다고?”
승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멀찍이 서 있던 남자아이가 입을 쑥 내밀며 말했다.
“쳇, 뻥 치지 마. 네가 뻥을 쳐도 우리가 알게 뭐야?”
“뻥 아니야. 하얼빈에서는 매년 겨울에 송화강 수영대회를 열어.”
그러자 남자아이가 중얼거렸다.
“쳇, 섞인 아이 주제에.”
‘섞인 아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듣는 순간 기분이 안 좋았다.
학교생활은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잘 하지는 못해도 알아듣기는 하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도 잘 도와주는 편이었다. 한국은 중국보다 수업이 늦게 시작되기 때문에 아침에도 여유가 있었다. 또 다른 아이들은 학원을 서너 군데씩 다녔지만 승주는 아무 데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가 끝나고 난 후에도 여유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한국에서의 사업 구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는 또 엄마대로 조선족 사람들을 만나 여러 가지 정보 교환을 하느라 바빴다.
오늘은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실내수영장을 가는 날이다.
“아이고, 이게 무슨 냄새지?”
승주가 코를 싸쥐자 반장 민우가 말했다.
“응?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지?”
“민우야, 난 기절할 지경이야. 이 냄새 때문에.”
승주가 장난스럽게 기절하는 시늉을 하자 민우가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아, 알겠다! 너, 락스 냄새 때문에 그러는 구나.”
“락스가 뭔데?”
승주의 말에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손뼉까지 쳐대며 웃었다.
“락스도 모르냐? 이런 중국 촌뜨기! 소독약이야, 소독약!”
애들이 아무리 놀려대도 승주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때뿐이었다. 놀려대다가도 금세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그래도 네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는 락스 냄새가 훨씬 낫다.”
빈정거리는 소리에 승주가 돌아보니 동방이가 느물거리며 웃고 있었다. 동방이는 사사건건 승주를 걸고 넘어졌다. 지난 번 중간놀이 시간에 승주가 시범으로 보인 체조 때문에 아이들은 승주를 다르게 보기 시작하였다. 아이들 간에는 체육부장을 다시 뽑아야 한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돌고 있을 정도였다.
“동방아, 내가 락스 냄새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래. 우리는 송화강에서 수영을 하거든.”
“우리? 우리가 누군데? 중국 아이들? 그래, 강에서만 수영하는 너 정말 잘났다, 잘 났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너, 나하고 수영 시합해 볼래?”
동방이의 말에 승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합 같은 건 사양할래. 강에서라면 또 몰라도.”
이렇게 말한 게 또 잘못이었다. 동방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난 척하기는! 섞인 아이 주제에.”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잘 생각해 보면 알 텐데. 왜 모른척하지?”
동방이가 느물느물 대며 승주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네 피는 순수한 피가 아니잖아.”
“그게 무슨….”
승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방이를 바라보았다.
“니네 엄마는 중국 한족이고 너는 조선족이니 네가 섞인 아이라는 거지.”
큰소리 내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소연이가 성큼성큼 걸어 동방이 앞에 섰다.
“그렇다면 나도 섞인 아이군. 우리 엄마는 태국에서 태어났거든.”
“그러니까 너도 깝치지 말라고! 섞인 아이 주제에.”
승주는 한 번도 중국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먼먼 조상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에 터를 잡게 된 것이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동방박사, 너는 지금 폭력을 휘두르고 있어.”
민우가 나섰다.
“내가 뭘?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말로 상처를 준다면 그것도 폭력이야. 너 그거 몰랐어?”
동방이는 홍민우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수영장에서 돌아와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나자 아이들은 학원 시간에 늦었다며 모두 뿔뿔이 사라졌다. 승주는 혼자 남아 교실을 청소하기로 했다. 창문을 모두 열고 빗자루로 마룻바닥을 쓸고 있는데 번갯불이 번쩍 했다.
“어, 비가 오려나? 우산도 없는데 큰일 났네. 비 쏟아지기 전에 얼른 청소 마쳐야겠다.”
정신없이 청소를 하고 있어서 누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꺼져!”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교실 뒷문에 마치 유령처럼 동방이가 서 있었다. 동방이가 다시 낮게 소리쳤다.
“꺼져, 네 나라로!”
승주는 앉은 채로 동방이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꺼져, 네 나라 중국으로!”
승주가 벌떡 일어났다. 속에서 이글이글 노여움이 끓어올랐다.
“내 나라는 여기 한국이야!”
“좋아하시네. 한국말도 잘 못하는 게 한국 사람이라고 깝죽대고 있네!”
승주는 동방이를 노려보았다.
“뭘 봐! 이 뙈놈아! 중국으로 꺼지란 말이야!”
뙈놈이라는 소리에 순간 승주는 주먹을 들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바로 그거였다. 그 순간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샘, 얘가 나 때리려고 하는 거 보셨죠?”
동방이의 말에 선생님이 승주에게 물었다.
“진짜 때리려고 했니?”
“예.”
승주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서승주!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
“저, 그게⋯⋯그게⋯⋯.”
무언가 할 말이 있긴 한데 한국말로 잘 표현이 안 되었다. 선생님 뒤편에 있던 동방이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든 폭력은 안 돼! 동방이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해.”
승주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죽어도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네 잘못이 뭔지 모르고 있구나. 그렇다면 뭘 잘못했는지 알 때까지 운동장을 돌아!”
얼음장 같은 냉기가 선생님에게서 쌩 풍겨 나왔다.
승주는 운동장을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뭘 잘못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승주는 돌고 또 돌았다. 번갯불이 다시 번쩍 하더니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 비가 쏟아졌다. 비를 흠뻑 맞으며 승주는 운동장을 돌았다. 눈물이 났다. 꾹꾹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으려고 했는데도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승주는 울면서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
그 사건 이후로 승주는 가슴 속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가 있는 듯 답답했다. 다행인 것은 동방이가 더 이상 승주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승주는 학교공부에 점점 흥미를 느껴 성적이 많이 올랐다. 여러 과목 중에서도 특히 사회가 좋았다. 사회 수업은 모둠별로 주제를 정해 발표하는 수업을 주로 한다. 승주는 정말 운 좋게 민우와 소연이랑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한솔이랑 한 모둠이 되었다.
이번 발표 주제는 ‘독립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주제를 듣자마자 승주는 청산리전투가 떠올랐다.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민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자 자료를 모아서 이번 토요일 12시에 우리 집에 모여서 토론하고 발표 준비하자. 우리 집 알지?”
승주는 집으로 헐레벌떡 돌아와 서랍을 뒤적였다. 예전에 하얼빈 살 때 가끔 보았던 독립운동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자료는 보자기에 잘 싸여 있었다.
저녁이 되자, 웬일로 아빠도 엄마도 일찍 들어왔다. 엄마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가방공장에 잘 다니고 있다고 했다. 가방을 만드는 데는 그다지 말이 필요 없으니까 견딜만하다고 하는 말에 승주는 눈물이 찔끔 나왔다. 중국에서 살았으면 하고 싶은 말 실컷 하고 살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랜만에 세 식구가 모여 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아빠, 사회 시간에 독립운동에 대해 배워요. 그래서 우리 조상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요.”
승주의 말에 아빠가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독립운동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승주가 어쩐 일인가 싶어 그게 신기했다. 그래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승주는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가 남기신 작은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조상들의 업적이 나타난 자료는 꽤 많았다. 재외동포들의 소식을 알려주는 잡지에도 실려 있었고, 대종교 잡지에도 실려 있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대종교를 믿는 분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그 속에는 그 동안 아빠도 못 본 자료가 있었다. 그건 바로 증조할아버지가 쓴 낡은 일기장이었다.
“할아버지 말이 자료들이 모두 불타고 남은 자료가 이것뿐이라고 하더라. 이 일기장은 아빠도 처음 보는 거네. 승주야, 네가 한 번 읽어 봐라. 아빠가 한국말은 더듬더듬 할 줄 알지만 읽고 쓰는 건 어려워서 말이야.”
아빠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승주는 자신 있게 종잇장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읽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자가 군데군데 섞여 있기도 했고 너무나 오래돼서 글자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승주는 실눈을 뜨고 한 자 한 자 어렵게 읽어 내려갔다.
1925년 12월 25일
아들 경섭이 태어났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무거운 침묵만 가득한 우리 집안에 모처럼 화기와 웃음이 피어났다.
1930년 10월
일본군대가 닥친다는 소식에 잠시 몸을 피신하고 돌아와 보니, 온 집안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누님의 딸 금순이는 부엌바닥에 엎어져 있고, 돌도 안 된 둘째아들은 겁에 질려 나동그라져 있고, 어머니는 놈들이 내리친 총탄에 손목이 상해 실신해 있었다. 누님은 놈들에게 잡혀갔다.
읽는 동안 팔다리가 후덜덜 떨려 승주는 몇 번이고 읽기를 멈췄다. 고조할아버지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후손들은 두고두고 일본군의 표적이 되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모둠 아이들과 약속한 토요일이 되었다. 승주는 민우네 집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벌써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우리 모둠은 어떤 주제로 발표를 할까?”
민우의 말에 승주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 발표하고 싶어.”
“그건 너무 알려진 전투 아냐?”
민우의 말에 승주가 보자기에 싸인 자료들을 꺼냈다.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셨대.”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승주를 바라보았다.
“근데 너 그런 얘기 왜 한 번도 안 했어?”
소연이의 말에 승주가 어깨를 쓱 추켜올렸다.
“뭐, 그런 얘기 할 기회도 없었잖아. 이 표창장 좀 봐. 이것도 우리 할아버지가 대통령에게 받은 표창장이야.”
승주가 표창장을 내밀자, 아이들이 신기한 듯 표창장을 바라보았다.
승주는 아빠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청산리 전투가 일어났을 때 고조할아버지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어.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그 부상으로 이듬 해 돌아가셨어. 고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일본군의 보복은 몇 년 동안 지속 되었대. 일본군들은 남은 가족들을 찾아내어 어른이고 아이고 마구잡이로 죽였대.”
아이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당시 조상들이 처절하게 치룬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잘 몰랐어.”
소연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립운동가에 대해선 많이 배우지만, 힘들게 살아온 그 후손들에 대해선 잘 몰랐어.”
민우도 한 마디 했다.
그러자 승주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 말문을 열었다.
“나는 이제부터 진짜 섞인 아이가 되려고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 섞인 아이라니?”
소연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동안 중국아이도 한국아이도 아니었어. 그냥 별 생각 없이 살았어. 한국에는 k-팝과 게임이 좋아서 왔던 거고. 근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섞여 보려고 해.”
승주의 말에 아이들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승주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사실 섞인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지 몰랐어. 그저 피가 섞였다는 혼혈의 의미로만 받아들이니까 기분 나빴던 거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참 좋더라고. 어느 곳에서도 섞이지 못하고 빙빙 돌면 너무 불행한 삶이잖아. 한국과 중국을 섞은 나, 서승주! 중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 자료들을 꼭 찾고 싶어.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랬어.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가 중국에 많이 남아있다고. 조상들의 독립운동뿐 아니라 그 후손들이 겪었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찾아내어 널리 알리고 싶어.”
승주의 말을 듣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쳤다.
“새로운 꿈이 생겼다는 얘기구나! 서승주, 축하해.”
이렇게 말한 사람은 소연이었다.
“그 기념으로 최고로 멋진 발표자료 만들어 보자!”
이렇게 말한 사람은 민우였다.
“독립군의 후손인 승주랑 친구가 되다니……. 이게 꿈은 아니지?”
이렇게 말하면서 한솔이는 제 볼을 꼬집었다.
“아얏!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다.”
한솔이의 말에 승주와 민우, 소연이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끝)
첫댓글 독립운동가 '서일' 후손의 이야기인 듯.
어렵게 사는 후손들에 대해서도 관심 많이 가져주었음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