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꾼과 선녀’는 끝내 비극으로 끝나지만 최소한 그 둘의 지상에서의 삶은 사랑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기꾼과 호구’라는 제목에서는 속이고 속는 야비함과 살벌함과 아둔함이 한데 섞인 희극으로 진행되다가 끝내는 비극으로 끝날 예감이 솔솔 풍길 뿐이다. 사기꾼의 1차 목표는 ‘호구’를 찾는 것, 그리고 호구의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리석음을 이용해 쓸데없는 수요를 창출하고, 탐욕을 이용해 이룰 수 없는 꿈을 찾아 헤매고 하는 것이다.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 <카지노> 시즌2에서 ‘차무식’이 ‘정우삼’을 그런 식으로 패가망신시켰다.
'호구'의 필요충분조건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의 한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나는 <카지노> 시즌3의 예고편이 아닌가, 착시감이 들었다. 「한미 정상 "핵협의그룹 창설" 워싱턴 선언」 「한미 정상 '워싱턴 선언' … 나토급 핵협의체 창설」 「"미 전략핵잠수함 한반도에 정기 전개"」 등등 정상회담 결과를 전하는 국내 주요 언론들이 1면 톱으로 시커멓게 뽑은 제목들을 보면 마치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가 북한의 핵무기 보유이고 지금 당장 북한이 남쪽에 대해 핵 공격을 위협하고 있어서 양국 정상이 긴급히 그 대책을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그럴까?
일부 진보언론, 심지어 양심적인 안보전문가들마저 이번 ‘워싱턴 선언’이 기존 미국의 핵 억제정책의 재탕일 뿐이다, 오히려 한국의 핵(무기) 개발 및 보유, 배치 등이 불가능해졌다며 비판하고 있지만, 문제를 전혀 잘못 본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핵 보유, 그리고 최근의 핵 위협 상황은 모두 미국(그리고 그에 영합한 한국 보수정권)이 그 환경을 만들어냈다. 마치 사기꾼이 외딴집에 불을 질러 놓고 동네사람들에게 소화기를 파는 형국이라고 비유하면 과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핵 억제라는 물건은 우리가 사야 할 물건, 살 필요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 미국이 팔고 싶은 물건들인 것이다. 그것에 ‘확장’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붙여 더 비싼 가격을 붙였을 뿐이다.
북한 핵무기에 대한 억제는 북한이 그것을 쓸 필요가 없도록, 궁극적으로 스스로 포기하도록 이끌어 나아가는 평화적 방법밖에 없다. 북한이 핵무기를 쓰게 된다면, 그건 아무리 미국의 핵 보복이 철저하게 이루어질지라도 한반도의 공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장억제는 공허한 약속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확장억제는 위험을 증폭시키는 미끼 상품
확장억제는 또한 미끼 상품이다. 좁게는 바이든의 재선 전략, 넓게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한국을 동원하려는 수법이다. ‘호구’는 즉시 미 상하원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공격을 강력 규탄한다"며 미 의원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끌어내면서 "우크라이나의 자유 수호·재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미국 조야에 도사린 사기꾼(들)의 의도에 정확히 호응했다. 그리고는 “(양국의) 성공적 협력을 확장해 나가자”고 했다. 대체 뭐가 성공적인 협력인가.
보수언론들이 확정억제를 대서특필할 때 같은 신문들에는 우울한 소식들이 그득했다. 「미 은행 불안에 환율 장중 1340원 당분간 더 간다」 「5조 원어치 팔았는데 3.4조 적자, 충격의 하이닉스」 「빚투 후폭풍 코스피 … 2500 붕괴」. SK하이닉스의 적자는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손실과 합쳐 무려 8조 원에 이른다고 했다. 삼성전자도 반도체에서만 영업손실 4조 6000억 원을 기록한 것이다. 이뿐인가. 러시아에서 버티고 버티던 현대자동차도 드디어 철수하기로 했다는 우울한 뉴스도 나왔다.
이런 뉴스들이 현재화되지도 않은 북한 핵 위협에 대한 확장억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들이다. 우리의 삶에 직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미국의 대 중국 봉쇄전략과 러-우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직간접 피해라는 사실을 귀 밝은 우리 국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국의 전기자동차에 대해서만 보조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으며 반도체 공장에 대해 가혹한 조건을 걸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중국이 미국 마이크론사 제품 수입을 거부할 경우 한국도 중국에 대해 수출하지 말라는 터무니없는 압력도 있다는 뉴스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도 확장억제 못지않게 두 정상의 회담 탁자에 올랐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백악관은 정상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미국 기자들에게 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으며 반도체나 전기자동차 문제는 회담 의제에 오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회담이 끝나고 나서 기자회견장에서야 이런 문제들에 대해 눈에 띌 만한 한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당신(바이든)의 최우선 경제적 순위는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 제조업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제조를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는 당신의 정책은 중국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기업들에게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국내 정치를 위한 중국과의 경쟁에서 핵심 동맹국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까?”
호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춘향전>의 윤 사또
아쉽게도, 아니 분하게도 이 질문은 한국 기자들이 아니라 미국 기자가 했다. 과묵한 한국 기자들을 대신한 미국 기자들의 분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한국을 도청했다는 것에 대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언질이나 약속을 받았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친김에 “혹시 한국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하겠다는 이면 약속을 하지는 않았느냐”는 질문까지 나왔으면 더 좋을 뻔했다.
만찬장에서 나비넥타이를 한 윤 대통령이 화려한 웃음을 지으며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하고, 미 의회에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사기꾼과 호구’가 아니라 윤 사또가 등장하는 ‘춘향전’도 떠올렸다. 금준미주에 취하고 고성방가하는 그 모습에서 ‘만인고’를 걱정하는 모습은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은 잭팟을 터트린 호구 ‘정우삼’이 아니리라. 최소한 언론의 갈채가 쏟아질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