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7 나해 대림3주일
이사61:1-4, 8-11 / 1데살5:16-24 / 요한1:6-8, 19-28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하여
모든 대학들은 자신들의 엠블럼(emblem)을 갖고 있습니다. 문장(紋章)혹은 상징이라고도 부르는 엠블럼은 그 대학의 정체성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가령, 성공회대학교 엠블럼은 둥근 원 안에 M 모양으로 된 균형저울이 있고, 저울하단에는 학교창립년도인 1914가 있으며, 저울상단에는 LUX MUNDI라는 라틴어가 십자가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M은 성공회대학교의 수호천사인 미가엘(Michael)대천사 그리고 성공회대학교가 성 미가엘 신학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균형저울은 성공회의 정신인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있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룩스 문디(LUX MUNDI)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로 “십자가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상의 빛이 되자”라는 기독교 대학의 가치관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로 빛이라는 말은 lux외에도 루멘(lumen)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두 단어 모두 우리말로 번역할 때 ‘빛’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단어가 사용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예컨대, 전구는 빛을 내는 전기 기구입니다. 그래서 전구의 빛 단위를 표시할 때, lumen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전구의 빛을 받는 곳이 어느 정도 밝은지를 표시할 때는 lux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lumen을 빛의 양이라는 뜻으로 광량(光量)으로, lux를 빛이 비추는 대상의 밝기라는 뜻으로 조도(照度)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설명하자면, 태양은 스스로 빛과 열을 내기 때문에 태양빛은 일종의 lume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달빛은 lux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lumen과 lux에 대하여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처음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구원자 신분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회개의 증거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이 그의 신원을 묻자 자신은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아니라고 밝히고 참 그리스도가 곧 오실 거라고 예고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하고 그분의 말씀을 광야에서 미리 외치는 소리라고 증언합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태도와 증언에 대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豫表)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루가 복음 저자는 예수님 탄생 이야기 전에 세례자 요한 탄생 이야기를 미리 서술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그 후 교부들의 복음해설에서도 보여집니다. 3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3)는 요한복음 1장 8절~9절 말씀,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를 해석할 때, 요한은 빛이 아니라 등불, 즉 lumen이 아니라 lux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등불은 켜야 하고 꺼지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켤 필요도 없고 꺼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 빛이시며, 세례자 요한은 그 참 빛을 받아 그것을 세상에 비추는 빛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성공회 대학교 엠블럼에 있는 세상의 빛(lux mundi)이란 의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빛으로 각성되었을 때만이 세상을 향하여 빛이 되는 인재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인재는 자신을 비추어주신 주님의 은총과 그 빛으로 세례 받은 자이기에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진리를 증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참 빛이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성공회대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는 실로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회대학교를 평가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학교 재정상태가 어떤 가, 규모와 운영상태가 어떤 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가 과연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반성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성공회대학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각자와 나아가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는데도 적용됩니다.
그러면 참 빛이시고 그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총과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독서와 복음말씀을 보자면, 우리는 두 단계를 거칩니다. 첫 단계는 질문의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들과 레위지파 그리고 바리사이파들이 보낸 유대인들의 질문이 그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는 거요?”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과 그 행위의 뜻을 묻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커서 신앙을 처음 접할 때,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별 생각없이 지내다 신앙과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때, 오늘 복음에서 들은 유대인들처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또는 성경을 비롯한 신앙서적, 성직자의 설교와 교회의 가르침, 아니면 주변 신도들의 증언과 의미 있는 사건을 통해 대답을 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인 두번째 단계에 들어섭니다. 하나의 길은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진리의 말씀과 참 빛을 외면하거나, 다른 하나의 길은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그 말씀과 빛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독서에서 이 빛을 잘 받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꼭 붙드십시오. 그리고 악한 일은 어떤 종류이든지 멀리하십시오. (1데살 5:16-22)” 이 말씀처럼 우리가 행할 때, 우리는 ‘세상의 빛(lux mundi)’이 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빛이 된다 함은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그 빛을 증언하고 광야에서 그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 영을 내려 주시며. 기름부어주시고, 보내시어,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역시 세례 때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은총과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명을 이행할 때 나의 심령 또는 우리 교회 혹은 내가 속한 사회환경이 광야처럼 너무나 척박해서 엄두를 내지 못할 따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용기가 부족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나약한 우리에게 주님은 시편말씀을 통해 위로와 약속을 주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 (시편 126:5-6)
농부가 새 봄이 오면 저 넓은 논과 밭에 나가서 고생하며 일할 생각에 걱정과 한숨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과정을 겪고 추수한 수확물을 갖고 돌아올 때는 기쁨과 보람이 생기듯이, 내 인생이 참된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것 또한 그러한 인내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참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선언하고 증언한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어려움 가운데서 용기를 잃지 말고 빛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생명의 빛과 구원의 은총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