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26일 목요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스테파노 성인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뽑은 부제이다.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의 하나로 뽑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일뿐 아니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또한 유다인들과 벌인 논쟁에서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사도 6,8) 스테파노는 지혜로운 언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유다인들은 스테파노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결국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함으로써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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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오 10,17-22)
When they hand you over, do not worry about how you are to speak or what you are to say.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가 온갖 표징을 일으키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말로 유다인들과 논쟁하여 이기자 그들은 이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한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평화를 맛보지만, 스테파노를 죽이려는 자들은 화를 참지 못하며 평화를 잃어버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 닥쳐오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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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은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의 다음 날인 오늘 교회의 첫 순교자를 기념한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는 탄생을 경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순교를 기념합니다. 어제는 생명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죽음을 묵상합니다. 어제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분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땅에서 하늘로 가신 분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이처럼 대비되고 대조를 이루는 어제와 오늘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 안에서 두 날을 되새겨 볼 때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곧, 탄생과 순교가, 생명과 죽음이 서로 깊은 연관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두 날 사이에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라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해 봅시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께서 유한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순교입니다. 돌아가시지 않아도 되시는 분이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의 생명을 얻으셨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셨음을 뜻합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어떠합니까? 그는 순교로써 하늘 나라에서 새롭게 탄생하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순교는 신앙 안에서의 새로운 탄생이며, 새 생명입니다. 이처럼 탄생과 순교가, 생명과 죽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탄생 안에서 순교와 죽음을, 스테파노의 순교 안에서 생명과 탄생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탄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의 ‘성탄’, 곧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힘을 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스테파노
-양승국신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교회 전례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 대축일 바로 다음날 돌에 맞아 참혹하게 순교한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이나 십자가를 멀리하거나 외면하는 교회가 아니라 아주 긴밀한 관계,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스테파노의 삶과 죽음은 어찌 그리도 예수님의 생애와 흡사한지 모릅니다. 전승에 따르면 스테파노는 현재 예루살렘 동쪽 성벽의 북쪽 끝에 있는 성문 밖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 성문은 스테파노 성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스테파노는 신성모독이란 죄명으로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합니다. 굵직굵직한 돌들을 고스란히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파노는 십자가상 예수님과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무지막지한 적대자들은 무죄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도 모자라 극심한 고통 중에 신음 중이던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도 해도 너무한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들고 있던 돌을 하나하나 던질 때 마다 조금도 피하지 않고 맞으며 죽어가던 스테파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고발당한 이유, 다시 말해서 신성모독죄에 걸린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적대자들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조리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 유명한 설교, 길고도 논리정연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스테파노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예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도 확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죽음이나 권세, 적대자들의 횡포 앞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리고 당당히 맞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수도회 입회하기 전에 직장생활을 좀 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한국 순교자 시성식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주례로 여의도에서 개최되었고,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 인파 속에 저도 들어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웃기는데 그때 당시 여의도 시성식을 마치고 제가 살던 거제도로 돌아가는 길에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순교영성으로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는 기회만 닿으면 순교해야지 하면서 계속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순교할 기회는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순교를 하려고 했지만 시대가 저를 받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꼭 피를 흘려야만 순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지금 이 시대 하느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순교는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가 아니라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는 백색순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순교자들의 후예들입니다. 우리들의 피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토록 큰 은총을 입은 우리 순교자들의 후예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더 이상 신유박해나 기해박해가 없는 오늘 날의 이 시대, 우리 선조들이 지니셨던 그 놀라운 순교정신,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서 실천할까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너무나 간단하더라구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기도하는 일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정말 용서하기 힘든 그 인간, 정말 꼴보기 싫은 그 인간을 다시 한 번 용서하고 포용하는 일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 라고 외치며 최선을 다해서 사는 일입니다. ‘앞으로의 1년을 내 생애 가장 멋진 1년으로 장식하겠다.’고 다짐하며 불꽃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이란 것, 멋진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호화찬란하다거나 특별하지가 않습니다. 때로 지루하고 때로 따분하고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엄청나게 구립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우리들의 삶입니다.
순교영성을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도 활짝 웃으면서, 기쁜 얼굴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순교는 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자는 자신의 순교를 통해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게 됩니다. 인간이 ‘하느님화’되는 것이 순교입니다.
현대의 순교자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오늘날 순교란 순간순간 죽고 순간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죽은 사람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합니까?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모욕을 줘도 침묵합니다. 멸시를 당해도 침묵합니다. 그저 하느님 자비와 은총만을 바랄 뿐입니다.
< 고통 없는 증거 없다 >
-전삼용신부-
‘연탄길 2’에 ‘청소부 선생님’이란 제목의 사연입니다.
한 학생이 교실에서 적지 않은 돈을 잃어버렸다. 모든 학생들이 과학실험실로 이동했다가 돌아왔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선생님은 수업 후 반 학생들을 남게 했다. 그리고 백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남의 돈을 훔치는 일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한다면 더 부끄러운 일이고 평생 동안 자신을 부끄럽게 할지 모릅니다. 없어진 돈은 선생님이 대신 채워 놓을 테니 여러분 중 혹시 돈을 훔친 사람이 있다면 이 종이에 ‘다시는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적고 진실로 뉘우치기 바랍니다. 물론 이름은 적지 않아도 좋습니다.”
한참 후 나눠줬던 종이를 걷어 훑어보던 선생님이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오늘 청소당번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오늘부터 청소는 선생님 혼자 하겠습니다. 뉘우칠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은 나를 찾아오던지 내 책상위에 쪽지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그 날부터 먼지 뽀얀 교실을 혼자 청소하시기 시작했다. 무거운 책상과 의자들을 힘겹게 나르는 선생님 모습을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 안타깝게 바라봤다. 몇 명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도와주려 했지만 선생님은 웃으며 아이들을 밖으로 내 보냈다.
선생님의 청소가 열흘이 넘게 계속된 어느 날 선생님이 청소를 마치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복도에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 까칠한 얼굴을 하고 울고 있었다.
“선생님 .... 잘못했습니다.”
선생님은 울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울고 있는 아이를 선생님은 말없이 안아 주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기쁘고 행복한 날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따르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축일입니다.
‘왜 기뻐해야 할 성탄 팔부축제 내 첫 날부터 한 순교자의 죽음을 묵상해야 하는가?’
그러나 하느님께는 기쁨과 슬픔, 탄생과 죽음, 자비와 정의, 빛과 어둠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있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죽음은 기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콘을 그리는 분들은 아기 예수님을 죽은 사람을 쌓는 수의로 쌓여있게 그렸습니다. 삼왕이 선택한 몰약이나 추운 겨울 말구유에 누워있는 모습은 생명보다는 죽음을 더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태어남만이 아닌 죽음과 연결 짓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테파노의 죽음도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선상에서 보아야합니다. 정작 우리가 슬퍼해야 할 대상은 순교한 스테파노가 아니라 그를 돌로 때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셔야 했고 스테파노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순교 없는 증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굳게 믿는 이유는 그분이 나에게 해 주신 희생 때문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희생이 없다면 말로만 사랑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증거는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에서도 선생님이 혼자서 교실을 청소하는 희생이 없었다면 아이가 선생님의 사랑을 저렇게 가슴깊이 느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교구청에 들어오고 한 가지 좋은 것은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휴일과 토요일, 주일엔 일이 없습니다. 본당의 삶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내다보니 여전히 삶이 바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본당에 있을 때보다 게을러져서 늦게 일어나고 낮잠도 자고 드라마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이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 게을러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시간도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제는 사제입니다. 사제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무언가 더 참아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싶은데 똑같이 살아간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힘을 주시고 있음을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증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멸시를 감수하는 것입니다. 참아낼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고통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저도 내일부터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어쩌면 작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순교의 시작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며칠 전 저는 감기몸살로 무척이나 앓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운동을 충실하게 했었기 때문에 감기 따위는 제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연말 계속된 강의, 성탄 판공, 방송출연, 예비신학생 입시 준비, 서품식 준비 등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감기 몸살을 얻게 되었네요. 온 몸을 누가 몽둥이로 때리는 것 같고, 춥고, 또 머리가 아파서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를 더욱 더 힘들게 했던 것은 막힌 코였습니다. 코로 숨 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지요.
사실 평소에는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누가 “지금부터 10분 동안 숨을 쉬어야지.”라고 생각하고 숨을 쉽니까? 아니면 “지금 10번 내쉬고, 10번 들이마셔야지.”라면서 숨을 쉬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까? 아닙니다. 숨을 쉬는 행동은 나도 모르게 나를 위해 내 몸이 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나의 몸만을 봐도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기적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준은 늘 세상에 있습니다. 많은 재물을 얻어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기적이라는 말을 합니다. 병원에서도 고치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환자가 완치되어야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야지만 기적이고, 반대로 남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시기심이 발동해서 왜 하느님은 차별을 하시냐고 원망을 합니다.
이렇게 내 기준이 세상에 있으면 절대로 기적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의 기준이 오로지 주님께 맞추어 있는 사람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으며, 기적을 통해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기준이 주님께 맞추어 있는 사람은 곧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러한 사람만이 세상의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주님을 향해 나아가며 날마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러한 한 사람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부제입니다. 유다인들의 거짓 진술로 돌에 맞아 순교하는 그 순간에도 성인은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라면서 주님만을 바라보았고 주님께 철저히 의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스테파노의 이름 뜻처럼 하늘의 왕관, 면류관을 차지하는 놀라운 기적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자주 고통과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 순간 내 자신은 과연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혹시 불평불만으로 주님을 더욱 더 멀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스테파노 성인처럼 주님께 더욱 더 매달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았던지요? 기적을 체험하고 싶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체험은 주님께 향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쌩텍쥐페리).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1회전 KO패>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그리스도교가 빠르게 확장되어가면서 사도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의 연장이었습니다. 가는 곳 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외쳤으며,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도들의 하루 일과는 잘 나가는 연예인 못지않은 바쁜 스케줄로 꽉 차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연스럽게 복음 선포의 보조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 가운데 자질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여겨보았고 동역자로 발탁했습니다. 선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 3가지는 ‘신앙심이 깊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또한 지혜로움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테파노입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가입한 스테파노는 예수님께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의 복음에 깊이 심취하고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젊음과 열정, 혈기왕성함을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 제2의 예수 그리스도화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그 어떤 사도 못지않은 열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사람들은 스테파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 그리고 탁월한 능력,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으로 충만한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사도들 못지않게 마치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불치병자들을 치유하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변이 대단했던 스테파노는 논리정연하고도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테파노의 말씀과 행적에 감탄하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스테파노의 대단한 모습에 유다인들의 심기는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큰 위기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대 ‘말빨’ 세기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로부터 교묘한 변증법도 배워 익혔습니다. 율법학교에서 갈고 닦은 율법과 전통에 관한 지식도 대단했습니다. 그밖에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설교 기법, 대화법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판정패도 아니고 1회전 KO패였습니다. 워낙 탁월한 언변을 갖춘 데다 지혜롭지,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사람들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논리가 딸리는 사람들, 기초가 덜 된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억지요, 고집이요, 폭력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들이 선택한 것은 불법이요 권모술수였습니다. 화가 단단히 난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해서 유다지도층 인사들에게 가서 스테파노가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거짓 증언을 하게 합니다. 그 결과 스테파노는 의회 법정 앞으로 끌려갑니다.
이미 분위기는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과도 같은 각본으로 인해 스테파노의 목에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죽음의 올가미가 걸린 것입니다. 잔인하고 무고한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스테파노는 직감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 앞에서 스테파노가 보여준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였지만 단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 유명하고 통쾌한 ‘유다 의회 앞 스테파노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의 설교는 차분하고 논리정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정확하게 상기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역사의 정점에 서 계심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 끝까지 하느님의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특히 법정에 둘러 서 있던 대사제와 의회 의원들, 당신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당신들, 하는 스테파노의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의회 의원들은 이를 갈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서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법정에서의 그 절박한 순간, 그리고 온 몸에 돌을 맞으며 죽어가던 순간에도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 찼던 스테파노는 마음의 평정을 조금도 잃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 앞으로도 논쟁을 벌이기 위해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그때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지니고 있었던 당당함입니다. 황당하고 어불성설인 그들의 논리에 맞서기 위한 논리정연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안용태 신부-
사제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뜻을 나의 강론으로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그러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요즘 와서 느끼는 것은, 나는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좋은 강론이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분은 많아도 실제로 삶이 변하는 교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의 능력은 적어도 제게는 다른 방법으로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 부제의 긴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업적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선포되었지만 군중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설교를 기억하기보다 그분의 순교를 기억합니다. 여기에서 저는 한 가지 저를 위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는 말보다 더욱 강력한 전파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은 복음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헌신이라고. 그리고 그런 헌신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다시금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 내놓고 사는 사람인가. 다시 꺾인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나 걸어야 하겠습니다.
순교는 죽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사는 것
성 스테파노는 예수님 때문에 죽음을 당한 우리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이십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다 이길 수 없자 화를 냅니다. 그를 끌어내어 돌을 던져 죽입니다. 성탄의 기쁨도 잠시이고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아무리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셔도, 나에게는 과연 스테파노 성인과 같은 용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모여 남의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용기가 없어 방관하는 우리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옳은 말이나 행동이란 확신이 들어도 망설이게 되는 우리입니다. 그러기에 순교라는 말 앞에는 더욱 자신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나라를 위해 살아왔고 가족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왔던 이유이고 목적이기에 그들은 목숨 걸 수 있습니다. 결국 순교는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위해 죽는 사람은 결국 그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순교로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었던 성 스테파노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힘을 빼고 성령으로
-김찬선신부-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의 독서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와 적대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는데 말로 대적할 수 없으니 적대자들은 힘을 사용합니다. 스테파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을 하는데 적대자들은 힘, 그것도 폭력을 사용하고 끝내는 스테파노를 죽입니다.
유교에서는 才勝德하지 말라고 합니다. 재능은 많은데 덕이 없으면 그 재능을 천박하게 또는 잘 못 사용하고 심지어는 나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가능한지 모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力勝德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덕이 없는 사람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을 남용하게 될 겁니다. 폭력배에게 칼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힘밖에 없는 사람은 힘밖에 쓸 수 있는 것이 없고, 말이나 지혜로 당해낼 수 없으면 힘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이에 비해 덕인은 힘을 뺍니다. 힘을 빼고 겸손, 사랑, 지혜, 용기, 중용 등의 덕을 채웁니다. 그 덕으로 사람을 사귀고,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룹니다.
이에 비해 스테파노와 같은 참 신앙인은 덕에서마저도 힘을 뺍니다. 덕을 쌓는다든지, 積善을 한다든지 그런 노력마저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덕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덕을 이루려 하고, 내가 적선을 하려 할 때 나의 힘이 들어가고,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힘마저 뺄 때 성령께서 완전히 나를 차지하시어 내 안의 그 성령께서 성령의 지혜로 말씀하실 겁니다.
돌던지기
- 김혜림 수녀-
2009년 한 해를 보내면서 사회적으로 또 교회 안에서 느끼는 공통된 상실감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이 아닐까 싶다. 살아 계셨다면 오늘 그분의 축일을 맞아 얼마나 많은 기도를 또 받으셨을까 상상해 보며 세상에 사시는 동안 견디셔야 했던 무거운 많은 짐을 놓으시고 주님 안에서 평화롭게 쉬고 계시리라 믿는 마음이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이 성경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바로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이었던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어서다. 초보 상담자였을 때 한 아이를 맡은 적이 있다. 가출과 훔치기가 심하여 우리 센터에 입소하여 상담치료를 받던 열한 살 남자 아이였는데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다른 아이가 내 가까이 오는 것을 못 견뎌 했고 내 손은 언제나 그 아이 차지였다. 어느새 아이는 내면의 힘이 부쩍 생겼고 나쁜 행동에 대한 충동성도 많이 조절되는 듯 보였다. 동시에 나는 그 아이의 새어머니의 어려움과 고통을 들으면서 지지자의 역할에도 애를 썼다. 그런데 아이가 크게 변하여 퇴소를 결정할 즈음에 어머니한테서 받은 전화는 나의 희망을 조각내기에 충분했다. ‘아이가 좋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이 그 어머니 말의 요지였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올 그 아이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없다.’ 는 의미였는데 나는 당시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나의 신원을 망각하고 그 어머니에게 화까지 내는 커다란 실수를 범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게 가차 없이 돌을 던져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했다. 마치 상담자가 아닌 그 아이의 친엄마가 된 양 아이의 변화를 보지 못하니 마음이 완고한 것이라고 그분을 질타했던 것이다.
나는 그 이후 오랜 시간 마음 아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던졌던 돌에 피 흘렸던 그 아이의 어머니를 자주 떠올리며 오히려 이런 나를 만나주는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예전의 그 어머니에게 준 상처를 대신 갚을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제 조카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궁금한 것이 많다는 이유였지요. 그래서 식사를 하며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갔는데, 계산을 담당하는 직원이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따님이신가 봐요.”
저는 강력하게 부인했지요.
“아뇨. 제 조카에요.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요?”
왜냐하면 제 조카가 고3 올라가거든요. 따라서 딸이냐고 묻는다는 것은 그만큼 제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것이겠지요.
제 스스로는 항상 젊다는 생각이었는데, 남들의 눈에는 아니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거울을 쳐다보니 정말 얼굴에 주름이 많습니다. 배도 중년의 아저씨들처럼 많이 나왔습니다. 괜히 팍 늙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곧바로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라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사실 걱정은 스스로를 옭아맬 뿐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거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열 살 때 걱정이 없었습니까? 그때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스무 살 때에도 역시 걱정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서른 살 때에도 걱정은 나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려도 걱정은 분명히 내 곁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걱정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흔적조차 없이 말이지요.
걱정에 집착할수록 스스로를 옭아매는 강도는 더욱 더 세집니다. 하지만 이 걱정에 무심할수록 그 강도는 허술해집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다가오는 걱정에 대해서 어떻게 임해야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어떤 위협의 순간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많은 순교 성인 성녀들께는 힘을 얻어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은 오늘에도 계속됩니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에 집착하지 않으며, 항상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 바로 현대의 순교자로 주님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걱정과 함께 할 때 주님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따라서 걱정이란 내 삶의 바깥 자리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의 한가운데에는 주님을 모셔야 하니까요. 그래야 현대의 순교자로 주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신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그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 놓았다(호러스 부쉬엘).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기
- 손영순 수녀-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박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가끔 외짝 교우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남편이 기분 좋으면 성모상이 거실로 나왔다가 기분이 나쁜 듯하면 다시 장롱 속으로 들어가길 수없이 반복하면서 혼자 신앙생활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기도와 신앙 안에서 가정을 충실하게 지키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했더니 드디어 남편이 먼저 신앙을 갖겠다고 하더랍니다. 어떻게 신앙을 권면할까, 언제 성당에 가자고 말을 붙여볼까 걱정했는데 하느님이 알아서 이끌어주시더라는 겁니다. 행동이 그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지혜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킨 스테파노도 오직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고 순교한 스테파노의 신앙을 따라 우리 또한 말이나 걱정으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보여야 할 것입니다. 죽음으로써 신앙을 나타내고 증거했던 성인들과 순교한 조상들의 삶을 본받아 우리도 자신 있게 신앙인임을 증거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에서 땅을 보다
-김찬선신부-
오늘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는 충만한 사람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이고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입니다.
이렇게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기에 싸움을 걸어도 보통의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습니다. 약한 사람이 힘센 사람을 당해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는 스테파노가 사람들과 싸움을 하고 이기는 얘기가 나오지만 나중에는 아예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하늘을 보고,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속하는 사람들은 논쟁에서 진 것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팔팔 뛰고 끝까지 싸우자고 덤비는데 성령 충만한 스테파노는 이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콩 밭에 있지 않고 이미 천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더 미칠 노릇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스테파노를 보며 치를 떨고 있습니다. 싸움을 걸어도 상대해주지 않고 이길 수도 없으니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 충만하여 영으로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는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을 육신으로도 도와주는 것일 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자주 세상 것들과 시비하는 저를 보며 성찰합니다. 세상 것들과 싸운다는 것은 세상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싸우더라도 야곱처럼 하느님과 싸우고 스테파노처럼 하늘을 보고 세상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프리지아 왕국의 고디어스 왕은 신전에 매듭을 하나 묶어놓고 이것을 푸는 자가 아시아를 정복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기원전 334년에 이르기까지 이 매듭을 푼 사람은 없었지요. 이 해에 알렉산더 대왕은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로 가는 길에 고디어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칼에 매듭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은 일거에 그리스도보다 50배가 큰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에서 풀을 베던 소년이 뱀에게 발등을 물렸어요. 고통을 참지 못하던 아이는 먼 곳의 병원까지 가다가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망설이지 않고 낫으로 발을 잘랐답니다. 얼마 후 소년은 이를 악물고 병원까지 가 치료를 받았어요. 발 하나를 잃었지만 그로 인해 목숨을 지켜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해 드립니다. 한 청년이 웨이터를 뽑는 레스토랑에 찾아가 면접을 보았습니다. 사장이 물었지요.
“손님이 아주 많을 때 자네가 들고 있는 접시가 떨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이 물음에 사장을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한 지원자는 없었는데, 한 청년만이 이렇게 대답해서 고용되었다고 합니다.
“제 주위의 테이블에 모두 손님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접시가 제 몸 쪽으로 떨어지게 하겠습니다.”
이 세 사람 모두 망설이지 않고 중요한 것은 과감하게 선택하고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보면서, 주님을 선택하는 것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위해서 다른 모든 잡다한 것들을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바로 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오늘 우리들이 기념하는 스테파노 성인이십니다. 그는 유다인들과의 논쟁에서 절대로 굴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의 비위를 조금만 맞췄더라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타협하지 않습니다. 즉, 주님을 선택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약속해주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이 세상 사람들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주님을 선택하겠습니까?
주님께 무조건 믿고 맡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주님을 선택하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도 그리 멀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장점을 찾고, 자신에게서는 결점을 찾아라.(벤저민 프랭클린)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양승국신부-
<타는 불속에서도 웃음 짓는>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 마르코,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 때의 일입니다. 가르포라는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화형이 집행되고 있었습니다. 집행인들은 그를 번쩍 들어 타는 불속에 집어던졌습니다.
둘러서 있던 모든 사람들, 너무나 끔찍한 장면 앞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가르포는 타는 불속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특별한 모습이어서 집행인 가운데 하나가 웃고 있는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그래서 웃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스테파노 성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마다 손에 큼지막한 돌 하나씩 들고 달려온 살기등등한 수많은 적대자들 앞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러서있던 적대자들은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던진 돌에 한번 맞아본 적 있으십니까? 어린 시절, 다른 동네 아이들과 ‘살벌한’ 눈싸움을 하던 중, 큼지막한 돌에 맞아 잠깐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돌에 피가 철철 흐르고,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스테파노에게 날아온 돌은 한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수십 개, 수백 개였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형방법입니다. 하나 하나 맞을 때 마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과 신음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무수한 돌팔매질을 온몸을 향하는 와중에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가 바쳤던 위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바치셨던 예수님 기도와 거의 흡사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100% 복사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적대자들의 끔찍한 돌팔매로 인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가운데서도 스테파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어이없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스테파노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어떻게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그처럼 당당하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단 말입니까?
순교자들의 당당한 죽음, 그 이면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을 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뵙듯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풍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의 탄생
-심종민 신부-
우리의 옛말에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추석이 얼마나 기쁜 날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한국인이 설날이나 추석을 축제 중의 축제로 꼽는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탄과 부활이 이에 견줄 만한 축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쁜 날을 우리는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울려퍼지는 캐롤과 장식을 보면 기쁜 날인 것 같기는 한데 그때 뿐입니다. 신앙은 단순하게 보여지는 그 표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직접 살아야만 합니다. 그때뿐인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변치 않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성모님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낳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탄생되는 그곳에는 언제나 그분이 계십니다. 나의 사랑이 매순간 이 세상에 또 하나의 예수님을 탄생시킬 때 오늘만이 아닌 1년 열두 달을 성탄절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죽으라고!
- 황지원 신부-
살인범도 아닌데 죽으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사제나 수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상대의 잘못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그 사람 역시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에 너무도 연약하고 힘든 사람일 때, 부족한 수도자로서 어떻게 위로하기도 쉽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 신자를 위로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격려해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죽어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탄 대축일 다음날인 오늘 우리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치고 결국 죽음까지 그분과 함께한 스테파노 성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입니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기쁘게 십자가를 질’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날 때마다 기쁘게 지기보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고와 자존심이 자꾸만 ‘나’를 살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 하느님이 머무실 수 있을까? 이러다 남만 죽이는 정말 살인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놀라운 교환 -김찬선신부-
성탄 바로 다음 날 교회는 왜 성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낼까? 잔칫집에서 초상집 얘기를 하는 격이 아닙니까?
어제는 성탄 낮 미사를 봉헌하고 글을 쓰고 있는데 제가 늘 틀어놓는 KBS FM의 국악 방송에서 성탄절이라고 박 동진 명창의 예수 전 판소리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탄절에 예수 수난 대목을 들려주는 것이지 뭡니까?. 이 사람들이 뭘 몰라서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도 들고 사려가 깊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오늘 스테파노 축일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하니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지상 탄생과 스테파노의 천상 탄생 예수님께서 지상 탄생하심으로 스테파노가 천상 탄생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가 하늘에 탄생하고 시소의 한 쪽이 내려올 때 시소의 다른 쪽이 오르듯이 예수님의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지상과 천상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낮추심과 올라감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죽으심과 살아남의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합니다.
예수님을 일으킨 사람
-장재봉신부-
스테파노!
그가 설파한 믿음의 고백을 읽어보셨지요?(사도 7장)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인의 첫 순교자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특히 오늘 독서의 뒷부분에 있는
그의 기도,
오늘의 영성체송으로 채택된 구절은 유명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7,60)라고 기도하며
죽어갔던 그의 마지막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사랑의 도약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더욱이
확실한 하느님의 말씀과
분명한 하느님의 뜻으로 답변했던 스테파노의 증언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는 사실에는
야속한 마음마저 생깁니다.
+++
그 시간
스테파노에게 부어진 사랑과 용서의 힘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는 일도
물론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힘은
세상을 억누르는 일이 아니며
세상에서 고통을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말이 통하지 않을 때에도
같이 화를 내고 맞장 뜨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그 날
스테파노가 당했던
그만큼의 고난과 아픔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오직 그분의 방법으로 악에 대처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도리어 세상의 미움을 받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목숨을 건 투신임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살아갈 힘도 그분께서 주시고
죽을 수 있는 용기도 그분께서 주실 것을 믿으니
어떠한 걱정도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배포입니다.
+++
어머니는 처녀 적부터^^
아들을 낳으면 ‘스테파노’라고 세례를 받게 하고 싶더랍니다.
첫아들인 제가 뽑힌 것이지요.
어릴 적에는
좀 더 멋지게 살았던 성인이 아니라
하필이면 ‘돌 맞아 죽은’ 성인으로 세례명을 택해 주신 일이
탐탁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이름 값’이나 해 낼 수 있을지
버겁고
과분할 따름입니다.
모든 분들의 기도 덕분에
그리고 주님의 은총 덕분에
오늘 제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스테파노 성인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정통하고
하느님의 뜻에 민감한
사제로 살게 해 주실 것을 감히 청합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유명한 음악가인 헨델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헨델이 길을 가다가 가발을 잃어버려서 난처해하고 있을 때, 이발소에서 일하는 어느 아가씨가 그 가발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헨델은 이발소에 찾아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지요. 사랑이 점점 커져서 이제 이 여인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느껴졌을 때, 헨델은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헨델이 그 이발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헨델이 온 것을 미처 몰랐지요. 이발하러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던 그녀는 무심코 이렇게 말해요.
“머리를 말게 거기에 있는 악보 몇 장만 주시겠어요?”
헨델이 그 악보를 보니, 자신이 얼마 전에 주었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친필 악보였습니다. 그리고 헨델은 조용히 그 이발관을 나왔다고 하네요.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도 있지요. 즉, 아무리 정성이 담긴 선물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이 느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그러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 수 있는데 꼭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는 복음 삼덕을 선물로 주셨지요. 그런데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는 것은 물론 늘 감사의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분명히 괜찮은 상황에서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지요.
오늘은 우리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라고 불리는 성 스테파노 축일입니다. 독서에도 나와 있듯이,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훨씬 더 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어쩌면 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순간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혹시 앞선 헨델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귀한 선물을 무가치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대의 순교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각종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끝까지 증거할 수 있는 사람, 주님의 선물이 얼마나 좋은지를 항상 드러내는 사람, 그래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이웃에게도 그 선물을 나누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과연 순교자가 될 수 있을까요?
빠다킹신부
걱정하지 말자
-조명연 신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달나라와 서울 중에서 어디가 더 멀까요?”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서울이 훨씬 멀어요”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이 “아니, 왜 서울이 더 멀지요?” 하고 물어보니, 그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달이야 빤히 보이지만 서울은 조금도 안 보이잖아요.”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살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아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외적인 사물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앙인으로 이 세상에 살기가 여러모로 힘이 든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 이후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부제 순교자 축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순교자의 마지막 모습은 독서를 통해서 자세히 볼 수 있지요. 그 역시 죽음과 공포의 순간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굳은 믿음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걱정을 몰아내고 주님을 끝까지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걱정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요?
순교의 삶
-허영엽 신부-
사도행전에 따르면 스테파노는 최초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부제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그리스도인들, 특히 과부들에게 매일 음식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았다. 스테파노는 믿음과 성령이 가득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스테파노는 성경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유다교와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과 모세에 대해서 불경스런 말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재판소에 소환되었다. 그는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유다인들이 성령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유다교를 비판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스테파노 부제의 공격에 분노한 유다인들은 극도로 흥분해서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쳤다.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라고 하신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 때로는 부모나 형제로부터 배척을 받고,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반대와 박해를 당할 수도 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결코 쉽지 않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박해와 고통을 각오한 삶인 것이다. 왜 신앙인은 박해를 당하는가? 세속적인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는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다. 죄와 어둠의 세력은 빛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어둠의 행위가 빛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세상 안에서 신앙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 자체가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순교자는 본래 증인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앙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길이며 동시에 순교의 길이다.
사랑과 용서로 죽음을 맞이한 스테파노 - 경규봉 신부 -
영원하신 평화의 군왕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심을 경축한 다음 날에 용감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탄생함을 경축하는데, 그분이 곧 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이다. 스테파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고 예루살렘에 살던 중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여 열심한 생활을 하였으며,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였다.
초대 교회 교우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며 가진 것을 내어놓고 필요한 만큼 나누어가지는 공동생활을 했다. 그들은 가진 것을 공유하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심전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는데, 그리스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식량을 골고루 배급받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이에 사도들은 복음전파에 전념하기 위하여 식량 분배와 같은 여러 가지 사무를 담당하도록 부제 일곱 명을 뽑았다. 사도들은 부제들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며 직책을 주었는데, 그 첫 자리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칭송 받는 스테파노가 차지하였다. 부제들은 교회내의 여러 가지 사무를 담당하는 한편, 교우들을 위하여 설교를 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주로 그리스 계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회당이 있었다. 스테파노는 가끔 그 회당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논쟁을 했는데, 그들은 지혜와 성령을 받아 말하는 스테파노를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스테파노를 모함하여 의회에 고발하였다. 스테파노는 그들의 모함을 받고 의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스테파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이로 인하여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유대인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고 죽게 되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 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세상을 떠났다(사도 7장).
겉으로 볼 때 그의 죽음은 교회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승리였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 성인의 말씀처럼 그의 죽음은 씨앗이 되어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고,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찬 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여삐 여기시고 들어주시어 신도들이 더욱 늘어나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을 박해하던 사울이 주님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가 되었다. 사울은 스테파노의 순교에 가담한 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으나 주님을 체험한 후 바울로로 개명하였고, 열렬한 신앙에 불타올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이를 구원시켰으며, 마침내는 성 스테파노처럼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모함하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조금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주님처럼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불타올라 자신을 돌로 치며 죽이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그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실히 실천한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사랑은 모든 선의 근본이며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이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누구나 그릇된 길을 걷지 아니한다. 사랑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테파노 순교자처럼 사랑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최성철 신부-
여러분,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인이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그가 하느님의 품에 있다고 공언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 감화 받아 신앙인들이 배우고 본받아 살아가기를 교회가 권고하는 그런 사람을 성인이라 합니다.
스테파노의 천상탄일인 오늘 우리는 그가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모습을 그려봅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군중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인의 인품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은혜를 얻을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복음은 마태오 복음 10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증언하는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며 그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주시고 가르쳐주셔서 올바르게 말하게 될 것이며 제자들이 예수님 당신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이며 교회의 첫 부제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는 그리스 말을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다인으로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지혜와 성령의 은혜가 남달라 유다인들도 논쟁에서 스테파노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능력은 유다인들이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한 사람이라는 누명을 씌어 돌로 쳐 죽이려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 성인은 예수님의 처형과정과 비슷한 모습으로 순교를 합니다. 성인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하는 마지막 기도(사도 7,59-60)를 올리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순교합니다. 이로써 스테파노 성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른 순교자 반열의 가장 첫 자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고난의 길을 걷도록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의 길을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스테파노 성인의 모범을 따라 용기를 내어 신앙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 성인의 삶에서 스승 예수의 모범에 따른 용서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 대하여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하고 외칩니다.
용서는 신적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한없는 용서의 사랑을 묵상해 보는 기회를 가져봅시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 사랑의 빛은 어두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우리 자신의 죄스러움을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이끄신다고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 앞에서는 그 누구도 죄인이 아닐 수 없다고 봅니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다섯 종류로 구분하시면서, 그 중에서 특별히 네 종류가 생명을 부여하는 눈물로써 회심의 여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첫째로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받게 될 지옥불의 두려움에서 흘리는 공포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 눈물은 아무런 영성적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둘째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아픔에서 오는 눈물로써 회개의 눈물이라 부릅니다. 인간 영혼이 죄와 인간 조건의 비참함을 의식할 때 자기중심적인 영혼의 상태가 그 내부로부터 찟겨 지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영혼은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 있지만 회심은 시작됩니다.
셋째로는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감동되어 흐르는 감사의 눈물이 있습니다.
넷째는 깨끗한 마음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의해 얻게 되는 영적 깨달음이 가져오는 눈물로써 조명의 눈물입니다. 희망과 감사가 함께 뒤섞인 양심의 가책은 지성을 비추어 느낌과 충동의 혼란이 점차적으로 생명의 강한 흐름으로 변형되어 순수한 사랑의 헌신으로 이끕니다. 이로써 영혼은 겸손함 속에서 성장과 자기 인식의 진리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갈망하는 영혼은 이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그분을 따르게 되어, 비록 이기적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영혼의 완전성과 성스러움을 열망하게 됩니다.
다섯째는 지복의 눈물로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가져오는 일치의 눈물입니다. 사랑스러운 영혼은 이제 하느님께 집중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간적 사랑과 경험을 넘어서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 단계의 눈물은 사랑이 가져온 궁극적 완성의 열매로서 마음의 기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눈물입니다. 인간의 죄스러움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이면 죄로 인해 응어리진 마음의 상처는 서서히 녹아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스러움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 앞에서 죄인으로서 회개의 눈물뿐 아니라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깊이 감사드리는 눈물을 흘리기를 원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분께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내어드려 그분을 본받는 조명과 일치의 눈물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주제를 두고 우리는 우리가 하는 용서와 우리가 받는 용서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용서에 우리를 내어맡기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필시 실패하지 않고 신앙의 여정을 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그 당당함, 그 거칠 것 없음>
뭔가 전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 서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참으로 부담스런 일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내게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봅니다.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입니다. 때로 이야기가 꼬이거나, 청중들의 반응이 시원찮을 때는 죽을 맛입니다.
특히 청중들이 전문가 집단이라면 더욱 괴롭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 한 인물, 한 자리씩 하는 사람들 앞에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욱 부담스런 일입니다.
순교직전 스테파노는 몇몇 유다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게 됩니다. 스테파노는 당대 유다 사회 안에서 최고 지식인 집단인 유다 최고 의회 앞에 서게 됩니다. 법정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 스테파노는 그 위압적인 분위기에 기가 죽을 만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당시 한 인물씩 하던 원로들과 대사제들, 율법학자들이 즐비했습니다.
최고의회 의원들, 그들은 말로 벌어먹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련한 말솜씨, 논리정연하고 말솜씨로 피고인들을 세차게 몰아붙이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 스테파노는 전혀 주눅 들지 않습니다. 겁을 먹기는커녕 당당합니다. 냉정합니다.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도 빼먹지 않고 또박또박 다합니다.
무슨 이유로 스테파노는 그리도 당당할 수 있었을까요? 당당함,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강렬한 체험이 배경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늘 스테파노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스테파노가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자신 안에 머물고 계셨던 스테파노였기에, 하느님과 하나였던 스테파노였기에 최고 의회 앞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적대자들 앞에서도 거칠 것 없었습니다.
스테파노가 법정에 나타나자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그에게 쏠렸습니다. 몇 사람이 나서서 스테파노를 고소합니다. 스테파노가 모세의 율법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고, 순진한 백성들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이윽고 대사제가 나서서 스테파노에게 묻습니다.
“이런 일들이 사실인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테파노는 법정 앞에서 그 ‘당당하기로 유명한’ 설교, 또한 ‘길어서 유명한’ 설교를 시작합니다.
설교 말미에 이르러 스테파노는 마침내 유다 최고 의회를 정면으로 공격합니다. 스테파노는 유다 최고의회 의원들을 향해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완고한 사람들’이라며 몰아붙입니다. 스테파노는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끌려온 피고인이었으나, 용감하게도 자신을 심판하는 법정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회의 정곡을 찌르는 말 한 마디를 던집니다.
“목덜미가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합니다. 당신들은 의인의 배반자가 되고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천사들이 반포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분노에 사무친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지 이까지 부드득 부드득 갑니다. 그 순간 스테파노는 유다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말을 또 한마디 던집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냅니다. 돌을 던집니다.
무수한 돌 세례를 맞으며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스테파노는 또 다른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스테파노의 삶과 죽음이 그리도 예수님과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스테파노는 영광스럽게도 예수님께서 고발당하셨던 바로 그 법정에 섰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강렬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적대자들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고, 사형언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스테파노 역시 예수님처럼 불멸의 하느님 아버지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방
- 민경철 신부-
어떤 유명한 테니스 선수에게 질문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어떤 공격을 받아치기가 가장 어렵습니까?” 사람들은 강력한 서브나 스매시 혹은 다운 더 라인 패싱 샷, 이 정도를 기대했는데 “제일 마지막 한 방이요”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방만 받아 넘기면 이기는데 이를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비단 테니스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군인들의 행군 시 낙오병은 중간 지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숨이 턱밑에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풀리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지만 잘 버텨냅니다. 조금만 더 참아내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종착점을 확인한 그 순간, 마지막을 넘기지 못하고 퍼져버리거든요. 순교자들도 수많은 위협과 고초 앞에서 잘 견뎌왔는데 마지막 순간이 제일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의 고통이 이전에 받은 것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없는 미소한 것이었을지라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는 주님의 말씀. 우리의 힘만으로 견디어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지막 한 방에 우리를 감싸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긴 말씀이지요. 힘이 나는군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박용식 신부-
무술이 뛰어난 스승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스승은 무술은 뛰어났지만 성질이 고약해서 무술과 관련도 없는 갖가지 노동이나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제자들을 심하게 괴롭혔다. 훈련은 힘들었고 모욕적인 대우를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러자 제자들은 한두 명씩 무술 배우기를 포기하고 스승을 떠났고 단 한 명만 남았다. 마침내 그 제자는 스승의 무술을 모두 배워 스승 못지않은 고수가 되었다. 고된 훈련과 험난한 길을 끝까지 참고 견딘 제자는 무술의 고수가 되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본당에서 야외 미사나 각종 행사를 할 때 항상 벌어지는 현상이 있다. 시작할 때는 신자들이 많지만 끝날 때는 몇 명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신자들을 행사에 끝까지 참석시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폐회식 때 행운권 추첨을 한다든가, 끝까지 남는 신자들에게만 기념품을 주는 방법이다. 예비신자 교리를 시작할 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지만 세례를 받는 예비자는 그리 많지 않다. 악이 판을 치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듯하고, 사랑이 어리석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 완전한 하느님 나라를 누릴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스테파노- 우물에 빠진 당나귀
-류해욱신부-
당나라 때의 일이랍니다. 어느 농부에게 짐을 부리는 등의 여러 가지 일을 시키기 위해 집에서 기르는 당나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만 발을 헛디뎌서 빈 우물에 빠졌답니다. 우물이 너무 깊어 농부는 슬프게 울부짖는 당나귀를 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제 당나귀도 늙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고, 마침 물은 말라 소용없고 너무 깊어서 위험한 우물도 파묻으려고 했던 터라 농부는 안타까웠지만 당나귀를 단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우물을 흙으로 메우기로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물을 파묻기 위해 모두 각자 삽을 가져와서는 흙으로 우물을 메워갔답니다. 자기 머리 위로 흙을 붓자,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줄 알고 더욱 더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웬일인지 당나귀가 울음을 멈추고 잠잠해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자기 위에서 떨어지는 흙더미를 털고 바닥에 떨어뜨려 편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발밑에 조금씩 흙이 쌓이게 되고, 당나귀는 그 흙더미를 타고 점점 높이 올라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나귀는 자기를 묻으려는 흙을 이용해 무사히 그 우물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이지요. 사람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온갖 욕설과 비난과 모함과 오욕의 흙이 오히려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남이 흙을 던질 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이 더 성장하고 비상할 수 있는 디딤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곤경의 우물에 빠진 것처럼 느낀다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모든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탄 바로 다음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맞아 죽음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에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죽음을 내포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섭리로 느껴집니다. 그 죽음은 또한 부활을 포함하고 있으니 참으로 오묘한 신비이지요. 마치 당나귀에게 던진 흙이 당나귀를 빈 우물에서 올라오게 했듯이 스테파노에게 던진 돌이 그를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는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고, 자기가 본 광경을 향해 곧장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바로 적대자들이 던진 돌멩이를 딛고 하늘나라로 오른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지요.
논쟁으로는 은총과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회당의 사람들은 화가 치밀어 이를 갈며 그를 돌로 칩니다. 육신의 생명은 죽여도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들은 자기들이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자기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때로 우리도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 돌을 들려고 할 때, 내가 돌을 던지려는 그 사람이 스테파노는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에 화가 치밀 때, 그가 오히려 은총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데 다만 나와 생각과 사고가 다른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돌을 던지면서 오히려 우리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약한 인간의 모습이지요. 한편 누군가가 우리에게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우리는 또한 스테파노의 모습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비난과 모욕의 돌을 던질 때, 대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스테파노처럼 다만 그것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시도록 기도하는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묵묵히 받아들임 안에서 우리도 높이 비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당나귀가 흙을 밟고 올라 온 것처럼, 스테파노가 돌을 받고 하늘나라로 오른 것처럼.
때로 죽어야 사는 것, 그것이 인생임을 오늘 스테파노에게서 배웁니다
- 김정용 신부-
본당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 형제님이 주일 아침에 부부피정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길이었는데 부주의로 하마터면 다른 차와 충돌할 뻔했다고 합니다. 놀라 경황이 없었지만 충돌하지 않아 다행이구나 싶어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상대방 젊은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온갖 듣기 거북한 소리를 한참 동안 늘어놓더랍니다. 그분은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굽히며 연신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 젊은이가 계속 욕설을 해 내심 불쾌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이 형제님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피정에 참여하고 싶어 죄송하다는 말 외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 사람도 겸연쩍었던지 더는 계속하지 않고 오히려 죄송하다며 서로 기분좋게 헤어졌답니다. 그는 이 얘기를 피정이 다 끝난 후 나눔 시간에 피정에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피정이 그 때문에 더욱 기뻤노라고.
언뜻 들으면 사소한 이야기 같지만 제겐 매우 가슴 벅찬 일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상과 세상살이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증거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더욱이 그분의 인내가 그리스도 때문이었으니 과연 위대한 신앙 증거가 틀림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곤경에 처하거나 죽기보다는 나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정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가급적 불리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나는 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습니다.
스테파노는 그리스도 때문에 뭇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더 나아가 부당한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뒷전으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에게도 탓을 돌리지 않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는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마저 껴안게 됐지만 ‘나 때문에’라는 논리에서 죽고 비로소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구원의 품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마태 10,22)
말과 말씀 - 설명(說明)과 해석(解釋)
-박동진 신부-
말과 말씀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말은 아무래도 쉽고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고, 말씀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빈 말도 있고 저잣거리 말도 있으며, 지껄임이나 에두른 말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말씀이라고 하면, 무언가 ‘쓸 수 있는 말’, ‘쓸모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잣거리 외침 정도나 지껄임 정도의 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순간에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도록’ 하라는 것도,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설명(說明)은 말하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고, 해석(解釋)은 듣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설명의 설(說)이 ‘말을 달리한다’는 뜻풀이를 가지기에, ‘쉽게 말해서’, ‘달리 말해서’ 등으로 쓰겠지만, 어느 경우에는 쉽게 말하려던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달리 말하는 것이 더 꼬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에게 애써 말하는 설명(說明)이 아니라, 순교라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했고, 말씀은 적중하여 많은 이들에게 올바로 해석(解釋)되었습니다.
-김옥수 신부-
오늘은 우리 교회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 축일입니다 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스테파노 성인은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헤가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교회 봉사자로 뽑혀 사도들이 맡긴 봉사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뿐만 아니라 복음말씀을 증언하다 목숨을 받쳐 첫 순교자의 영광에 올랐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냄으로써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직분, 즉 교회의 봉사자에 대해 묵상하고 싶습니다.
오늘 독서의 앞부분을 보면 ‘여러분 가운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봉사자로 뽑자고 의견을 모은 사도들은 신심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테파노를 교회 봉사자로 뽑았습니다. 이는 교회 봉사자의 자질을 알려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1 . 교회 불림 받은 사람, 봉사자란? 신자들 가운데 평판도 좋아야겟고 또한 신심이 두터운, 즉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혹시나 교회 봉사자로 있는 교우들은 스스로가 이러한지 자신을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교회 봉사자로 뽑는 분들의 눈도 이래야하겠고 또한 뽑힌 이들은 적어도 이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할 것입니다. 성 스테판노는 ‘신망이 두터웠다’고 합니다. ‘신망이 두텁다’란 뜻은 ‘그리스도로 무장된 모습’을 뜻합니다. 또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2. 봉사자로 일하면 가끔은 욕을 얻어먹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의회원들은 스데파노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사람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곤 스테파노를 끌어 내고는 돌로 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교회에 봉사하다보면 뜻밖에도 성직자 수도자로부터 칭찬은 고사하고 꾸중을 듣거나 신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한 수 더해서 갖가지 모함이나 수모를 당하여 신앙생활마저도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을 잡지 않으면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 걷잡을 수 없는 혼동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5장에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 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고 하였습니다.
3. 봉사는 남을 향하기 때문에(외향적) 숨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보고 누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결과가 나옵니다. - 사람마다 다 판단 기준이 다릅니다.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기 판단 능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말에 너무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특히 교회의 봉사는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유는 자기는 안하면서 남이 잘하기 때문이며 또한 성직자 수도자로부터 사랑받는 걸 보면 자기도 받고 싶은데 받질 못해서이기도 합니다. 욕을 얻어먹는다 싶으면 이렇게 판단해 봄은 어떻겠습니까? 봉사의 탈을 쓰고 자기 일을 했다면 자기 욕이 될거고 하느님을 위한 봉사를 했다면 그러면 그 욕은 하느님께 한 욕일 것입니다.
스테파노처럼 힘들수록, 돌을 맞을수록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들어야합니다. - 하느님만이 올바르게 평가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4.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봉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힘을 얻습니까? 사도 바오로가 필립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2장을 보면 2,13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사도행전엔 3,6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하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무슨 말을 해야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다 알려주시겠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내 편인데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분을 믿고 그분께서 내 편으로 도와주신다는데...
봉사자에게 로마서의 말씀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로마 16,17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남들을 분열시키고 죄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로마 2,14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5. 또한 기도하는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로마 8,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특히 자기를 힘들게하는 사람들, 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성 스테파노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기도해 주었습니다. 또 자신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지 생각하고 시작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하느님께서 좋게 평가하시도록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올 한해도 묵묵히 봉사하신 형제 자매 여러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답니다. 내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더 많이 봉사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화이팅
언제나 구원으로 이어지는 증언
-홍성만 신부-
어제 주님의 성탄 대 축일을 지낸 교회가, 오늘은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 축일을 기념합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묵상 중에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림 시기를 거쳐 내 안에 주님이 탄생하셨다면 이제는 주님을 증언할 사명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 안에 탄생하신 주님은 나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의 행위로나 또는 불의에 대한 항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 어느 때, 그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주님에 대한 증거는 늘 요구됩니다.
오늘 복음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줍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또,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증언을 할 때 늘 명심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의지하고 맡기는 그 안에 성령의 인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른 증언, 때로는 인간적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억하면 이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끝까지 참을 수 있습니다.
~ 성경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증언은 언제나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구원의 표징은 담담함, 위로, 평화 등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도 내 안에 탄생하신 주님을 증언하기에, 평화와 위로, 그리고 담담함이 나를 지배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
하느님 성령의 사역(使役)
-박상대신부-
어제 주님 성탄대축일과 함께 약 20일간의 성탄시기가 시작되었다. 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지침(32-38항)을 보면, 성탄시기는 12월 24일 제1저녁기도로 시작하여 주님 공현대축일(원칙적으로는 1월 6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낸다) 다음에 오는 주일, 즉 주님 세례축일까지로 정하고 있다. 성탄대축일은 부활대축일과 마찬가지로 한 주간의 고정된 "팔일축제"로 거행되는데 팔일축제는 1월1일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대축일로 마감된다. 성탄팔일축제들은 이 기간에 함께 기념되는 성인들의 축일로 말미암아 그 본 뜻이 다소 퇴색되긴 하지만, 미사 중에 낭송되는 성탄감사송과 8일 동안 노래하는 대영광송이 성탄의 고유의미를 살려준다.
성탄팔일축제의 둘째 날인 오늘은 그리스도 교회공동체의 첫 순교자로 알려진 스테파노 부제의 축일이다. 스테파노의 순교에 관한 보도는 루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잘 실려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곱 부제들 중 하나로서(6,5), 성령으로 가득 차 신망이 두텁고 지혜와 용기로 충만하였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을 가득히 받아 부제로서 공동체의 살림을 꾸려 가는 일 외에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들과 굉장한 기적들을 행하였다.(6,8) "자유인의 회당"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그리스계 유다인들을 무참히 퇴치한 대가로 의회에 끌려가 그 앞에서 놀라운 설교(7,2-53)를 펼친다. 설교를 들은 의회원들은 이를 갈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마침내 스테파노를 처형하기에 이른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테파노가 외쳤던 말을 들어보자.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7,56)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7,60) 이렇게 스테파노의 죽음은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순교의 표본이 되었다. 그는 말과 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던 것이다.
마태오복음에서 파견설교(10장)의 절정을 이루는 "박해를 각오하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빈말이 아니라는 실감이 든다. 뿐만 아니라 순교 직전에 스테파노가 외쳤던 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직전에 하셨던 언명(言明)과 비슷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예수께서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고 박해하던 사울이 그랬듯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신자를 박해하면 곧 예수를 박해하는 것이다.(사도 9,5) 순교자의 영혼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때가 되면 해야 할 말을 모두 일러주시기 때문이다.(19절) 예수님의 성탄 주변의 모든 일들도 그랬다. 마리아는 하느님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잉태하였고, 엘리사벳과 즈가리야도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 스테파노 부제를 시작으로 열두 사도들과 우리 그리스도교의 모든 순교자들도 성령의 빛으로 말과 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마태 10,17-22)
-유 광수신부-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은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 축일이다. 스테파노 본명을 가지신 모든 분들을 축하하며 본명 성인처럼 순교의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나 때문에" 즉 예수님 때문에 받는 축복도 많고 기쁨도 크지만 또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도 많고 또 해야할 일도 많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삶의 방법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일지라도 반드시 증언할 것이 있고 해야할 말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말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성령 즉 아버지의 영이 일러 주시는 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 앞에 끌려 나가 모욕을 받는다든지 어떤 손해를 입는다든지 아니면 불이익을 당하게 될 때 무슨 말을 하게 되는가?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될까? 아니면 기쁘다는 말을 하게 될까? 대개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되거나 피해를 입게 되면 우리 마음에서 쉽게 나오는 말은 결코 고운 말이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욕이나 맞고소 또는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에서 나오는 악랄한 말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 까를 생각하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험담을 늘어 놓게 되기 쉽다. 우선 분노로 상대방에게 결코 복음 적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며 좋은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할 것이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게 되고 갈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누군가가 자기 비위를 거스리거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게 되면 즉시 말 다툼을 하거나 원수까지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로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이 아니다. 그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3-14)라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또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할 때 그 때에 할 말은 내가 만들어 내는 말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데 평소에 이것이 잘 안된다. 왜 그럴까? 평소에 복음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생활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하고 저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맘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는 사람이요,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쉽게 내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 쉽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욕도 하게 되고 심하면 싸움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잘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에 더욱 기도를 해야한다. 기도를 하면서 자기 감정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할려고 하던 것을 절제하고 예수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는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거기에 적합한 해답을 찾고 그리고 나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복음을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이다. 어떤 특별한 때에만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기도하고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생활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복음에 어떻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은 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더라도 무슨 말을 할까 어떻게 말할까 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러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러주시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보지 않고 듣지 않는데 어떻게 성령께서 일러 주실 말을 듣겠는가?
성인들이 또는 순교자들이 박해 때에도 꿋꿋하게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삶이 늘 기도하면서 말씀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마태 13,5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평소에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가 자신도 모르게 그 때 그 때마다 꼭 필요한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이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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