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전라남도 금전산과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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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20:45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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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산과 낙안읍성
낙안읍성의 뒤편 금전산(金錢山) 중턱에 자리한 금둔사(金芚寺)의 금강암(金剛庵)은 마치 여염집 같다. 금강암은 백제 위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승주향리지(昇州鄕里誌)』에 따르면 위덕왕 30년(583)에 금둔사가 창건되었고 그 후 의상대사가 금강암, 문주암 등 30여 개의 암자를 가진 큰 절로 중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의 금강암은 송광사에 딸린 자그마한 암자일 뿐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잠시 쉬고 의상대라고 이름 붙여진 바위 위로 올라선다. 의상대의 동쪽 맞은편에는 원효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서대, 동대라고 부른다. 또 이곳에는 입석대(立石臺)와 참선하는 스님 형상의 참선대, 두꺼비바위, 개바위 등의 기암괴석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김극기가 시에서 “절은 높고 높은 데 서 있으니 어느 해에 경치 골라 지었던가. 깊이 가니 기이한 지경 끝까지 가고 깨끗이 앉았으니 번거로운 마음 씻어지네. 좋은 차(茶)는 눈(雪)을 따라서 삽삽(颯颯)하게 사람을 스치네”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무엇보다 빼어난 것은 눈 아래 펼쳐진 낙안벌판일 것이다.
고려 때부터 ‘즐거울 락(樂)’, ‘편안할 안(安)’ 자를 써서 낙안군이라 불렀던 낙안은 현재 순천시 낙안면이다. 『낙안읍성지(樂安邑城誌)』에 기록된 대로, 낙토민안(樂土民安)이 이곳에서 유래하였다는 말이 맞을 만큼 주변 산들에 에워싸인 오래도록 살 만한 곳으로 평온함이 느껴지는 벌판이다. 낙안의 진산으로 성의 북쪽에 위치한 금전산의 옛 이름은 쇠산이었으나 백여 년 전에야 금전산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한자의 뜻풀이로 보면 금으로 된 돈산이다. 또한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금전산의 산세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금전산 북쪽의 옥녀봉 동쪽 줄기에 오봉산과 제석산이 있고 서쪽에는 백마산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다. 풀어 말하면 옥녀가 장군에게 투구와 떡을 주려고 화장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형상이다.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듯 평촌리 마을 앞에 있는 평촌못은 옥녀의 거울에 해당하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낙안에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미인들이 많이 났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문신 이석형은 “낙안은 복잡한 고을이다. 동쪽으로 개운산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금오산이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북쪽에는 금전산이 웅거하고 있다. 땅은 넓고 백성은 많이 살며 한 지방이 평평하게 뻗어 있어 남방의 형승지로는 이곳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다른 많은 성들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에 자리한 것과 달리 충청도의 해미읍성과 낙안읍성은 마치 마을의 한 부분과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높이 4미터에 둘레가 1,384미터, 긴네모꼴로 쌓은 이 성은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에 쌓았다고 하지만,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1626년에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은 단지 성을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큼직한 자연석으로 쌓아서 돌과 돌 사이에 틈은 보이지만 오늘날까지도 끊어진 데 없이 견고하기만 하다.
낙안읍성 © 유철상
낙안읍성 안에는 1658년에 세운 대성전, 명륜당, 낙안향교 등이 잘 남아 있고,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가옥 아홉 채와 수백 년 된 늙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채 오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낙안읍성 안에는 1658년에 세운 대성전, 명륜당, 낙안향교 등이 잘 남아 있고, 민속자료로 지정된 전통 가옥 아홉 채와 수백 년 된 늙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운 채 오랜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그러나 매년 10월에 열리는 낙안읍성의 음식 축제와 관광 개발로 인해 민박을 포함한 각양각색의 상권이 형성되어 옛날의 고즈넉한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고창의 모양성이나 해미읍성과 달리 낙안읍성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터로 영위되다 보니 죽은 성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옛 성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로 존재한다.
낙안읍성에 있던 빙허루(憑虛樓)를 두고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손순효는 다음과 같은 기문을 남겼다.
대개 누각은 비교해 말하면 곧 마음이니, 누각은 몸이 거처하는 곳이요,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누각이 비었으면 능히 만 가지 경치를 용납할 것이요, 마음이 비었으면 능히 여러 가지 착한 것을 용납할 것이다. 옛사람의 시에, 마음이 대(竹)와 함께 비었다 하였는데, 나 또한 이르기를 “마음이 누각과 함께 비었다” 하노라. 물건은 비록 다를지라도 그 뜻은 한가지다.
이 누각에 앉으면 큰 멧부리는 북쪽을 누르고 푸른 바다는 남쪽에 면하며 무성한 숲과 긴 대가 좌우로 서로 푸르고 연기 낀 멧부리와 안개 어린 섬이 멀고 가깝게 서로 바라다보여, 봄이면 화창하고 가을이면 맑고 여름이면 비 오는 경치 좋고 겨울이면 눈 오는 경치 좋다. 한두 사람 동지와 더불어 누각에 앉아 옛일과 지금 일을 얘기하고 웃으면서 건곤을 쳐다보기도 하고 굽어보기도 한다.
밝은 달은 하늘 복판에 이르고 맑은 바람이 물 위에 불 때 아이를 불러 술을 내오라 해서 달을 향해 묻고 휘파람 불면 호호(浩浩)하고 양양(洋洋)해서 마치 허공에 의지하고 바람을 타 티끌 밖에 떠서 노는 것 같으니, 저 부귀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나, 빈천이 나를 궁하게 하는 것이나, 옳으니 그르니 헐뜯고 칭찬하는 것이 또 제 어찌 내 가슴속에 끼어들랴. 그러나 한낱 빈 것이 한결같은 불만 알고 그 마땅히 빌 것과 마땅히 비지 않을 것을 알지 못하면 옳지 못하다.
대개 비었으면서 찬 것처럼 하면 이는 스스로 찬(자만) 것이요, 비어서 남에게 받으면 이는 낮으면서도 남이 넘지 못할 것이니, 맹자의 이른바 ‘천지 사이에 가득 찼다’는 말과 자사(子思)의 이른 바 ‘높다랗게 하늘에 닿았다’는 것이 모두 하나의 빈 데서 나오는 것이니라.
누각에 올라서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와 마음의 변천을 노래한 손순효의 글이 전하는 낙안을 두고 김영유는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긴 대는 흐늘흐늘 주막을 감추어 빽빽하고
맑은 내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각(角) 부는 소리 멀리 조수 소리와 합쳐 웅장하고
아지랑이 기운 까마득히 바다 기운을 연해 뜨네.
낙안읍성에서 순천으로 나와 17번 국도를 따라가면 여수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여수는 동남쪽으로 처음은 60리, 끝은 100리인데, 본래 여수현(麗水縣)이다”라고 실려 있는 여수 돌산대교를 지난 끝자락에 향일암(向日庵)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전산과 낙안읍성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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