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81]‘복숭아농원’ 세 자매를 위한 덕담德談
나의 생활졸문에 종종 등장하는 꾀복쟁이 친구는 딸이 셋이다. 게다가 그 아래로 아들이 둘이니, 요즘말로 다둥이가족이다. 친엄마를 일찍 여읜 그 딸들이 차례차례 ‘자기 임자’를 만나 시집을 갔다. 딸이 없는 나는 언제나 그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는 복숭아 600여주를 길러 농사를 짓는 ‘대농大農’이다. 지난해에도 1만5천여상자를 가락시장에 납품해 3억여원의 소득을 올렸다던가. 이것저것 빼도 절반은 남지 않을까. 겨우내 거름과 가지치기를 시작으로 수십 번의 농약, 꽃 솎아내기, 열매 봉지싸기, 일일이 따서 고르기, 포장, 수송까지 얼마나 일이 많겠는가. 그에 비해 대부분 기계로 해치우는 논농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세밑(세모歲暮는 일본말이라 한다. 며칠 전 아버지가 세말歲末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일본어 망년회 대신 송년회라 써야 한다)을 맞아 익산(옛 이름 솜리)에 사는 사돈과 송년저녁을 하기로 했다. 바깥사돈끼리 밥 한 끼 하는 거야 드문 일은 아니겠으나, 모처럼 익산을 간 김에 오랜 여자친구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여친女親이 아니고 ‘여사친(여자사람친구)’이다. 76년 대학캠퍼스에서 처음 만나 이제껏 소통을 이어가니 반세기가 다 되어간다. 귀한 인연이다. 부군이 군산대 교수였는데 판소리 연구와 실제에 조예가 깊은 학자이다. 아들 결혼식때 수인사를 했지만, 기억에는 없을 터. 2019년 2층으로 집을 멋지게 짓고 ‘知足軒지족헌’이란 당호를 달았다고 하여, 내 호기심을 자아냈다. 언젠가 가보려고 별렀는데 잘 됐다. 선물이 마땅치 않아 내가 심고 뽑아 땅에 묻어둔 무 5개를 갖고 갔더니 여사친이 “역시 너답다”며 웃는다. 그의 웃음이 좋았다. 그 친구가 근래 많이 아픈데, 새해부터는 몹쓸 병마病魔를 물리치고 365일 내내 활짝 웃으며 컨디션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 부군은 국문학과 교수답게, 서재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한우충동汗牛充棟,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구나 취미가 고상해 그림과 벼루를 수집하여 서재가 마치 고급 갤러리같았다. 부러울손! 거기에서 눈에 확 띄는 책을 발견한 게 동양사상가 기세춘씨와 신영복 교수가 편역한 『중국역대시가선집 1-4권』이었다. 1권을 펴들자 바로 눈길을 끄는 『시경』의 시 한 편, 「도요桃夭」다. 재밌다. 이렇게 쉽게 번역을 하다니. 사진을 찍었다. 마침 펴낸 곳이 돌베개, 출판사 대표에게 사진을 보내며 재고를 여쭸다. 있다면 당장이라고 사고 싶은 귀한 책이다. 복숭아농사를 짓는 집의 딸이 시집을 가면 잘 살 것이라는 덕담德談의 시, 곧바로 한동네 꾀복쟁이 친구의 세 딸이 떠올랐다. 못쓰는 붓글씨이지만, 정성스레 써 친구의 딸들에게 줄 생각을 했다<사진>. 물론 친구의 세 딸들은 덕담을 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잘 살고 있지만 말이다. 외손자가 다섯 명이라던가? 큰놈이 중학교를 간다던가? 친구는 한 명, 한 명 복돈 주려면 지출이 크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하여, 오늘 아침 그냥 한번 써봤다. 더욱 연습을 해 내 맘에 최소 50점은 돼야 선물할 터인데, 글씨가 엉망진창이라 걱정이지만, 아버지 친구인 아저씨의 성의인데 뭐 어떠랴 싶기도 하다. 내용이 참 재밌지 않은가. 아예 의역으로 세 자매의 이름을 적었다. 한자도 그리 어렵지 않다.
요요夭夭는 젊고 싱싱한 모양이다. 젊어 일찍 죽는 것을 요절夭折이라고 하지 않던가. 작작灼灼은 꽃이 많이 핀 모양을 말한다. 실가室家는 집안(자손)을 번성케 한다는 뜻이고, 가실家室의 가家는 가문, 실室은 가정을 이른다. 또한 우귀于歸는 옛 전통혼인의 육례六禮의 하나로, 신부가 혼인한 후 처음으로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땅할 의宜자는 화순和順하게 한다는 뜻이고, 유분有蕡은 열매가 많이 달렸다는 뜻이다. 진진蓁蓁은 잎이 무성한 모양이다. ‘지자之子’의 지之자는 ‘갈지’가 아니고 ‘그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나는 이런 일에서 소소한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소확행小確幸이 별 것이겠는가.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소확행 할 일이 화수분같이 생겼으면 좋겠다. 제발 적선하고, 우리의 가슴을 쿵하게 하는 이태원참사같은 것은 안생기면 좋겠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제발 술주정뱅이 알코올릭 정부수반이 조금이라도 제 정신을 차리면 좋겠다. 불행하게도 택도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달구름(세월歲月)의 한 해가 되기를 빌어보는 새해 새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