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53
12월28일[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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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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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bXONO0lI0w (장승필 안드레아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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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질이나 덕성이 심각하게 결핍된 리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리더로 인한 폐해는 언제나 무고한 사람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러할 때 폐해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쉽게 그런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고,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 역시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마찬가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은 이유도 묻지 않습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다짜고짜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우고 있는 사내아이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생떼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랄 일이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무고하게 학살당한 그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당신 사랑의 품 안에 거두시어 큰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그뿐만 아니라 더 요구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희생자들을 치료하기, 통제 불능인 자동차를 멈추게 만들기….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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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들의 자화상>
프리다 칼로의 그림 ‘작은 사슴’을 보며 치유의 감정을 느꼈던 송정림 씨는 그 느낌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나도 덜컥 겁이 났습니다. 아파서라기보다 겁이 나서 울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눈에 보이는 상처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가면서 눈이 보이는 상처에는 덤덤한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에 더 많이 울게 돼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상처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틈에서 아파하던 어느 날 그림 한 점을 보았습니다. 작은 사슴 한 마리가 몇 개의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고 있는 그림이었어요.
마치 내 몸에 화살을 맞은 듯 아릿한 고통이 스며들었습니다. 그 사슴은 바로 그 그림을 그린 프리다 칼로 자신이었습니다.
주로 자화상을 그려 온 프리다 칼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여기서 잠깐 프라다 칼로의 삶을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프리다가 열여덟 살 때 학교 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탔던 버스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습니다. 산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끝없는 수술과 수술……. 악몽 같은 치료 끝에 프리다는 기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생긴 고통은 그녀를 평생 괴롭혔습니다.
1929년 스물둘의 프리다는 스물한 살 연상인 디에고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당시 멕시코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디에고의 아내로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성 편력이 심한 디에고는 결혼한 후에도 외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의 유산 끝에 만신창이가 된 프리다. 결국은 남편과 여동생에게 동시에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내 인생에 대형 사고가 두 번 있었어. 하나는 교통사고, 다른 하나는 당신을 만난 거야. 그중에 당신을 만난 게 더 나빴어!”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아픔을 그림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아픔을 토해내며 결코 열정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송정림 씨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어느 슬픈 날 노트에 내 얼굴을 그려 봤는데 나도 모르게 뺨에 눈물을 그리고 있더라고요.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그리는 것이더군요. 아니, 자신의 마음이 저절로 담기는 것이 자화상임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는 사슴……. 그런 자화상을 그릴 때 프리다 칼로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던 걸까요. 얼마나 상처를 입었으면 그런 자화상을 그렸을까요.
그녀의 자화상을 물끄러미 보다 보니 내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낼 때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그 아기들이 하느님을 위해 한 게 뭐가 있다고 순교자들로 여기는가?’ 하는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묵상하다 보니, ‘그렇다고 우리는 구원받기에 합당하게 한 일이 뭐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들도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또한 우리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된 것이기에 우리 또한 우리 힘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의 ‘피’는 헤로데의 증오 때문에 흘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피 흘림이 있었기에 헤로데가 예수님을 끝까지 찾지 않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건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흘린 피가 된 것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고통을 당하였다면 그 사람에게 애정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정의이신 분이기에 죄 없이 피를 흘렸다면 죽음 뒤에 합당하게 그것을 갚아주셔야 당연합니다.
구원은 그분에 의해 오지만 우리가 하는 작은 희생들, 그것이 잊히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면 그 희생은 자의든 타의든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자기 스스로 힘으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섭리로 구원에 이르고 영광에 이르는 우리의 자화상들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랑할 것도 없고 구원을 우리 힘으로 얻었다고 교만을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에게 느끼는 그대로,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게 찬미 받으셔야 하는 날이 오늘입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에게 영광을 주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무언가 하려고 하는 우리에게도 그 영광을 나누어 주십사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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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00년 전입니다. 헤로데 왕은 동방박사들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이 태어났다는 ‘메시아’의 소식은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헤로데는 보고를 받은 후에 이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는 모두 죽여라.’ 동방박사에게 ‘메시아가 태어난 곳을 알려 주시면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데의 결정으로 예루살렘에는 아이를 잃은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제 막 아이를 출산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마태오는 이런 일들이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후약방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모두 왕궁으로 초대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래서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마태오 복음사가는 또 다른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을지 모릅니다.
지난 10월 29일에 158명이 숨지는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책임자를 찾아서 문책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다시는 그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특별수사본부가 엄정하게 수사하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서 진상을 밝히는 것도 참사의 수습방법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가슴에 품고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유족들의 아픔 마음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슬픔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참사의 책임규명과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슬픔을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고, 함께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역사는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날의 아픔을 우리는 함께 공감했다. 비록 슬픔이 컸지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어떤 분이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이가 뜨거운 것을 못 느낀다면, 아이가 추위를 못 느낀다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기 전에 신체장애를 얻을 것입니다. 고통은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을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만들어 줍니다. 고통은 소중함을 알게 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들을 더욱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는 출산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쓴 작품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그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공동체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소방공무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저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모든 것을 내어주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인생이 기쁨과 즐거움만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의 기쁨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도 아닙니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축복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참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철저한 섬김이요, 나눔이었습니다. 권력을 지녔지만 사용하지 않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무고한 사람, 억울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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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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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님 방문 사건(2,1-12 참조)에 이어서 예수님 가족의 피신과 사내아이들의 학살 사건을 보도합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헤로데의 적개심과 화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의 원인은 앞선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이 전하는 예수님 이야기는 탈출기 1─2장이 전하는 모세의 어린 시절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으로 모세도 죽을 위험에 놓였지만, 그는 파라오의 딸에게 입양되어 죽음을 면하고, 뒤에 이스라엘의 탈출을 돕는 인도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경우와 조금 다릅니다. 헤로데 임금의 악의와 적개심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해치려는 적대자를 피하여 죽음을 모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하여, 곧 피를 흘려 ‘많은 이’를 구원하시려고 살게 되신 것입니다.(1,21; 26,26 참조)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음으로, 죄 없이도 죽어야 하셨던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죽음으로 그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 이야기에서 하느님 약속이 완성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약속은 모세의 탄생과 구출에 관한 이야기로 예고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2장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자 새로운 모세로 소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고난과 희망의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고, 예수님께서 맞으실 고난과 영광의 사건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었지만, 그 역사는 지금 우리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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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정용 안토니오 신부님]
지난 10월 7일 유엔(UN)에서 ‘인간개발보고서’를 냈습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극히 불평등한 미국의 보건의료 상황을 지적하면서 과도한 군사전략개발에 비해 인간개발전략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유아 사망률이 2000년 이후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생후 1년 이내 흑인 영아 사망률이 백인의 2배에 달합니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가정의 1세 이하 영아 사망률이 가입 가정보다 50퍼센트 더 높습니다. (참고로 건강보험 미가입 비율은 백인 13퍼센트, 흑인 21퍼센트, 중남미계 34퍼센트) 하위 5퍼센트 어린이들이 상위 5퍼센트 부잣집 어린이들보다 평균 수명이 25퍼센트나 짧습니다.
또한 이 보고서는 미국이 불평등 문제 해소를 고려하지 않은 경제성장 위주의 ‘밀레니엄 개발계획’을 실행할 경우 향후 10년간 4,100만의 어린이들이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부끄러운 그늘입니다.
물론 어린이에 관한 문제는 단지 미국 사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어린이가 아동노동·전쟁·아동학대·아동성폭력·굶주림 등 갖가지 형태와 이유로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전쟁과 갈등 때문에 이미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증오와 분노를 키우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의 폭력 때문에 어린 시절을 악몽 속에서 지내는 어린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고된 노동과 값싼 노동을 하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추위를 느끼는 어린이들도 세상엔 많습니다. 이 어린이들을 증오와 분노에서, 악몽에서, 고된 노동에서, 세상의 추위에서 불러낼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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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민경철 안토니오 신부님]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어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을 가지고 싶고, 가지게 되면 더 큰 것을 탐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헤로데가 그랬지요. 세상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 두 살 이하의 사내를 살해하는 큰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어떻게 차지한 자리인데 그 누가 내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우리 삶에 당연한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지수는 그리 크지 못합니다.
‘내 지금의 자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올라온 자리이니까 내 노력의 대가야, 나의 재산은 쓸 것 못 쓰고 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마련한 것이니까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이야.’
이런 생각들은 소유물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내게 당연한 것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감사한 선물로 바뀔 때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영원히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맡기고 잘 빌려 쓰라는 것이었다면 언제든지 내놓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자유를 체험합니다. 버려야 얻는다는 진리가 사실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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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1)삶과 죽음>
마태오 2,13-18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삶과 죽음>
죽임으로써
사는 이가 있고
죽음으로써
살리는 이가 있습니다
죽임으로써
사는 이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음으로써
살리는 이는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은 이는
이미 죽으니
영원히 죽을 것이고
죽어도
사는 이는
이미 사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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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더 이상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이 없기를>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넘쳐야 할 오늘, 우리는 더없이 참혹한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헤로데의 권력욕 때문에 잔인하게 죽어가야 했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가 그것입니다.
헤로데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자신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아낼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성탄의 빛이 비추어진 바로 그 시간, 한 인간의 간악한 욕망이 빛을 어둠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죄 없는 어린이들의 죽음은 어둠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추악함을 들추어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아무런 반항도 할 수 없이 자신의 몸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귀를 울립니다. 이 어둠 속에서 아이 잃은 부모들의 피눈물과 통곡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쓰라리게 휘몰아칩니다.
2000년 전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과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부모들의 처참함을 묵상하는 오늘, 이 세상 역시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경제적 이유로 철부지 자식들과 함께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린 가련한 부모에게서 어둠을 봅니다.
이 세상 곳곳에서 죽어가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전쟁 같은 경쟁, 피 말리는 입시 지옥, 온몸과 마음을 피멍 들게 하는 폭력으로, 채 피우기도 전에 고귀한 생명을 끊는 아이들이 자신을 죽임으로써 “제발 살려 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세월호와 함께 검은 바닷속으로 잠기면서 절망적인 공포 속에서도 “엄마 아빠 사랑해, 고마워.”라고 유언을 남긴 세월호 희생 학생들에게서, 부모의 축복 속에 태어나지 못하고 낙태당하는 수많은 여린 생명에게서, 무책임한 부모에 의해 버려지는 고아 아닌 고아들에게서,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서 헤로데에 의해 죽어간 어린이들을 봅니다.
왜 이 세상에 이처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죽음들이 이어지겠습니까?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인간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인 온갖 재물과 명예가 오히려 더 존중받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의 어떠한 희생도 아랑곳하지 않는 비정함이 인간 세상에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사회적 통계 자료의 일부인 미미한 숫자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죽음 같은 짙은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빛을 받은 이답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선뜻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의 여정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빛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이제 이 빛 안에 사는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이들에게 비쳐야 합니다.
죄 없는 어린이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울부짖음이 아닙니다. 이 울부짖음은 빛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어둠 속에 머물러있던 우리를 깨우치는 하느님의 음성이요, 우리의 시선을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돌리게 하려는 촉구의 외침입니다.
오늘 하루 죄 없이 죽어간 모든 이들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하느님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의 참된 의미를 생각하고, 성탄의 신비를 간직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벗님들 스스로가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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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또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처의 전쟁도 그렇고, 2021년 2월 18일 실시간 세계낙태 건수는 무려 5,662,422건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년 3만3천여 건에 이릅니다. 2005년에는 34만 건이나 되었죠. 출생아는 2020년 27만 명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감당하며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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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학생 때, 등하교를 같이했던 동네 친구가 있었습니다. 집이 가까워서 학교까지 함께 걸어갔고, 집에 올 때도 같이 걸어왔습니다. 아마 중학생 때 제일 친했던 친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함께 걸어오면서 학교의 반 친구 흉을 제가 말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공부만 하고, 너무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네가 더 심해.”
이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아 인상을 쓰자, 착한 친구는 “농담이야.”라면서 얼버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를 떠올리면서 흉을 봤던 친구보다 분명히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당시에는 왜 이렇게 남에 대해 흉을 많이 봤나 싶습니다. 사실 남 험담하는 사람이 공통점은 자존감이 낮다고 하지요.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열등감이 심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험담하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흉이 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저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는 대로 받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칭찬은 칭찬을 낳고, 험담은 험담을 낳습니다. 때로는 여기에 이자가 붙어서 돌아오기도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과 행동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이자까지 더해서 더 좋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기념합니다. 갓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린 헤로데 대왕은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자기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였지요. 하지만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로, 절대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실제로 이 악행을 저지르고 얼마 못 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못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끝까지 행복할 수 없었던 헤로데 대왕이 만약 사랑으로 아기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늘나라에서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나의 욕심과 이기심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며 말과 행동에 늘 사랑을 가득 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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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정렬된 인생>
언젠가, 묵상을 하던 중 프란치스코가 몇 살에 돌아가셨는지 따지다가 저는 너무 많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지, 언젠가 죽을 것인데 왜 사는 것인지, 오래 사는 사람은 왜 오래 사는 것이고 일찍 죽는 사람은 왜 일찍 죽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오래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찍 죽는 것인지,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면 훌륭한 삶이고 그렇지 않으면 삶을 잘못 산 것이지.
그런데 많은 일, 업적, 장수, 이런 것을 생각하니 왠지 다 그런 것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고 오래 산다는 것도 추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을 초월하는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이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가치랄까, 가치 기준이랄까, 그런 것이 꼭 있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이 세상사는 동안 남겼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자기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결국 죽고 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화로운 삶이었어도 죽을 때 잘못 죽으면, 다시 말해서 최후가 좋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지요. 그리고 젊어 아무리 칭송받는 삶을 살았더라도 변절한다면 그 인생도.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것이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 묻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지는 죽음이 잘 죽는 죽음이고 그리고 그것은 또 영원하신 하느님 손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하고, 인격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하여 정렬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장의 이익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인생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고, 대열이 흩어져서도 안 되며, 이 사람에게 끌려가고, 저 사람에게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하느님께 직행한 아기들의 죽음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죽었지만 실은 주님 때문에 죽은 아기들이고, 그래서 오래 살아 죄에 오염되는 일 없이 하느님께 직행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축일의 의미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교회의 답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에게서 어떻게 세상의 죄와 악이 나오는지? 사랑이신 하느님이신데 어찌 세상에 고통이 있으며 죄 없는 사람과 착한 사람이 고통을 더 받는지?
하느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셨기에 죄를 짓기도 하고, 죄로 인한 악도 발생하며, 자유를 주셨지만, 유한한 이 세상에서는 한계를 주셨기에 유한한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간이 겪는 것이 고통과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입니다. 다만 그 고통과 죽음이 영원과 하느님을 향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 하느님을 위한 고통과 죽음이냐 아니냐가 다를 뿐이고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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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빛과 어둠의 싸움>
-“회개하라! 기억하라! 잊지마라! 역사는 반복된다!”-
“이들은 하느님과 어린양께 바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 되었으니,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리라.”(영성체송)
1978년 초판 이후 300쇄 이상을 찍은 조세희 작가의 중편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스테디셀러를 기억하시는지요?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소설의 내용은 지금도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소설 중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 줄 사람이었다.”
바로 그 조세희 작가가 3일전 12.25일 80세로 영면했습니다. 그가 남긴 명언 몇마디를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에 나눕니다.
-“당신은 비겁한 자의 자식, 억울한가? 그럼 분노하라!”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다음 두 부류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는 것, 고통으로 잠 못 이루고 우는 사람이 있는한 그 한 사람을 위해 신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끝끝내 믿는 것. 이게 혁명의 정의다.”
“역사의 빛나는 순간엔 늘 절규하는 사람이 있었고,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그 사람의 절규가 진실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절대로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라.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국민을 괴롭히는 적들이 제일 좋아한는 일이다. 이 시간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역사에서 절대 생략은,도약은 없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를 어느 날 하루 하루아침에 훌쩍 뛰어 넘어 새 세상으로 갈 수는 없다. 더디더라도 누군가는 한 걸음씩 밀림을 헤쳐 나가야만 앞이 확트인 개활지의 환한 빛을 만날 수 있다.”-
현대판 예언자와도 같은 통찰이 번뜩이는 잠언같은 말마디들입니다. 빛과 어둠의 끝없는 싸움의 인류역사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어둠이 빛을, 거짓이 진리를 이겨본 적이 없다 하지만 때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입니다. 오늘은 성탄 8부에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중인 죄없는 자들의 반복되는 악순환의 죽음입니다. 얼마나 많은 죄없는 영혼들이 죽음이었고 죽음이고 죽음이겠는지요!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사건들은 계속됩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렇고 얼마전의 10.29참사로 인한 죄없이 죽은 159명 젊은 영혼들의 죽음이 그러합니다. 얼마전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10.29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성탄 대축일 미사”때는 강론대신 유가족들의 슬픈 사연을 들었다 합니다. 우리를 영원히 잊지 말아 달라는 문귀,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라는 말마디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철저한 회개와 기억일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죄없는 이들의 아기 순교자들 축일엔 당시 1000명 정도의 예루살렘 주민에 약 20명 정도 아기들이 폭군 헤로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모세때 잔인한 폭군 파라오에 죽은 죄없는 아기들의 죽음이 반복된 것입니다. 바로 이 죽음은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죄없는 죽음의 전조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죄없는 이들의 죽음입니다.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은 교회가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아침 성무일도중 위로가 되는 초대송 후렴, 찬미가, 후렴을 나눕니다.
1.초대송 후렴;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찬미가;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 갔도다.”
3.후렴1; “어린이들은 마치 어린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
후렴2;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후렴3; “영원한 그리움이 그들 위에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겠으며, 걱정과 한숨은 사라지리라.”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은 파스카 주님 덕분에 위로와 구원을 누리지만 주님을 모르는 죄없는 이들의 죽음은, 특히 10.29 참사 희생자들은 어떻게 되겠는지요? 우리 교회는 이들을 기억하고 저희들은 감히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과 더불어 우리는 국가가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해 억울하게 죽은 159명의 젊은 20대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가 명심할 사항은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의 끊임없는 싸움에서 꼭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두 가지입니다.
1 “회개하라! 기억하라! 잊지마라! 역사는 반복된다!”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우리 안팎은 선과 악,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의 영적 싸움터입니다. 끊임없이 선과 빛,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란 말씀이 불쌍한 159명 희생자들에도 해당된다 싶어 고맙습니다. 저절로 주님의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2.“빛속에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요셉입니다. 얼핏 보면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인 듯 하지만, 실은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 빛과 어둠의 싸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빛 속에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빛의 사람, 요셉을 어찌 어둠과 거짓의 폭군 헤로데가 이길 수 있겠는지요! 노력과 더불어 은총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의 선과 빛, 진리 중에 살아가는 분투의 노력이 제일입니다.
이래야 반복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없이 죽은 억울한 이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고,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우리 현실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회개와 기억의 삶, 빛과 진리의 삶을 살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찬양하나이다.”(복음 환호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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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6)
오늘은 헤로데의 '권력에 대한 탐욕과 적개심에 의해 죄 없는 아기들이 희생된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마태2,13-18)은 헤로데의 분노를 피해 '아기 예수님과 그의 부모가 이집트로 피신하시는 모습'과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헤로데의 손에 의해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의 희생은 아기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 순교는 유다인들의 탐욕과 적개심에 의해 희생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그 자체로 죄이면서, 다른 죄를 낳게 되는 칠죄종 중에서 '분노와 탐욕'이 얼마나 큰 희생과 아픔을 낳게되는 지,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통해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 영과 육의 죽음'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영이 먼저 죽게 되고, 영이 죽으면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상태의 몸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육의 죽음입니다.
오늘 독서(1요한1,5-2,2)에서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1,8-10)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하느님 때문에'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때문에' 죄인이고, '아직 이 완전한 사랑(완덕)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낸 나의 분노와 탐욕으로 인해 희생된 죽음이 있습니다. 낙태아들, 또 다른 죽음들,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 등등. 그래서 죄인이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죽으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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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2UG2omE8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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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 18)
이 땅에서
아기가
죽어갑니다.
살아야 할
생명이
죽어갑니다.
자신의 죽음도
모르채
죄 없는
아기들이
죽어갑니다.
예수님의
성탄 앞에
살아야 할
아기들의
시간까지
우리가
죽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립니다.
멈추지 않는
아픔과
절규입니다.
뻔뻔함을
멈추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도
아기들의
죽음에 관하여
물을 수 없습니다.
절망 속에서
절망을
위로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아기를 죽입니다.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아기와
함께할 수 없다면
하느님과도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왕도 사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소중한 생명이
있을뿐입니다.
하느님
성탄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성탄을
찾는 이유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고싶은 이유입니다.
성탄의 기쁜소식은
아기들을 돌보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탄의 좌표는
사랑입니다.
죄 없는 사랑을
죽이지 마십시오.
사랑이 전부가
되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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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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