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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0923)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 1:16~17).
신앙의 결단이 중요하다~~~~~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몇 번씩은 삶의 전환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별히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흉년을 피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이주했으나 십 년도 채 못 되어 본인과 그 두 아들이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 땅으로 갈 것을 결심한다. 이에 두 며느리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여 평안히 살 것을 권하지만, 룻은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갈 것을 다짐한다. 룻의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을 공경했던 나오미의 깊은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역시 그 시어머니처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룻의 신앙은 이방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됐다. 그녀는 이방 여인으로서 신앙의 연륜이 깊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과감히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확고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기의 종족과 자기의 조국을 버리고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또한 아직 젊고 미래가 남아있는 그녀에게 시어머니 나오미는 거침돌이 될 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앙에 의한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의 결단과 믿음의 배경은 바로 ‘하나님 제일주의’였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바르고 확고하게 결단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욕심 때문에 세상의 죄악과 단절하기를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 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세상적인 욕심과 죄악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적 출세욕, 물질적 욕심, 명예욕 등에서 머뭇거리며 하나님께서 원하는 신앙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 룻처럼 하나님 제일주의의 결단성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룻이 차지했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 많은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물욕이나 명예욕, 권세욕에 얽매인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선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매 순간마다 룻처럼 ‘하나님 제일주의’의 결단성 있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정과 경영하는 기업과 자신이 속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삶의 지경이 넓어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22)
* 룻기는 어떤 책인가?
룻기는 1차적으로는 다윗이 왕으로 임명된 것은 원래 그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덕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조상들의 놀라운 신앙에 복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임을 보여주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동기에서 집필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더 나아가 신약의 독자인 우리에게 다윗의 혈통을 타고 세상에 오신 이스라엘 예수의 과거 혈통에는 이러한 훈훈한 신앙 일화와 그 이면에 담긴 놀라운 구속사의 섭리가 있었음도 증언해 주는 것입니다.
룻기(Ruth, 히브리어로 ‘우정’, ‘협력’)란?~~~~~이방 여인이요 과부였으나 놀라운 신앙 결단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개종한 것은 물론, 시어머니 나오미를 헌신적으로 봉양하다가 개인적으로도 복을 받고, 나아가 다윗과 예수의 조상까지 되는 구속사적 복까지 받은 사건은 기생 라합의 경우와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사건은 어쩌다 우연히 된 사건이 아니라 바로 에덴동산에서 약속(창 3:15)된 이래 구약 전체를 통해 거듭 약속된 메시아가 태어날 혈통의 준비와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특별한 여인들이 관련된 혈통을 통해 예수가 태어나도록 세심하게 의도적으로 섭리하신 것이다. 만왕의 왕으로 나실 예수를 이처럼 과거 이방인이었으나 개종된 여인들을 통해서 태어나도록 조치하심으로 전 구속사에 걸쳐 모든 죄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된 당신의 뜻과 원리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다. 이처럼 룻기는 표면적으로는 한 작은 여인 룻의 사랑과 신앙의 이야기인 것 같으나, 그 이면에는 실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룻기를 읽을 때 그저 한 가련하고 진실한 여인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놀라운 구속사의 섭리와 은혜가 담긴 이야기로서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전 4장으로 된 룻기는 중심인물인 룻, 나오미, 보아스 이상 3인이 등장하는 일종의 짧은 이야기다. 우선 1:1~18절까지는 ‘나오미와 룻의 귀향’이 주제로,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으나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고 두 이방인 자부와 함께 과부의 신세로 전락되어 귀향을 결심하자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귀향한다. 이어 1:19~2:23절까지는 ‘시어머니에 대한 룻의 헌신’이 그려지는 데, 이삭을 줍던 중 장차 그녀의 구원자가 되어줄 보아스를 만나게 된다. 3:1~18절까지는 ‘보아스에 대한 룻의 청혼’ 장면으로 당시 계대결혼(繼代結婚)의 풍습에 따라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하는 장면으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4:1~22절에서는 ‘룻과 보아스의 결혼 및 출산’을 통해 훗날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태어남을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적 섭리의 오묘함을 보여준다.
오늘의 기도 : 창세 전부터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역사 속에 이방 여인 룻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케 하셔서 우리들도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구속사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2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암울했던 시대였다. 이방 민족들의 끊임없는 압제 속에서 백성들은 신음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며 거역했던 시대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사사기를 마무리하면서 전체 요점을 한마디로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때”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이들을 직접 다스리시고자 하셨으나 완악한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고 급기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주셨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에 “너희가 내 말에 순종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점점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하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사사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악행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고, 제도가 없어서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중심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진정 주의 말씀이 우리의 길과 진리가 되지 않는다면 사사시대의 백성들과 같을 수밖에 없다.
유명한 화가 램브란트는 두 개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하나는 젊은 시절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의 얼굴입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희망에 부풀어 있고, 아름다운 꿈을 꾸는 듯한 평온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았던 20년 후의 모습에서는 진실을 잃어버린 거짓된 모습, 희망이 사라져버린 암울함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을 바라며 살던 그가 20년 동안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결과, 그의 몸은 죄악의 온상이 되어 있었고 어두움과 부패의 서식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몸과 영혼의 질서를 잡아주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 때 진정한 삶의 의미와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써 마땅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왕이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역사를 외면한 채 감사는커녕 불평불만 속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매사에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20)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위에 군사를 매복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셋째 날에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서 전과 같이 기브아에 맞서 전열을 갖추매…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시매 당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사람 이만 오천백 명을 죽였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삿 20:29~35).
내 눈의 들보를 보라~~~~기브아 거민들의 레위인의 첩 강간 치사 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찾아온다. 이 레위인은 죽은 자신의 첩을 12토막을 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낸다. 기브아인들의 비행에 대해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에 대한 징계를 결의하게 되고, 베냐민 지파는 총회의 결의에 불복하고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 총회는 두 번에 걸쳐 베냐민 지파에 패배당하고 결국 여호와께 울며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베냐민 지파를 무찌르게 된다. 가나안 정복의 큰 역사를 체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이스라엘 각 지파의 공동체 의식은 사라지고 총회의 결의에 한 지파가 이처럼 반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12지파가 하나의 선민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기보다는 자기 지파의 이익과 주도권 쟁취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에는 양쪽 다 문제가 있다. 기브아 사람들의 레위인의 첩 강간 치사 사건에 베냐민 지파가 징계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옹호하고 전쟁까지 불사한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윤리적 명분을 내세워 베냐민 지파와 똑같은 마음으로 전쟁에 임한 이스라엘 총회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이나 패배를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는 레위인이 첩을 취한 일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베냐민 지파를 배제하고 편파적인 증언을 토대로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이는 공동체인 이스라엘 12지파 전체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먼저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응징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보다 신중하고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일을 처리한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의 눈의 티보다는 나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티가 묻었다고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불쌍히 여기며 전도하기보다는 그들을 정죄하고 나만 의로운 척한 적은 없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마 7:3~5)을 기억하면서 내 눈의 들보를 보는 진정한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인류가 구원받도록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써 전도와 선교를 통해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지만 우리는 유대인들이 선민의식에 빠져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에 빠진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은 지 돌아보게 하시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기보다는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서 진정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써 사명을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19)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삿 19:22~26).
하나님을 떠난 자의 비극~~~~~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죄악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 살 때에는 세상보다 더 세속적이고 악의 세력보다 더 악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기브아 지역의 불량배들은 레위인 일행이 묵고 있는 노인의 집을 포위하고 동성애를 하기 위해 레위인을 끌어내고자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자기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어주고 동성애만은 막고자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량배들이 계속 행패를 부리자 레위인은 자기의 첩을 그들에게 내어 주어 윤간을 당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 첩이 죽게 되고 이에 레위인은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집에 이르러 시신을 12도막으로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12지파에 보내어 기브아 거민들에 대한 복수를 호소한다. 이러한 기브아 불량배들의 만행은 실로 엄청난 죄악으로 마치 소돔과 고모라 사악한 행위를 재현이라도 하듯 했다. 결국 그들은 소돔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위인을 구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자기의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놓기로 한 노인이나, 자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준 레위인의 태도는 극한적인 이기주의의 발상이요,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버린 사악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할 줄 모르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고자 첩의 시신을 12등분 낼 정도로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노인이나 레위인은 불량배들과 그처럼 타협적으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들과 대항했어야 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레위인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내어주어 죽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떠난 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도 성적 타락의 면에서 볼 때 결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온갖 성범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고, 성 개방이라는 미명하에 동성애를 조장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될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주 부평에서 열린 퀴어 축제 행사에서 남자 청년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여성 복장과 화장을 하고 젊은이들에게 동성애를 홍보하는 일이 벌어지고, 한 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기도 한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10대와 20대 젊은이들의 에이즈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기브아인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심판의 때를 부끄럼 없이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 가장 행복하고 평안함을 느끼게 우리를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성적인 타락을 비롯해 온갖 유혹과 죄악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환경이 너무 많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음 세대들이 동성애를 비롯해 많은 죄악에 노출되어 있는데, 교회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음 세대를 살리는 일에 적극 나서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며 젊은이들이 이상을 보는 영적 천국 대한민국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18)
“단 자손이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삿 18:27~31).
형식주의를 경계하라~~~~~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정탐하러 다섯 명의 정탐꾼을 보내는 도중에 미가의 집에서 레위 소년 제사장을 만나게 된다. 레위 소년 제사장으로부터 자신들의 앞길이 형통하리라는 말을 들은 그들은 다시 600명의 용사를 선발하여 라이스 땅 정복에 나선다. 이들은 라이스 정복에 앞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레위 소년 제사장과 미가가 만든 신상을 탈취한다. 그리고서는 라이스를 쳐서 정복한 후 모든 단 사람을 이주시켜 성읍을 중건한 뒤 그 땅 이름을 ‘단’이라 칭한다. 하지만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에게서 빼앗아 온 ‘새긴 신상’을 세워놓고 그들의 모든 성공의 영광을 신상에게 돌렸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모세의 손자인 제사장이 있었음에도 이들을 바로 양육하기는커녕 자신의 생계유지에 매달려 단 지파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죄를 범했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블레셋의 침략 시까지 그곳은 우상숭배의 온상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단 자손이 저지른 잘못을 볼 수 있다. 단 자손은 미가가 그러했던 것처럼(삿 17:13) 새긴 신상들과 제사장 제도를 마치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보증수표와 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신상이나 제사장 제도 등의 종교적인 외양(형식주의)이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고 착각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처럼 종교는 타락할수록 보다 외적인 형식주의에 치우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형식주의에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형식적으로 교회당에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면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고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미가라는 개인의 우상숭배가 단 지파 전체로 확산되었고, 단 지파의 이러한 배교 행위는 훗날 여로보암 1세가 단에 북 왕국의 신당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중심으로서의 신앙이 아닌 외형적이고 보이는 것에 치우친 형식주의 신앙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신앙생활로 사람들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하나님을 인식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당시 악을 행하며 형식주의에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향해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많이 기도해도 듣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나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의 외양이 아니라 내면(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보다는 교회의 지도자나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시고, 진정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여 주옵소서. 성전 마당 뜰만 밟으며 자위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우리의 옷을 찢는 것이 아닌, 마음을 찢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의 묵상(0917)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1~6).
영적 위기 극복해야~~~~암울하고 어두웠던 사사 시대의 사사들의 활동은 삼손을 마지막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범죄-징계-회개-구원-재범죄의 악순환을 거듭하였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등장시켜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셨다. 사사시대는 종교적으로 여호와 신앙과 이방의 우상숭배 신앙이 혼합된 종교적 혼합주의가 심각했다. 즉 외양적으로는 여호와 신앙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내면에는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왕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암흑기였다. 본문에 나오는 미가와 그 모친은 가증한 신상을 만들어 섬기면서도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영적인 무지에 빠져 있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백성들도 우상숭배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구별된 레위인을 개인적으로 고용하여 신상숭배 제사장으로 삼는 등 물질 만능의 상업주의적 신앙이 심화되었고, 미신적 신앙 등에 빠져 있었다. 또한 전국에 흩어져 종교적, 사회적 중심 역할을 담당했어야 할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양해야할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거지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모세의 율법에 무지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채 임의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영적으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오늘날에도 우상숭배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고, 이와 더불어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소위 물질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재물숭배’ 사상이 만연돼 물질 때문에 신앙과 양심을 파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한마디로 사사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사사시대의 영적 위기는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매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가 하면, 목사 자격증을 돈 주고 사는 경우, 교인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까지 기복주의 신앙에 빠지고, 물질만능주의가 교회까지 지배하는 등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을 하나님보다 더 앞세우는 위기 중의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말씀이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심각한 영적 위기의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은 참고 계시나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기 위해 조만간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에게 육신의 눈과 더불어 영안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묵상(09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삿 16:16-17).
죄와 연합함의 결과~~~~삼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사람들을 단번에 일천 명이나 죽이는 큰 역사를 행했지만, 여전히 여자에 대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기생의 집에 출입하는가 하면 음탕했던 소렉 여인 들릴라와 애정행각을 벌였다. 결국 삼손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돈으로 매수된 들릴라의 잔꾀에 의해 힘의 근원인 머리털이 잘려 버렸고, 결국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 되는 나실인의 율례를 범하여 하나님이 그를 떠남으로 힘은 상실되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두 눈이 뽑힌 채 맷돌을 돌려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삼손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딤나 여인과의 혼인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고, 가사의 기생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성적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고 들릴라와 관계를 맺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수치와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죄와 연합하는 사람은 죄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여 영적인 감각까지 상실하게 만든다. 마치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말처럼 죄와 연합하는 처음이 어렵지, 나중에 자꾸 하다 보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질 뿐 아니라 오히려 죄와 연합할 때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삼손은 들릴라와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영적 무감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죄의 속성은 처음에는 달콤하나 일단 거기에 빠지면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잠 7:1-21). 이처럼 죄는 처음에는 들릴라의 속삭임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나 거기에는 자신을 죽게 하는 독소가 함께 담겨 있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얼마든지 죄와 연합할 수 있었지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옴으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사탄은 아담과 하와 이래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우리 믿는 이들을 방해하려고 끈질긴 유혹과 공작을 하게 됩니다. 사탄은 급기야는 구속의 완성자 되시는 그리스도까지 시험을 통해 넘어뜨리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무장하여서 죄의 유혹이 올 때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물리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죄와 연합함의 유혹이 올 때 과감히 물리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 ‘죄의 삯은 사망’이라며 우리에게 죄와 연합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 하나님! 하지만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들릴라와 같은 달콤한 죄의 유혹 앞에서 영적인 무감각 속에 철저히 무너지며 죄와 연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죄와 맞닥뜨렸을 때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며 자기합리화를 하고 죄와 연합할 때가 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물질과 명예, 성적인 유혹 등 죄의 달콤함에 무너지지 않고 요셉처럼 과감히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울러 날마다 성령의 검인 말씀과 가까이하는 생활을 통해 죄와 연합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15)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니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삿 15:18~19).
여호와께 부르짖으라~~~~~오스굿이라는 사람은 “인간의 삶은 궁핍의 연속이므로 끊임없이 간구함이 당연하다”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에 우리가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 삼손은 장인으로부터 자신의 아내가 블레셋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를 묶어 불을 붙여 블레셋의 모든 곡식 및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불살라 버리고 에담 바위틈으로 피신한다. 삼손의 블레셋 공격에 분개한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치려 하자 위협을 느낀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 넘겨준다.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삼손의 행동을 오히려 자신들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삼손을 그들 스스로 결박하여 대적의 손에 넘겨준 것이다. 결국 동족의 손에 결박당한 삼손은 레히에 진을 치고 있던 블레셋의 진영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은 삼손은 자신을 결박했던 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물리친다. 매우 무더운 여름철에 블레셋 사람을 도륙하는 동안 육체적으로 지친 삼손은 하나님께 갈증을 호소하고, 이에 하나님께서 ‘엔학고레’(부르짖는 자의 샘)라는 샘을 터뜨려 삼손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신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육적인 갈증(문제)은 물론 영적인 갈증까지 해소해 주시고, 우리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부르짖기를 바란다.
여호와의 신에 충만하여 큰 역사를 이룬 삼손이었지만, 갈증이라는 참기 힘든 어려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러한 상황에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혀 캄캄하여 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갈증에 허덕이는 삼손에게 허락하신 ‘엔학고레’와 같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1천 명의 블레셋인을 물리쳤던 것만큼이나 커다란 무기, 곧 기도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고 여호와께 부르짖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 우리에게 ‘기도’라는 가장 큰 영적 무기를 허락하신 하나님! 살아가면서 삼손이 갈증의 난관에 직면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삶의 난관에 부딪혀 허덕일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육신의 갈증은 물론 물질의 갈증, 질병의 갈증, 영적인 갈증 등 우리 삶에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갈증(문제)이 닥쳤을 때 삼손처럼 기도의 무기가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우리 삶에 ‘엔학고레’의 샘이 터져 모든 삶의 갈증들이 해결되는 역사를 맛보게 하여 주옵소서.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14)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삿 14:1~4).
육신적 욕망의 결과~~~~~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우리는 여호와의 영에 충만할 때 육신적 욕망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기에 노력을 한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을 경우에는 열심이 없을 뿐 아니라 세상의 쾌락에 빠져 하나님의 일을 잊고 살아가게 된다.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사사로 임명된 삼손이었지만, 사사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에 앞서 인간적 욕정에 사로잡혀 단지 외모가 아름다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삼고자 한다. 삼손의 부모는 특히 삼손이 나실인이기 때문에 이방 여인과 결혼할 경우 우상숭배에 빠질 것을 우려해 결혼을 반대하지만 결국 삼손의 끈질긴 요구에 못 이겨 허락하고 만다. 물론 삼손이 이처럼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그 여인의 미모와 성적 욕구에만 이끌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통해 블레셋 사람들의 호감을 산 후, 기회를 봐서 블레셋을 공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되는 처사라는 점에서 삼손의 행동은 옳지 못한 것이다. 즉 블레셋을 공격하려는 삼손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나실인인 삼손이 굳이 블레셋 여인을 취하면서까지 그 일을 수행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삼손의 계획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불순한 계획이었으므로, 나중에 결국 블레셋인에게 사로잡혀 두 눈을 뽑힌 채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수치를 당하는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물론 이방인과 통혼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들과 결혼하여 그들을 여호와 신앙으로 인도하여 선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에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는 삼손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저지른 악한 풍습이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나실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른 영적 통찰력을 갖고 있지 못하여 아내를 구함에 있어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이생의 안목과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줄 만한 여인과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매사에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육신적 욕망에 사로잡혀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 반드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할 때 성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물리칠 때는 자신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우리도 항상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영적인 존재로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하지만 첫 사람 아담이 육신의 정욕에 얽매여 하나님을 부인하고 에덴에서 쫓겨났듯이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얽매여 아담처럼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했을 때 홀로 블레셋의 군대를 물리친 삼손을 기억하고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적인 복과 능력을 더해 주셔서 이들이 하는 모든 영역에서 맡겨주신 달란트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무더위가 물러가고 수확의 절기를 맞이하여 더욱 영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의 묵상(0913)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삿 13:8~14).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은 참으로 복된 일이며, 그 일을 추구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우리가 가끔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계획’에서 나온 인위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입산, 엘론, 압돈 치하에서 25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이스라엘은 다시 영적으로 해이해져 하나님께 범죄 하게 된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40년간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붙이셨다.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삼손의 잉태 소식을 전해준다. 이러한 꿈같은 이야기를 들은 신앙이 돈독한 마노아는 그 자리에 없었음에도 전혀 의심치 않고 오히려 때가 되면 약속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기도하며 ‘낳을 아이’에 대해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를 하나님의 사자에게 묻는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계시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힘써 기도했다. 또한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아들을 낳을 경우 어떻게 양육할지를 묻는다. 결코 자신의 ‘욕망’이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임하기를 간구하고 그대로 행할 것을 다짐한다. 이처럼 마노아는 아이에 대한 모든 판단과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나님께서 마노아에게 직접 나타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그때보다도 더 분명하고 똑똑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힘써 읽고 배울 때 믿음도 성장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순종하는 태도는 올바른 신앙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게 되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목표를 향해 애쓰다 보면, 그 목표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고 성취욕구가 너무 강하면 때때로 ‘환청’이나 ‘꿈’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때 들려오는 ‘환청’이나 ‘꿈’을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할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를 이용해 무자격 목회자나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무지한 이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등 사기를 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마노아처럼 기도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때로는 기도조차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평소에도 말씀과 기도의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하여 주시고, 그 뜻을 바로 알고 행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는 내게 해로울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과감히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줄 아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