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든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조선일보/최영미의 어떤 시』2023.09.11.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있으나 실은 섬뜩하고 차가운 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정원’을 다녀온 날 밤에 김승희 시인은 이 시를 썼다. 그날 일본 정원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흰 장갑에서 불현듯 차가운 파시즘의 냄새를 맡았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결혼과 식민주의 담론과 연결시켜본 시. 남녀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혼식을 정치적 시선으로 분석해보고 있다.” (김승희, ‘남자들은 모른다’ 169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1행의 ‘신부’(神父)와 4행의 ‘신부’(新婦)는 한글 발음은 같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다.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하는 절묘한 대응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