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의 집단사고
반만년 역사에서 세종시대만큼 집단지성이 꽃피운 적이 없었다.
두뇌들의 협업이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만들었고,
집현전의 집단지성은 한글 창제로 이어졌다.
집단지성의 분출은 다양한 생각들이 제약 없이 흐를 수 있게
만든 소통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세종은 소통과 포용의 리더였다.
하루는 어전회의에서 형조참판 고약해와 의견충돌이 빚어졌다.
토론 도중에 고약해가 벌컥 화를 내고 나가버렸다.
고약해를 감옥에 가두라는 신하들의 주청이 줄을 이었다.
세종은 “그의 무례를 벌한다면 임금이 신하의 간언을 싫어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며 불문에 부쳤다.
세종은 백성의 비방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했다.
“백성에게 누명을 씌운 관리는 엄벌하되 임금에게 험담한 백성은
용서하라.” 이런 관용이 있었기에 창발적 아이디어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사상 최악의 코로나사태 와중에 느닷없이 집단지성이 소환됐다.
중앙사고수습본부는 그제 기모란 청와대 방역기획관의 책임론이
불거지자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안은) 지방자치단체·중앙부처 등이
모여 집단지성 아래 만든 것”이라고 강변했다.
이견이 무시되고 동질성만 강조되는 것은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사고일 뿐이다.
집단지성이 여러 사람의 협력이나 경쟁을 통해 얻어지는 지적
성과라면 집단사고는 충분한 토론 없이 합의에 이르는 집단착각이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소통이다.
‘소통 정부’를 천명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대통령 지시에 이견을 제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의무”라고 외쳤다.
실제 행동은 정반대의 불통이었다.
이견을 제시하는 공직자를 내쫓거나 억압했다.
야권 1, 2위 대선주자도 그 결과물이다.
대학가에 정부 비판 대자보를 붙인 청년은 압수수색까지 당했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선 사제를 선출할 때 후보자의 약점을 들추는
‘악마의 대변인’을 뒀다.
집단사고에 빠지는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였다.
유대인들은 만장일치가 나오면 해당 안건을 무효 처리한다.
의견이 모두 같으면 합의 과정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정부 사람들은 그걸 집단지성이라고 자찬한다.
정말 못 말리는 초록동색이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