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서:설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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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견해가 천명되었고, 불교숭상과 풍수지리설의 혹신(惑信)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後嗣)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사상은 호국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당시 성행한 풍수 ·도참사상이 반영되어 있는데, 태조는 이를 그의 실생활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정책면에 적응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 《훈요 10조》는 왕실 가전(家傳)의 심법(心法)으로서 태조가 그의 후손에게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고, 신민에게 공개될 유훈은 아니었다. 그 내용이 사서(史書)에 실린 뒤로는 식자간에 널리 알려져 후일 흔히 군왕을 간하는 신하들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그러나 훈요십조 내용 중 지금의 현재에 와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여덟 번째의 내용으로서 아마도 KBS 역사스페셜에서 논란의 진위여부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음을 엿 볼 수 있다.
한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아픔이 어디 한두 가지 일까 만은, 아직도 우리에게 애물처럼 달려 있는 것은 지역 감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역 감정이란 동서고금의 어느 곳에나 있었던 것이라고는 하지만 특히 우리의 경우에는 그 골이 너무 깊어 많은 사람의 가슴에 멍울지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호남 기피'였다. 이 문제는 사회과학자들의 오랜 쟁점이 되어, 누구는 군사정권의 개발 편중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 이남과 금강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
이러한 차별의 근거는 호남이 배산역수(임금이 있는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달린다)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이 남긴 이 유언은 제도적 차별도 정당화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차원에서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유발했다. 풍토적으로 볼 때 백제의 유산을 받아 이지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감적인 호남인들은 이로 인해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런데 이 배산역수의 논리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의혹이 있다. 여러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정말로 훈요를 남겼는지, 그것이 꼭 10조였는지, 그리고 그 8조에 호남 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훈요십조가 의심을 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 편에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이라는 인물이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로·제안 조)
최항은 경주 황룡사의 중창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로의 손자이며, 최승로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둘째,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남길 만큼 백제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살펴 볼 때, 왕건이 이 훈요 8조대로 호남인들을 관직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백제를 미워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왕건이 견훤과의 원한 관계로 인해 호남을 미워했을 개연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청주 일대의 저항 세력이었지 지금의 호남 세력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와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이자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인이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 태생의 순천 박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 사람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다.
셋째, 고려 왕실이 그토록 호남을 기피했다면 거란의 침입 당시에 현종이 굳이 호남으로 피난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다. 즉, '고려사'(현종 2년 정월 기해 조)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전주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건의 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 후손에 대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그토록 강력했다면 왕은 영남이나 강원도로 피난했어야 옳았지 호남으로 피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훈요십조와 호남 기피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볼 때 금강이나 차령산맥이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오 생활 터전이었던 낙동강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차령산맥은 경주에 대해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결국 호남을 배산역수로 본 것은 고려인의 시각이 아니라 신라인의 시각이었다.
금강의 역수론에 대해 이익은 좀더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금강은 반궁수(反弓水), 즉 강의 모습이 마치 개경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기 때문에 흉지라는 것이다(성호사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논증이다. 왜냐하면, 개경에 대한 반궁수를 따지자면 턱밑에 있는 한강이 먼저이지 600리나 멀리 떨어진 금강을 거론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저술은 이중환의 '택리지'였다. 그는 8도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하면서 유독 전라도에 대해서만은 악의적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여행이라면 구경거리 많은 호남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외갓집이 나주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가보았음 직한데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다.
이중환이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에 있으면서 목호룡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光山·광주) 김씨의 고변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 년을 유리걸식한 다음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그의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첫댓글 역시 넌 좀 뭘 아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