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간구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
마태복음 6:9c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의 완벽한 일곱 종목의 간구는 두 부분으로 대별되며, 10계명의 전후 부분과 대충 상응합니다.
전반부는 세 가지 간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님 및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표의 시작, 중간,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홀로 이루어지는 영역입니다.
이 세 가지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일치합니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언제나 3이 완전과 신성을 나타내는 거룩한 수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후반부는 네 가지 간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넷이라는 수는 피조물을 상징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의 시작, 중간, 끝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의 제공으로부터, 죄의 용서, 인도하심, 투쟁 중의 보호, 최종적 구원이 차례로 진술됩니다.
이 두 종류의 상호 순서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이 첫째이고 인간은 둘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구 이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순서입니다.
자발적으로 이러한 순서에 따르는 자는 정말 적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지향하고 다음으로 자신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1] 먼저 이 간구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문자적으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노마(헬3686)는 일반적으로 '이름'을 뜻하며, 본문에서는
(1)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습니다(창 17:1, 출 3:14, 6:2). 진실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의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기 때문에 여호와 자신을 말함에 있어서 그 이름이 대용될 수 있습니다(레 18:21; 시 7:17; 암 2:7; 미 5:4).
따라서 그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나 '야웨'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4문자(YHWH)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신성 4문자라 부릅니다.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하므로, 유대인들은 습관적으로 그것을 발음하지 않았습니다.
사본 필사자들이 신성 4문자를 기록할 때는 매번 완전히 목욕하고 완전히 옷을 갈아 입었으며, 그 문자들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붓을 부러뜨렸습니다.
감히 입으로 말하기가 황송한 '여호와'라는 이름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회당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 또는 읽는 자들이 그 이름을 볼 때 명사 아도나이, 즉 '나의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여호와'라는 실제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곧 헛되이, 경솔히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옛적 유대인들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평하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장엄하심과 거룩하심에 대한 그들의 감각은 칭찬할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서 헛되이, 경솔히,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이렇게 존경과 높임을 받으며 영광되게 하옵소서 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바로 그의 이름입니다. 그의 이름으로써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그 이름은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알려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해 자기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살펴 봅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엘, 또는 엘로힘 이란 용어를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 이름을 사용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의 힘과 지배와 능력에 대한 감각(센스)를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히 엘로힘은 피조물과 관련하여 전능의 작용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엘은 모든 것을 아시며(창 14:18-22), 모든 것을 보시며 (창 16:13),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시는(시 57:2)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크고 놀라우신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이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영원히 자존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특히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구속받은 자들의 하나님을 보여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로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능력보다 그의 의지와 관련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명령하고 이루시며, 그의 백성의 예배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신 32:15, 17).
엘 엘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천지의 소유자와 지배자임을 나타내셨습니다(창 14:18; 시 83:18).
삿다이는 '전능자'로 번역되며, 하나님은 이 이름으로 자신을 힘의 근원보다는 주시는 은혜 곧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주”를 뜻하는 하나님의 세가지 이름 아돈, 아도님, 아도나이는 간단히 구별하면 아돈은 통치자로서의 주를, 아도님은 소유자로서의 주를, 아도나이는 복을 주시는 자로서의 주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다른 표현들에서 이름이 성품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 9:10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분을 의지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분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사람이 그분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시 20:7에서 시편 기자는 "혹은 마차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느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에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간다"고 외쳤습니다.
이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로페카(라파)-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출 15:26).
여호와 메캇디쉬켐-너희를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출 31:13).
여호와 칫케누-우리의 의이신 여호와(렘 23:6; 33:16).
여호와 이레-여호와가 준비하시리라(창 22:14).
여호와 닛시-나의 깃발(승리)의 여호와(출 17:15).
여호와 샬롬-평화를 주시는 여호와(삿 6:24).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삼상 1:3).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겔 48:35).
여호와 로이-나의 목자이신 여호와(시 23:1)등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 대하여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을 주심으로써 자기를 나타내셨고 그의 성품과 존재를 인간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다음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아스테토’는 '거룩하게 하다,
성결케 하다, 성별하다'를 뜻하는 하기아조(헬37)의 명령 과거 수동태로, 여기서 '거룩하여지게 하시옵소서'이며,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완전한 실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행위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합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하실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김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길 때 그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거나 여김을 받게 됩니다.
힐(D. Hill)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거나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높인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로메아어(Krnst Lohmeyer)에 따르면, 주기도가 기원하고 있는 성화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상반되는 감각적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림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존재와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와 같이 행위를 존재에, 그리고 존재를 행위에 일치시키는 사람이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안에서 모든 인간적, 역사적 존재가 고양되고, 그리하여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또한 그 자체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통한 세상의 성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인류도 결국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을 나타내시는 성화 과정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간구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이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영광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간구는 자기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자신의 본 모습 그대로를 알려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에 대한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간구는 인간들에게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확신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들이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는 한, 인간이 그 이름에 대한 지식이 없는 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해,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본성(또는 성품)이 알려지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가 주기도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해 볼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온 인류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점들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모든 인류에게 있어 가장 깊고 근본적인 요망 사항 이라는 사실,
- 그 지식이 인간의 사상과 삶의 전 구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모든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
- 내적인 것(inward)이 외적인 것(outward)에 선행한다는 사실.
- 주기도문의 여러 간구의 순서가 보여 주듯이, 지식은 감정과 실제적 삶의 안내자라는 사실들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려는 갈망과 더불어 노력하겠다는 서약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보다 충분하고 깊은 지식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는 열망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어떤 분을 만나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그에게 굴복하여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면서 축복하여 주기를 간구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그분에게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몰라서 그 이름을 묻거나 그분을 부를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은 그 본성 또는 성품의 표현이며, 야곱의 고별의 간청은 입술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깊은 어떤 것을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오로지 자기를 축복할 수 있는, 바로 지금 자기와 이야기 하고 있는 그분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분명하고 깊은 지식을 갖기를 갈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친교의 시간을 끝내고 그곳에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적어도 그의 가장 깊은 마음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평화로운 진리가 위안과 격려를 주고 어떤 감미로움이 되는 속삭임을 사랑의 징표로서 지니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처음에는 거절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녕 나는 나의 성품을 네게 더 계시할 필요가 없다. 너는 충분한 빛을 가지고 있다. 네게 필요한 것은 통찰력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미 우리에게 알리신 것들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야곱보다 더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 자연 계시에서,
- 성경 계시에서,
- 하나님의 섭리에서,
- 기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힘을 얻는 그와 교제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원천을 가집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알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위대한 매개체입니다.
그를 떠나서 인간 자력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요 17:26).
이것은 모든 구속사역의 결과이며, 하나의 장엄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보다 충분하고 깊은 인식과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그의 축복을 받고 그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서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우리는 시편 기자 처럼,
하나님을 반석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평화로,
하나님을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로,
하나님을 우리의 의로,
하나님을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임재해 계시는 분으로 찬양하는 것을 기뻐했습니까?
시편 34편에 보면 "나와 함께 여호와를 크게 하며 다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자"고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며 완전하십니다.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러한 존재를 크게 혹은 더욱 크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이름을 더 높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사람들 중에 더 크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하고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크게 높이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하는 것과 관련된 한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신 광야에 들어왔습니다.
백성들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비난과 원망을 하면서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이 견디기 힘드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 20: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의 반역과 비난에 견디다 못해 그만 혈기를 내었습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이 반석에서 많이 쏟아져 나오자 백성들과 짐승들이 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물은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지 모세가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화가 난 모세는 자신의 능력이 물을 내는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 후에 모세에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은 주기도문에 있는 이 간구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성품으로도, 그의 말로도, 그의 행위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무거운 징계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볼 수는 있었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불타는 열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나의 영광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러 왔다. 내가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사오니,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장).
주님은 아버지께 속하는 영광 곧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아셨습니다.
주님은 이 영광을 보셨으며. 이 영광을 아버지와 함께 가졌으며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 의식으로 층만하셨으며, 주님의 최고의 소원은 인류가 이 영광을 알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주기도의 이 간구에서 이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온 세계가 하나님과 그 성품을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름을 위한 간구는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바라는 강렬하고 깊은 소원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관심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서,
- 하나님의 자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 보이소서
- 인간의 인식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바른 감정을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 인간의 경배와 찬미와 감사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곧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또 그렇게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인격과 행위로, 우리의 바른 감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그의 거룩한 속성들을 반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경배와 찬미와 감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헌신과 봉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보다 온 세상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든가 거룩히 여김을 받든가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든가 치욕을 당하든가 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즉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 그 이름을 기릴 수 있는 참된 길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이 이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3] 끝으로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간구가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일상적 기도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일시적인 필수품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의 영적인 요망사항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한 것을 제일 먼저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요망사항을 말씀 드리기 전에, 그것이 설사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원이 되고 있습니까?
기도할 때 마다 이것이 항상 우리 마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어떠한 절망 상태와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리고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어떤 큰 근심이나 문제가 있을지라도 잠깐 멈추고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없이 우리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알고자 하며, 우리의 기도가 효과적이며 가치 있는 것이 되게 하려면 이 순서를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참 지혜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번영하고 싶으면,
여러분이 평화의 기쁨을 누리고 싶으면,
여러분이 가치 있게 살다가 죽을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하여 지혜를 원한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곧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요망 사항을 입밖에 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어떠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 아멘 -
첫댓글 와우~ 잘 읽었습니다. 근디요 묵상으로 자리를 옮겨주시면 어떨까요~ ^^
헤헷 알았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