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라
(사도행전 23 : 1-11)
11월달 월삭새벽말씀이 다니엘 6장 10절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끊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 6장은 다니엘의 사자굴 처형 사건입니다.
창문을 열고...전에 하던대로 기도하며 감사하였더라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오 그의 나라가 멸망하지 아니 할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형통하였더라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사람입니다는 간증이 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합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인 앞에서 말하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변론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바른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간증의 시작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양심을 믿음 생활에 중요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양심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을 책임지고 있는 천부장은 그가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아닌 가이사랴로 가서 심문받게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1.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양심'의 헬라어 원어는 "알다" 또는 "인식하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양심'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양심은 도덕적 판단과 영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인가와 "함께 아는 것" 또는 "공동의 인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무엇인가 연합하여 판단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진심으로 가르치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3가지입니다. 그 3가지에서 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1) 먼저 청결한 마음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단순히 더러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도 팔복에서 이렇게 청결한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물리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잠언 3장 5-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사람을 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 바로 선한 양심입니다.
선한 양심과 이기적인 양심이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사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한 양심은 믿음과 매우 연결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양심은 믿음 생활에 커다란 무기가 됩니다.
3) 거짓이 없는 믿음 생활에 선한 양심을 잘 적용해야 합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함께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선한 양심을 잘 보호한 지체들은 믿음 생활을 잘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집사를 세울 때에도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8-9절에 “이와같이 집사들도 신중하며,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으며, 술을 탐닉하지 않으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으며,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믿음 생활에 양심을 잘 적용하고 살아야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할 수 있습니다. "꺼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2. 죽은자의 소망,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공회에 붙들려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심문하기 위해 사람들의 일부가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임을 알고 난관 앞에서 지혜를 발휘합니다.
그날에 그 두 부류는 사도 바울을 공격하는 데 하나가 되었지만, 그들의 신앙관이 달랐기에 결코 하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바리새인은 그것들의 모두 인정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자신도 예수님처럼 죽움에서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부활의 대한 바울의 확신과 소망이 사람들에게 다툼을 일으켰지만 부활신앙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들도 죽은자의 부활을 믿고 소망가운데 살아갑니다.
죽은자의 소망을 말합니다. 부활을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아멘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아멘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를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아멘
집에 들어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번호키가 있어서 번호를 누루고 들어갑니다.
자동차를 탈려고 하면 열쇠가 있어 열쇠로 열든지 열쇠키가 있어 눌려 자동차에 들어 갑니다.
번호를 누르든 열쇠로 열든 열려야 합니다. 에바다 열려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다시 사심으로 죄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의 승리는 전쟁의 승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는 육적인 승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형벌에서 이기는 승리입니다. 정죄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우리를 위한 승리자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승리가 나를 위한 승리임이 믿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승리의 수혜자는 바로 믿어진 사람의 것입니다. 따라서 승리의 수혜자인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정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노예, 사망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승리의 찬가를 부르면 됩니다. 승리의 혜택을 누리면 됩니다. 승리의 혜택은 생명입니다. 감사입니다. 기쁨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쓰러졌다하나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비록 육신이 병들었다 하나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몸은 아프고 고달프지만 영혼마저 곤고할 수 없습니다. 내 영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3. 담대하라
예수님은 고난을 이기도록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전개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이 있었던 다음 날 밤중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11절).
그곳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당한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로마에까지 가서 다시금 증언할 것을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인생 목적지 최종적인 비전은 당시 세상의 중심지였던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세상 출세를 위한 비전이 아니었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위한 비전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고 후에 참수형 당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그를 위해 로마에까지 가야 한다고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을 격려해주신 것이었습니다.
로마에까지 가야 하는데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호수아 1장 9절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지난주간에 감리교회 감독회장님 이취임식이 있습니다. 목회 46년하신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설교가 마태복음 28장이었습니다.
1. 가서/현장으로 가라는 것이다. 인이 오면 좋치만 가서 복음을 전하라
가서는 복음을 전할때 좁을때도 있다.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가라
2. 가르치라/ 못하면 지적한다. 으로 가르쳐야 한다. 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라도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을 다해 가르쳐야 한다.
3. 지키라/한국교회는 전도 열정이 있고 가르치는 열정이 있지만 지키지 못한다.주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삶으로 지켜서 교회회복해야 한다.
초대교회가 소수였지만 그들의 삶이 거룩하기에 순교하였기에 거룩한 변화가 일어났다.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을 바꾸지 말라
4. 세상 끝날까지/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가서 가르치고 지키는 것을 좌절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라 감리교회는 전도하는 일, 가르치는 일, 말씀을 지키면 다시 부흥이 온다. 교회는 삶으로 보여주라 감리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의 빛으로 나가야 한다.
오늘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깨닫게 되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향한 비전 이 세상을 향한 목표를 삼는 비전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는 자는 오직 하나님 나라를 비전으로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이 세상의 상급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상급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60이 넘는 인생 말년에 겉사람은 후패할지라도 속사람은 더욱더 새로워지는 모습입니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죽은자의 소망 부활을 가지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속사람으로 더욱더 새로워지는 것을 간증하는 승리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