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가슴에는 길이 있다
문희봉
쥐어짜다 만 빨래 같은 몸과 마음이지만 누구나 저마다의 가슴에 길 하나씩을 갖고 있다. 그 길은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가야 하는 길이다. 애인한테 들었던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워요.’ 했던 그런 길이 아니다.
사시사철 꽃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투덜투덜 돌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나이는 먹었지만, 꽃길을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도 시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은 시간 늘 준비하며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사람의 나이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시련이란 누구한테나 오는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 여하에 따라 사람은 몰라보게 달라진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그런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 나한테 닥쳐올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가졌다면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겨울 파도의 격랑은 무척 거센 법이다. 알고 대처하면 못 이길 일이 없다.
시련이란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그 시련을 쉽게 물리칠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결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시련이란 해가 떠서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도래하는 것이다. 인생은 한 번은 넘어진다. 그렇다고 포기는 안 된다. 노력하면 길이 생긴다. 도전하는 사람은 꿈을 잃지 않는다.
권투선수 홍수환이 만든 사자성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적지에서의 권투시합, 네 번 쓰러졌다가 다섯 번째 일어나 상대를 코트에 눕히고서 만들어낸 ‘사전오기(四顚五起)’ 말이다.
시련이 닥쳐오면 고통과 맞서 정면으로 통과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시련이 닥쳐오면 고통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반성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시련이 찾아왔을 때 약한 모습 보이면서도 의연하게 일어나는 사람을 나는 존경한다. 시련이 오면 그 고통을 밑거름 삼아 마음에 자비와 사랑을 쌓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사람이란 위기의 순간에 강해진다.
지칠 대로 지친 소금물에 절여진 배춧잎 신세지만 시련이 왔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점을 찾아 반성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시련이 왔을 때 모진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을 나는 흠모한다.
얼마나 잘 지켜질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지키려는 노력만은 게을리하지 않겠다. 시련이 지나간 뒤 고통의 시간을 감사로 되새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것이다. 산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더더욱 신나는 일이다.
남을 위해 사는 방법 가운데 내 삶을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는 삶이라면 더없이 좋다. 그래서 나는 하루 한 가지 이상 베풀기를 실천한다. 베풀기라는 것이 엄청난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봉사다. 공동주택 현관 앞에 떨어진 휴지 줍기에서부터 손수레 밀어주기, 몸이 불편한 사람이 들어오고 나갈 때 잠시 문 잡아주기 같은 것들이다. 아주 쉽다. 어렵지 않다. 요양원이나 복지관 같은 곳에 아주 적은 금액이라도 후원하는 것도 내 삶을 쪼개주는 방법이다.
또 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것, 잘한 사람에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그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며 이름을 불러주는 것,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꼬옥 안아주는 것, 그 사람의 단점마저도 웃으며 칭찬해 주는 것,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는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루는 잠깐이다. 그 하루가 쌓여서 만들게 되는 아름다운 생애를 나는 희원한다. 사람은 사랑과 행복을 가득 채울 빈 그릇을 가슴에 품고 태어난다. 원래 사람은 외로운 존재라서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하지만 사실은 빈 그릇에 사랑과 행복을 가득 채우지 못해서 느끼는 공허한 마음을 외롭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모든 길은 열려 있다. 수많은 길이 있지만 내가 걸어가야 길은 따로 있다. 아무리 좋은 길도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되고 만다. 막힌 길은 뚫고 가면 되고, 높은 길은 넘어가면 되고, 닫힌 길은 열고 가면 되고, 험한 길은 헤치면서 가면 되고, 없는 길은 만들면서 가면 길이 된다. 길이 없다 말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일 게다.
내 몸속엔 나도 모르는 깊은 샘이 하나 있다.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런 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다.
그 조그만 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는 용기가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동행의 기쁨, 끝없는 사랑, 이해와 성숙, 인내와 기다림은 행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항시 희뿌연 구름으로 덮여 있던 마음이 가을하늘처럼 활짝 갠 것을 느끼는 오늘이다. 가슴이 다 찢어진 창호지 문처럼 너덜거려도 길을 만드는 데 소홀해선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