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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09주일설교 요한복음1:35-51
본문: 요한복음1:35-51
제목: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오늘은 요한복음1:35-51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요즘도 그런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지만
옛날에는 그런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의사나 판검사 사위를 보려면
세 개의 열쇠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집 열쇠와 차 열쇠와 사무실이나
병원 열쇠이었을 것입니다.
의사가 되었다고 판검사가 되었다고
갑자기 열쇠 세 개를 받는 세상 참 부조리 합니다.
그런 그들이 권력 중심에 있고
그들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세상이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제로 우리가 열쇠 하나 만들기 위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자동차를 하나 사기 위해서
집을 하나 사기 위해서
또한 직장이나 가게를 하나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까?
그런 열쇠를 하나 만들기 위해
우리는 많은 창피를 무릅쓰기도 하고
때로는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를 버리기도 하고
이별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열쇠를 장만합니다.
하지만 마련한 열쇠만 있으면
우리의 세계는 달라집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 열쇠가
저 일을 위해서 저 열쇠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어떤 열쇠가 필요한지 몰라
혼돈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호텔에 가면 만능키 마스터키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문이나 열 수 있는 열쇠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문제를 열쇠 하나 가지고
해결하여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런 마음을 느낍니다.
답답하던 문제가 어느 누구를 만나니 시원하게 풀립니다.
어렵던 문제가 누구를 만나니 쉬운 문제가 되어 풀립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분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무슨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까?
누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1.예수를 만난 사람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둘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로다 라고 외치었습니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메시아
우리는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들은 두 제자는
뒤도 안 돌아 보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보내는 세례요한이나
진리를 쫓아 과감히 떠나는 제자들이나
참 멋지고 아름다운 부분입니다.
그 한 사람이 안드레였고
한 사람의 이름은 안 나오는데
켐벨 몰간이라는 성경 주석가는
나머지 한 명은 사도 요한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스승이라 여기었던 그들이었지만
참 스승이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갈보리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면서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던진 첫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구하느냐?”였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요한복음에서 마지막 질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요한복음21:15-17절에 나오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하고 또 질문하였습니다.
스승이 하는 일은 질문하고 질문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인간 존재 의미에 관한 질문이요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 질문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두 질문에 대해서
바르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고 있으며
누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궁극적인 것
곧 진리를 갈급하게 찾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는 말씀을 통해
‘메시아를 구하는(만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 다음의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면
’그 메시아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아냐?‘
즉 ‘메시아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끝장에서 결론으로
우리에게 그 메시아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묻게 됩니다.
“무엇을 찾고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38절)
즉 선생님이 묵고 계신 곳을 찾는다고 대답합니다.
유대인들의 스승 랍비는 보통 제자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유대교의 틀에 갇혀 있었으므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예수가 묵고 계신 곳을 찾았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그날 함께 거하였습니다(39절).
그 시각이 열 시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각은 우리 시각으로 오후 4시경으로
이 시간은 곧 새로운 날이 시작될
저녁이 가까운 시각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가 저녁에 시작되어
저녁이 되기 전에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도 금요일 날 해가 지는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 해가 지기 전에 끝이 났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너무나도 뜻깊은 스승과의 첫 만남을
요한은 일생 이순간을 잊지 못했기에
그 시각까지 상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록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소망
곧 구원을 완전히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
곧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2.예수를 만난 후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난 안드레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는
가만히 자신만 예수님 앞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감격을 이 은혜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형제인 시몬 곧 베드로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형제요 마음을 나누고
꿈을 나누었던 시몬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저녁에 형제 시몬을 찾아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말하면서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41,42절).
우리는 선생을 만나면 그 선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친구에게 함께 삶을 나누는 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의 인생 속에서도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를 통해서 선생을 만나고
세계를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지만
믿고 따라와 같이 만나는 사람도 있지만
별거 아닌 것처럼 부정적으로 거부하며
따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시몬에 대해서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안드레의 형제 시몬이지만
장차에는 베드로 곧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가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세례요한이 앞에 왔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앞선 분이셨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먼저 만났지만
나중에는 베드로가 앞선 제자가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도
베드로에게 지도권과 우위권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안드레는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습니다.
뒤에 있는 자였지만
그의 역할을 잘 감당한 제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도 아닙니다.
우리가 앞에서 행할 수도 있고
뒤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 뜻을 행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작을 일이라도 뒤에서 하는 일이라도
사람들에게 덜 인정받는 일이라도
그것은 중요한 일이며 주님 앞에 인정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는 그렇게 안드레와 베드로를 만난 다음 날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미 친구들인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좋은 친구를 두는 것은 중요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듯이
친구가 하는 일은 따라서 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난 빌립은
친한 친구에게 그런 나눔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빌립하고만 친한 친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절).
우리가 알 듯이 모세는 율법의 대표이고
선지자는 엘리야가 대표입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말했다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은 예수가 구약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로 초청에
나다나엘은 거부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면서 빌립의 말에 회의 적이고 부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나사렛은 구약성경이나 랍비들의 문헌에도
전혀 언급된 일이 없는 하찮은 곳이었습니다.
나사렛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결코 드러나지 않은 촌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같은 나사렛 출신이라면
그는 메시아 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빌립은 긴 말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께로 인도하였듯이
그를 데리고 예수께로 데려갔습니다(46b절).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본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된 야곱은
본래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을 차지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만나고
‘브니엘의 아침’을 경험한 이후
그는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이름은 ‘야곱’(넘어뜨리는자, 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창세32:28).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의 명예로운 호칭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나다나엘 속에서 참 이스라엘 사람임을 보았던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줄 아시는
신적 통찰력을 갖춘 분 즉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무화과 나무 아래 있다”라는 말은 서기관들이
흔히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그리고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율법을 공부한 데서
연유된 랍비들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나다나엘이 행한 예수님의 답변은
나다나엘이 율법서를 공부하면서
특히 메시아 대망을 열중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는 암시합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놀라운 한마디 말을 토해냅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이스라엘 왕’과 같은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왕을 흔히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삼하7:14, 시편2:7)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하나님과 밀접하게 결속된
관계를 가진 메시아적 칭호이고
‘이스라엘 왕’ 칭호는 하나님의 왕권을
이스라엘에게 재건할 메시아임을 뜻하는
메시아적 칭호입니다.
3.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51절)
나다나엘의 고백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50절)
메시아를 만나는 일 그보다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메시아를 만나는 일로만 끝내서는 안됩니다.
그가 이룰 더 큰 일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하면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은
아멘 아멘 이란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내 기도가 진정성 있는 기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는 의미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시작되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입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 시작되는 말만
기억해도 요한복음의 핵심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1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칭할 때
사용된 칭호입니다.
인자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먼저 계셨던 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분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일을 완성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28:12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옛날 야곱이 형을 눈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갈 때
루스-벧엘에서 밤에 꿈을 꾸는데 사다리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꿈을 꾸고서 야곱은 그 계시의 장소를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하면서
그 땅 루스를 벧엘이라고 새롭게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옛 야곱은 옛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듯이,
새 야곱인 인자 곧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실로 옛 은혜를 대체하는 새 은혜요,
옛 유대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그리스도 교입니다.
그렇기에 51절의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로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올라가신 예수님을
성육신 사건을 통해 내려오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부활 사건이란 시간이 영광과,
땅이 하늘과 통합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영원이 시간과, 하늘이 땅과 통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1:10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기에 요한복음은 하늘(위)과 땅(아래), 영원과 시간,
하나님과 인간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고
빛과 어둠, 영과 육, 참과 거짓,
생명과 사망이 예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고
유대인과 이방인, 예루살렘과 갈릴리,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게 됩니다.
땅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
죽으면 끝나는 인생의 삶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영원을 사는
하늘의 존재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서
갈라졌던 지역이나 사람이나 이념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문제나 해결하고 평안이나 얻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열려야 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경험해야 합니다.
요한 2장부터 펼쳐지는 말씀을 통해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가지고 요한복음 2장을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기대를 가지고 요한복음 전체를
읽어 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