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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k 뉴스에서 퍼온 것인데 흥미있는 주장인 듯 싶습니다. 이 글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
발해사를 찾으면 청(淸)역사는 우리역사 |
발해뗏목 탐사대장 방의천, 피를 토하듯 중국의 역사왜곡에 분노하다. |
지금 우리나라의 최대 화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고구려사 왜곡이며 우리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삼가고 있으나 우리의 중,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일반 국민들의 정서는 가히 폭발 직전이다. 그러나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제 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30년 전인 1975년 부터 그들의 동북아 역사왜곡은 시작되었으며 한반도에 대한 그들 시각의 단초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발해사에 대한 왜곡이었다. 당시 중국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부였다고 왜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사 연구가 일천했던....아니 전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한 우리의 국사학계는 이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부차원의 대응도 없었으므로 중국의 역사왜곡은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지금 고구려사 문제에 맞닥뜨린 것이다. 이에 필자는 고구려사와 직결된 발해사가 엄연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발해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뱃길로 일본과 교역했던 그 항로를 뗏목을 타고 탐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준비 중인 '발해뗏목탐사대' 대장을 만났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에서 아주 중요한 발언을 했다. 하지만 그가 우리 선조들의 뱃길을 재현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학자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가 타당한 주장을 한다면 그의 주장을 귀담아 들어야 하고 어쩌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학문적 연구를 새로이 해야할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사실 신라나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자녀들끼리 권력 쟁투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쨌든 고구려도 백제가 망한 시점에 같이 망하나 당나라나 신라의 정권이 이 고구려 땅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영토에는 부족장 통치 형태로 살아가다가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 20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 탈출하여 돌아온 대조영 부자에 의하여 진국이 창건되는 것이다. 이 진국이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228년간 존속했고 그 뒤 거란족이었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하고 요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발해의 후손 들은 바로 금나라를 세운다. 금나라는 바로 발해이다. 이 금이 나중에 후금이 되고 청이 된다. 사실상 중국 전역을 통일한 청나라는 우리 배달민족의 나라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은 우리 땅이며 우리가 지배한 나라이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비롯한 우리 역사와 중국역사에 대한 방의천 대장의 인식은 이렇게 확고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주장에 힘이 실린다면 우리의 역사학계는 지금까지 중, 고대사 를 우리 스스로 왜곡했거나 축소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발해의 역사를 더듬으면 고구려사가 한 눈에 보이고 발해의 역사를 찾으면 청의 역사가 우리역사가 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 첨예하게 대립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문제가 아주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이거나 아니면 이제 고구려사뿐 아니라 발해사와 여진 거란의 역사까지 얽힌 거대한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의 인터뷰 전문을 게제한다. 주 : 임=임두만, 방=방의천
방 : 98년도 5월부터다, 그 이유는 98년 이전 25년간 나는 산악인으로 살았다. 98년 1월에 설악산에 갔다가 토왕성 폭포에서 해외원정팀이 빙벽훈련을 하던 중 8명이 눈 사태로 죽는 참사가 있었다. 협곡 깊숙히 눈이 3~4m의 눈이 쌓였고 그 눈을 헤치고 시체 수색작업을 4~5일 하고 산장으로 돌아왔는데 우연히 TV를 통해 발해탐사의 기사를 보게되었다. 과거 우리의 조상들인 발해사람들이 무려 34차례나 일본과 사신왕래가 있었다는 기록이 지금도 일본사기에 남아있는데...물론 당시의 왕래기록은 뗏목이 아니라 범선을 이용했었지만.... 따라서 일본도 13회에 걸쳐 발해를 왕래한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이 모든 왕래 기록은 모두 발해의 선박을 이용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 기술로는 발해나 중국을 항해할 선박을 제조할 수 없었고, 항해술도 없었다. 그러므로 발해의 배를 이용했던 것이다. 그만큼 발해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뛰어났다. 최초(1월 15일 경)이 탐험대의 항해 기사를 보고 나는 이들이 참 멋있는 사람들이라 느끼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다가 1월 23일 일본 도고섬에서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된 것이다. 이 탐험대의 구성원 중 두사람은 한국해양대학교 학생이었으며 한사람은 사진작가 등 전문적인 탐험가는 아니었고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뛰어났던 사람들이었지만 전문적인 탐험가는 아니었다. 또 변변한 지원도 없이 열악한 상황에서 탐험을 꾸렸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탐험은 결국 아깝게도 참사로 끝나고만 것이다. 이들의 참사를 접하고서야 나는 탐험가로서 내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했는데....그 자각을 바탕으로 내가 뗏목을 띄워야 겠다고 생각하였으며 반드시 성공해야만 이들의 숭고한 넋이 위로될 것이라 생각했다. 임 : 단지 위로라는 명목만으로 하려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임 : 탐험에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방 : 나는 탐험에 성공하는 이유가 성공한 탐험가의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지 자연이 주는 운이 좋았을 따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히말라야의 고봉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들의 실력은 정말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단지 자연적 요건 등이 성공하기에 좋았을 뿐이고 실패한 사람들은 자연적 조건이 나빴다는 것, 그 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고질병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어떤 탐험이 실패하면 그 뒤 그 탐험에 대한 지원자는 거의 없다. 오늘날 선진국이 된 나라들의 역사를 보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이 지구 곳곳을 탐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래도 이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공하는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임 : 발해 뗏목의 구성원은 몇 명인가? 방 : 4명이다. 한국 해양대를 졸업하고 현재 인명구조 강사를 하고 있는 해양인 1명. 또 대구과학대학 영상미디어 학과 교수인데...이는 촬영담당이다. 그리고 전문산악인이 1명이고 나, 이렇게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 : 언제 어디서 출발하여 언제 어디로 도착할 계획인가? 방 : 2005년 1월 1일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28일 간 항해한 후 일본 니이가다항에 도착할 계획이다. 임 : 탐사에 드는 기본 비용 어느정도 예상하는가? 방 : 약 3억원 정도 예상한다. 임 : 그 비용은 마련되었는가? 방 : 지금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일단 전액을 후원자들을 통하여 지원받을 계획인데....정부(문광부)에서 일정액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오는 20일 오후 3시부터 7일 동안 태능 선수촌에 있는 동산하우스에서 서화전시회를 할 계획이다. 이 전시회에 그림 500점과 도자기 1200점을 전시 판매할 계획인데 이 전시회가 성공리에 종료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인터넷 뉴스사이트들을 통한 국민 모금 운동을 전개할 것이며 많은 후원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임 : 당신은 탐험가로서의 직무유기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국내의 모든 탐험가가 다 이러한 탐사계획을 하고 실행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당신은 탐험가로서의 직무유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알고 조사한 바로는 당신에게 깊은 역사의식이 있다고 들었다. 말해줄 수 없는가? 방: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괜히 잘난체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이 탐험에 별다른 의미를 부치고 싶지 않다. 방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고구려사 문제만 생각하면 나는 분통이 터진다. 내가 알기론 지금 중국의 역사 전체는 우리민족이 중국땅 전체를 지배한 우리역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우리역사에 대한 확고한 정립을 했더라면 반대로 중국이 우리에게 역사왜곡을 하지말라고 요청해야 하는데...다시 설명하겠지만 중국의 역사를 우리역사로 써도 역사 왜곡은 아닌데...지금 우리가 중국에게 항의하고 있으니 너무 화가나는 것이다. 임 : 발해의 역사가 정확히 서기 몇 년부터 몇 년까지인가? 방 : 서기 698년에 건국되어 서기 926년에 그 국호가 사라졌으므로 총 228년 동안 한반도 북방과 중국의 만주 일원을 지배한 나라이다. 문헌에 보면 발해의 땅이 사방 6000리라고 했으니 얼마나 광대한 나라였는지 짐작할 것이다. 임 : 지금 국내의 화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의도적 고구려사 왜곡이다. 그런데 사실 고구려사에 대한 중국위 의도적인 왜곡에 대한 기초 근거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이 제공했다는 논리도 나오고 있는 중이다. 즉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한 역사해석이 우리역사의 주류를 이뤄왔으므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통일론이 나왔고 이 삼국통일론으로 하면 당시 신라의 북방경계선인 한주 이북의 역사 자체에 대한 의도적 회피가 이뤄졌으므로 중국에게 역사왜곡의 빌미를 준 것이라는 논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방 : 난 전문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알고있는 부분만 답하겠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는 다시 생각해 봐야할 부분이다.사실 나당 연합군과 백제와의 전투는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삼국을 통합하기 전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연합이었다. 그 때 당시 신라나 당나라로서 고구려는 엄두도 내지 못할 상대였기 때문이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고 있는 중 고구려는 내부의 분란때문에 망하게 된다. 이는 기록으로도 확연하다. 즉, 고구려와 나당연합군이 치열하게 싸운 기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지적 전투는 있었지만 국가의 흥망을 걸고 싸운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고구려는 서기 668년에 왕조가 망하게 되는데 당시 고구려의 지배층 계급 약 20만 명(혹은 50만명)이 중국의 영주로 강제 이주 당하고 이 지배층의 일원에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대조영 아버지(걸걸중상)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나라에서 인질로 30년을 살다가 탈출하여 동모산(지금의 간도땅)서 진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이 때가 서기 698년이다. 그리고 원산을 기점으로 신라와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결국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나 그 기층민중은 당연히 고구려족이었으므로 사실상 신라는 한주 이남지역을 통할한 국가였고 그 이북 지방은 발해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역사에서 삼국통일은 없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상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 당시 상황을 남북조시대라 주장하기 시작한다. 즉 지금까지 사기의 경전으로 떠 받들던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해석된 신라의 삼국통일은 역사적으로도 허울 뿐이고 실질적으로 발해국이 창설되기 전에도신라의 통치권력의 힘은 원산 이북으로 미치질 못했다.는 것인데....사실 발해의 영토가 된 옛 고구려 땅은 사실상 신라의 영향권이 없었던 영토였다는 것이다. 대조영은 이 땅을 기반으로 발해를 건국했으니 발해는 당연히 고구려의 뒤를 이은 우리 역사이다. 그리고 기록으로 보면 발해의 전성기는 고조선 이후부터 가장 영토가 넓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우리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시기를 고구려 장수왕 시기라고 배워왔지만 이도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발해의 영토는 고구려보다 1.8배나 컸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건데 사실상 발해의 전성기가 우리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시기라고 나는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해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분단된 뒤 이북지방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신라에서 찾았기 때문이며 이와 반대로 북한은 또 고구려와 발해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국가라 주장해 왔으므로 민족적 정통성 대립에서 북한에 우위에 서려면 당연히 신라의 백제통합을 삼국통일로 이어야만 했었다는 가설을 성립시켜야먄 했던 것이다. 물론 어떤 이유로든 당시에 고구려도 망했으므로 이를 신라의 삼국통일로 무리하게 연결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발해사 연구가 원할하지 못했음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건국 후 발해사를 정통으로 연구한 학자가 귀했을 뿐 아니라 발해사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현재 7명 뿐인데 한규철 박사(부산 경성대 교수)가 발해사 1호 박사이며 한 박사가 박사학위를 받은 시점이 1993년도이니 발해사 연구나 우리의 상 고대사 연구에서 우리는 정말 할 말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임 : 당신의 생각에 나도 거의 상당부분 동의한다. 사실 발해 이 후 우리가 오랑케라고 했던 여진족이나 거란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선 여진족(麗眞族)의 여진(麗眞)은 참 고구려족이라는 뜻이며 거란족의 거란은 궐(闕)안 사람들을 순 우리말로 거란족이라 했으며 이 궐(闕)안은 고구려의 대궐안, 즉 고구려 지배층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므로 여진족이나 거란족은 사실상 우리 고구려의 후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살펴본적이 있는가? 방 : 중국이 고구려사를 침탈한, 아니 침략한 이유는 (침략전쟁이며 도발이다.) 명백하다. 중국은 이미 30년 전에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이미 30년 전부터 발해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은 사실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이는 종교에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생활상으로 침략하기도 한다. 방파제에 물이 스며 들듯이 알듯 모를듯 천천히 시작되는 것이다. 홍수가 나서 방파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면 모든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지만 아주 작은 구멍으로 스며들고 있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듯이 그렇다는 것이다. 임 : 위에서 내가 지적했지만 지금도 엄연히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인 거란족을 감히 북쪽의 오랑캐로 취급하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공영방송인 KBS 의 대하드라마인 무인시대는 고려의 무신정권을 다루고 있는데, 거란족의 침입을 보고받은 이 무신정권의 철권통치자인 문하시중 최충헌으로 분한 김갑수가 "감히 북쪽의 오랑케가 고려를 침략해?"라는 대사를 하는 것이다. 발해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써 이에 대한 생각은? 방 :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리고 능지처참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어찌 우리의 조상을 스스로 모독하는 말을 우리가 하는가 말이다. 우선 오랑캐라는 개념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오랑캐의 개념은 중국에서 나온 이야기인데...중국의 한족들이 동이족을 일컬어서 했던 말이다. 즉 한족(漢族)이 고구려의 후예들인 기마민족을 대상으로 칭했던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우리민족을 비하하는 말로 통칭했던 오랑캐라는 말을 우리가 썻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모독하는 사대주의 정신이다. 반대로 우리가 오랑캐라고 불러야 할 대상이 있다면 지금 중국의 한족에게 오랑캐라고 해야 맞다.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기마족을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중국 사대주의사관에서 나온 소산이라고 볼수 있다는 것이다. 거란족은 명백히 우리의 형제인데.....형제에게 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는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고 고려를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간 국가라고 보는 것도 상당한 무리가 있다. 고려는 고려를 창건한 궁예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고 이는 고구려와 발해의 모태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고려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북방으로 국토를 넓힌 광종의 북방회복에 대한 신념도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안착하고 신라출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고려사가 신라의 정통을 이은 것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니 이 또한 한탄할 일이다. 임 : 당신의 그 광범위한 역사지식에 찬사를 보낸다. 나도 당신처럼 정말 한탄할 뿐이다. 계속 가자. 사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게된 근본적인 이유는 양국 공히 상당한 필요가 있었다. 신라는 신라대로 백제가 차지한 그 광할한 평야지대가 욕심났고 당나라는 지금의 중국 서해안 밸트에 자리잡은 백제족들의 땅을 점령해야 했었다. 그러므로 백제를 쳐부시고 영토를 나눠가질때 중국에 자리잡은 백제족의 땅(실질적으로 백제 땅)은 당나라가 가져가고 한반도의 백제 땅은 신라가 차지한다는 약속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 대한 약속도 있었는가?
임 : 그렇다면 고구려가 망한 뒤 그 고구려 땅과 고구려족은 어떻게 변하는가? 방 : 고구려는 사실 신라나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자녀들끼리 권력 쟁투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쨌든 고구려도 백제가 망한 시점에 같이 망하나 당나라나 신라의 정권이 이 고구려 땅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영토에는는 부족장 통치 형태로 살아가다가 고구려 왕족과 귀족들 20만명이 당나라로 끌려간 뒤 탈출하여 돌아온 대조영 부자에 의하여 진국이 창건되는 것이다. 이 진국이 발해로 국호를 바꾸어 228년간 존속했고 그 뒤 거란족이었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하고 요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발해의 후손 들은 바로 금나라를 세운다. 금나라는 바로 발해이다. 이 금이 나중에 후금이 되고 청이된다. 사실상 중국 전역을 통일한 청나라는 우리 배달민족의 나라이다. 이렇게 보면 중국은 우리 땅이며 우리가 지배한 나라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금나라의 국호인 금(金)은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버지였으며 동부여의 왕이었던 금와(金蛙)왕의 후예를 자처하여 금나라로 했다는 것이다. 이 금와왕이야말로 단군의 후예이며 주몽과 온조의 아버지로서 우리민족의 실질적 뿌리인데...주몽의 기예를 질투하던 금와왕은 주몽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며 자신의 부인과 해모수가 간통하여 생긴 아들이므로 언젠가는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핍박했고 이러한 아버지의 핍박을 피한 주몽이 20년 후 동부여를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창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중시해야할 것은 고구려족과 부여족의 차이이다. 고구려의 창건시조인 주몽은 아버지의 나라인 부여를 이기기 위하여 기마부대를 조련하였고 금와왕의 부여국은 경보병부대의 원조인 말갈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갈, 여진, 거란족 모두가 다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었고 지금 중국의 선조들인 한족들은 이들을 단 한 번도 확실하게 이겨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황하 이남은 한족이 지배하였으나 황하 이북지역을 완전히 지배한 기록이 없다. 사실상 중국 전역을 통일한 나라는 몽골족이 통치한 원나라와 여진족이 통치한 청나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지적한대로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일한 청나라가 발해의 후예들이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선조들이 중국도 통일하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더 연구하여 중국의 역사침략에 대응해야 한다. 이는 역으로 우리가 중국역사를 지배했다고 말하고 중국이 그것을 부인하는 역사연구가 진행되어야 함에도 그 반대로 지금 중국이 우리의 엄연한 역사인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편입하려는 후안무치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임 : 상당히 근거있는 주장이다. 그 주장이 학설로 용인되기 위해서는 더 근본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해야할 역사적 사실을 고증으로 내놓아야 한다. 이에 대한 복안은 있는가? 방 :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확실하다. 자 한 번 가정해 보자. 고구려가 망할때 약 280~300만 인구가 있었다고 한다. 이중 50만이 이주했다고 하는데....20만이라는 설도 있고....50만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230~250만이 그냥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다시 30년 만에 대조영에 의하여 발해가 세워졌는데....어떤 기록(당나라 서기)을 보면 당시 발해의 지배층은 대조영(고구려인)이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끌려가고 남은 230~250만의 고구려 사람들은 다 어디갔는가? 납득 할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이러한 것들을 한국사를 쓰는 역사가들이 이어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 : 내가 오늘 당신과 인터뷰를 하고자 하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중 고대사를 보면 삼국시대와 발해의 역사까지는 그래도 그런대로 기록도 있고 연구도 활발하다. 그런데 역사의 기술에서 고구려-발해-요-금-청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족, 즉 거란 여진족의 역사가 고려 이 후에 아주 당연스럽게 사라진다. 내 생각은 위에서 지적한대로 여진족과 거란족이 고구려족의 후예라고 볼 때 이 민족은 고구려 족이며 당연히 우리의 선조이다. 그리고 만주도 당연히 우리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사를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교과서에서부터 역사기록까지 아주 당연스럽게 요, 금, 청의 역사는 중국역사로 가르치고 연구하며 고구려 발해까지만 우리나라 역사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중국에게 역사왜곡의 빌미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다. 당신은 어떤가? 방 : 그것이 바로 식민사관 때문이다. 임 : 그렇다면 발해 이후의 북방민족 역사가 우리의 역사 기술에서 사라진 시점이 언제라고 보는가? 방 : 삼국사기때부터라고 본다. 임 :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역사를 전면 부인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은? 방 : 일고의 가치가 없이 버려야 할 역사책이다. 임 : 고구려사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역사학자들이나 우리 정부가 정말로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방 : 할말이 없다. 당장 국면한 고구려사 조차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까지를 어찌 챙기겠는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했지만 사실 청나라는 우리의 역사다. 청나라의 민족은 고구려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회복하지 못하고서는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것은 중국을 지배했던 우리민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은 그 두려움의 뿌리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기상과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발해를 돌려가지는 것이다. 그 출발이 발해에서 시작되는 뗏목을 띄우려는 것이다. 임 : 뗏목으로 돌아가자. 뗏목의 규모에 대하여 말해달라. 방 : 뗏목의 크기는 6m*12m이며 통나무의 직경은 30CM, 이를 마닐라삼으로 꼰 끈으로 엮을 것이다. 여기에 항해에 필요한 안전장비와 항해 기간 중 필요한 식량 등 모든 장비를 실을 것이다. 임 : 정말 추진 동력장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나? 방 : 그렇다. 모든 추진력은 바람이며 그래서 돛을 달 것이다. 2개의 노가 필요하며 항해 중 계속 2명이 교대로 노를 저을 것이다. 물론 방향을 잡기 위한 방향키는 있다. 임 : 1월이면 굉장히 추울텐데 해상에서 더구나 야간에 필요한 보호 장비는 어떤 형태인가? 방 : 그러므로 장비는 최첨단 장비여야 한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100% 방수가 되고 보온성이 뛰어난 침낭형태를 준비해야 하고 계속적으로 우리의 행보를 알리려면 최신 통신장비를 탑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장비들이 해수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므로 이에 대한 준비도 철저히 할 것이다. 임 : 출발 및 도착 세레머니는 있나? 방 : 그렇다 출항식과 입항식을 할 것이다. 그래야먄 우리의 뜻이 만방에 알려질 것이다. 임 : 당신은 이 인터뷰 서두에서 탐험가로서의 직무유기와 우리 역사를 몸으로 고찰하기 위함이 그 이유라고 했다. 그 외에 또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방 : 발해 뗏목의 출발이유는 처음 이야기한 그대로 탐험가로서의 직무유기였고 우리의 엄연한 역사인 발해사를 몸으로 고증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이것을 실행하도록 만든 힘의 근원은 사실 다른데 있다. 첫째. 나에게 항상 질문하고 관심을 가져주었던 초등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초등학교 학과 시간에 순수한 아이들이 전화를 해와서 이번엔 정말 출발하냐? 언제 출발하냐? 고 물었고, 나는 그들에게 뗏목을 띄울 것을 약속했다. 그 아이들과의 약속이 이제는 정말 중요한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답을 해줘야 할 때가 왔다. 둘째, 탐험은 한번 시작해서 한번에 성공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탐험가다. 브레이크 뉴스의 기자인 당신도 탐험가고... 기사를 쓰는 작업 또한 탐험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자가 쓰는 기사가 전혀 발전이 없다면 그 언론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도 계속적인 발전을 해야하며 그래야만이 그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도 발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는 계속 탐험의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 한번 실패 했다고 다시 도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발전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탐험을 하다가 이미 죽은 사람들은 선각자이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그들을 위해 탐험은 성공해야하고 완성해야 한다. 이미 시작한 탐사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만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셋째, 발해의 역사는 1300년동안 무덤에서 잠을 자고 있다. 이러한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젊은이 4명이 무덤에서 꺼내준 것이 지난 1998년 최초로 뗏목탐사를 하다가 장렬히 순직한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꺼내놓은 발해의 역사를....무덤속에서 꺼내놓은 흙묻은 역사를 우리가 2차로 깨끗하게 닦아주는 작업을 하려는 것이다. 발해사와 고구려사는 이론적으로만 논문으로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했던 과정을 몸소 실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하는 이 일은 발해는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난 대한민국 국민이고 발해는 우리의 역사이다. 만약 발해사가 중국의 역사였다면 발해 뗏목을 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 : 그런 깊은 뜻이 있는 발해탐사가 무사히 성취되기를 소망한다. 방 : 고맙다. 지금 우리나라는 발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대중음악사에 대하여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서태지씨의 히트곡에 '발해를 꿈꾸며..'가 있고 또 어떤 정치인의 홈페이지 대문에는 '발해를 꿈꾸며'라는 슬로건을 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는 발해에 대한 꿈만 꾸고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발해를 꿈꾸지 않는다. 나는 발해를 간다! | |||||||||||||||
첫댓글 얼마전-_-....인가..재밌는 주장하나를 발견한적있었죠;;쥬신이 동이족에 원래명칭이고...쥬신에 이두식표기가 여러게인데..그중에는 물길 숙신....말갈등이있다고-_-...그러므로 역사상의 강했던 북방민족중 절반이 동이족계들이었고 모두 우리랑 같은 민족이라는-_-..................;;;;;;;;모두배달민족이라는 주장..;
아직주장이지만...워낙 이두표기가 다양했으니..아예 틀린말이라고 보기도;; 내심 저의 마음이..그러길바래서 믿어지는것인지...-_-
쥬신=조선 이죠 ... 삼국사기를 완전히 버려야할 책이라고 한건 왠지.......
쥬신이 조선이란건 저도 압니다 그책의 작자가 쥬신이라고 고유명사로 썻기때문에 저도 인용할때 쥬신이라쓴거고요- 작자가 나름에 생각이있었겠죠 한자발음은 조선인데 쥬신이라고쓴건;
그런소리를.. 들은적이 있는것 같네요.. 그래서 여진이나 말갈이나 몽골이나 한민족이 모두 하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