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3한국 붕괴 이후 서남해 마한의 진왕은 남한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남한지역으로 망명해 온 단군3한국의 번한.진한 유민들을 받아 들여 경상도에 살게 하여 신라와 가야로 성장하게 기반을 다져 주였고,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집단에게 한강지역을 내어 주어 동아시아 해상강국인 백제로 성장하게 기반을 다져 주었다. 백제.신라.가야로 성장하기 이전까지는 마한의 제후국가들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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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신촌리 9호분 금동관. 높이 25.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옹관묘'라는 독특한 묘제로 대표되는 영산강 유역 세력은 한국사에서 하나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으나,만주에서 남하한 부여 기마족이 세운 백제가 강성해지자 남쪽으로 밀려난 마한세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영산강 지역의 마한유물들은 마한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했던 열도의 마한유물들과도 연관된다.
충무공 이순신은 호남을 기반으로 7년 조.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말하기를,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다>라고 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이 말은 우리 민족사적으로 올바르게 이해되야 한다.
단군한국 붕괴 이후 남한 땅에서 백제.신라.가야로 성장한 남3한의 마.번.진한의 대통령으로서 남한를 다스린 마한 진왕의 마지막 도읍지 호남 나주다. 나주 반남고분군이 바로 마한 진왕들의 무덤들이며, 나주에는 남3한국을 다스리는 천왕(진왕)의 신분으로 북극성 자미원 궁에 계신다는 상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 있다.
그러니까 나주가 바로 마한 진왕의 도읍지가 분명한 것이다. 백제.신라.가야 3국의 기반이 바로 전남 나주를 마지막 도읍지로 삼았던 마한인 것이다. 일찌기 열도로 이주하여 아이누족을 열도 북쪽으로 밀어 내고 땅을 개척하며 건설한 일본 야요이 문명도 나주 영산강 사람들이 시작했으니 일본의 뿌리도 나주인 것이다.
고려 최고의 개혁적 지성인으로 권문세족의 부패와 수탈의 고려를 뒤엎고 이성계를 앞세워 조선왕조를 열었던 정도전도 유배지 나주에서는 부패와 수탈의 권력에 저항적이였던 민초들에게 배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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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 장수출신인 위만이 번한국 기준왕에게 망명하자, 따뜻하게 품어 주며 번한국 서쪽지역 경계를 담당하도록 벼슬까지 주었으나, 위만은 망명해 온 유민들과 합세하여 번한국을 공격하여 나라를 강탈함으로써 은혜를 배신으로 갚게 된다. 기준왕은 궁의 무리들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 전북 익산지역으로 들어 와서 궁궐을 짓고 한왕이라 칭하게 되니 남3한의 시작이다. 번한국이 망한 후에 번한국 유민들이 대거 마한국(한반도.열도)으로 망명해 오니 마한국도 분할되고 말았다. 만주는 부여가 들어서고, 북한지역은 번한국 유민국가들이 들어 서고, 남한지역은 번한국 마지막 단군인 기준의 무리들이 서남해 지역에다 한반도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마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마한으로 그대로 사용하고 경상도지역에는 망명해 온 진한국.번한국 유민들에게 내어 주어 마한 중심의 남3한국을 세우게 된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조]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에 조빙하였다. 마한 왕이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와서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이보다 앞서 지나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견디지 못해 동쪽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부분 마한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다가 이 때 와서 점차 번성해졌기 때문에, 마한이 꺼려 이러한 질책을 하였던 것이다. 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고대부터 남한땅은 해를 의미하는 <한>으로 한민족의 뿌리 땅이다.
<한류>라고 할 때는 고대부터 먹거리가 풍부한 여유에서 나오는 서남해 중심의 남한 문화를 의미한다. 먹거리가 풍부하니 싸울 일이 없고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공동체 문화다.
3신1체 하나님 신앙에 따라 만주지역을 다스리는 진한의 단군천왕을 대통령으로 삼고, 요서.산동과 한반도.열도 2개 지역에 각각 부통령 단군임금들을 두어 다스리던 단군3한국시대에 한반도는 마한국이다. 번한국이 한나라 장수출신의 도적 위만에게 강탈당한 후에 한반도의 마한국은 분할되었다.
"[後漢書 /韓전]한나라 초기에 기자조선(번조선) 기준이 위만세력에게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천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기준 이후에 기준세력이 절되어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많은 번한국 유민들이 망명해서 북한지역에는 최씨 낙랑국.대방.옥저.맥 등 유민나라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남한 땅은 번한국의 마지막 단군 기준왕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마.번.진한 등 남3한국을 세웠다. 남3한의 서남해 마한 한왕이 통치했다. 백제.신라.가야.왜가 모두 마한의 제후국들이다.
백제.신라.가야.일본의 뿌리가 바로 마한이다. 마한 한왕이 바로 남한과 열도의 시조인 것이다. 고로 대한민국과 일본은 마한 진왕을 개국성조로 삼고 나주 반남고분에 와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이다. /윤복현
[사료]단군3조선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 세워진 마한 중심의 3한
[後漢書 ] 韓은 셋인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왜(서남해-대마도-구주)와 접한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한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12국이 있으며, 번한(가야) 또한 왜와 남쪽으로 왜와 접하니 모두 78국이다. 백제는 그 중 한 나라였다. 큰 나라는 만여가, 작은 나라는 수 천가였으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하고 있다. 韓땅은 사방둘레가 4천여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경계를 하였으니, 모두 옛날 辰國(단군조선)이다. 마한이 최고 크며 마한인으로 진(신)왕을 함께 세웠으며, 도읍은 목지국이니 3한의 총왕이다. 3한의 78개국의 모든 왕들은 마한인들이었다. 한나라 초기에 기자조선(번조선) 기준이 위만세력에게 공파된 바 되어 그 남은 무리 수천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기준 이후에 기준세력이 절되어 마한인이 진왕이 되었다.(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 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閒,地合方四千餘里, 東西而海爲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 皆是"馬韓"種人焉. 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立爲"辰王")
진한(진조선 유민세력)<사로국(박혁거세의 부여세력)<신라(모용선비+김일제 흉노세력)
<진서>"신라는 옛 진한의 하나이다. 진한은 또한 진한秦韓이라고 하는데 (장안.서안 등 지나국 도읍지를 기준으로 지나국과의 거리가) 1만리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나라 때 노역을 피하여 마한에 와서 투항하니 마한은 역시 그 동쪽을 떼어 주어 살게 하였으니, 고로 진한이라 하였다 한다. 진한의 언어와 물건의 이름은 중국인들과 유사한 점이 있었으니 나라를 방邦이라고 하고, 도적을 구寇라 하며,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는데 서로를 불러 모아 무리를 이루었으나 마한과 통합하지 못하였다."⊙<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居之, 以<秦>人, 故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不與<馬韓>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