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한땀’ 공예 대가는 거북선에 혼을 실었다
타출기법 대가 박해도 선생 역작... 온갖 열정 쏟아부어 병원신세까지
거북선 높이 133cm·중량 55kg 대작. 석담박물관 통해 일반에 공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디자인... 제작기간 1년 6개월 소요
타출기법과 세선기법의 대가 선우 박해도 선생이 1년 6개월에 걸쳐 완성한 ‘거북선’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지난 11월 5일 석담박물관에 설치되어 일반에 공개됐다.
‘석담거북선’으로 명명된 거북선은 길이 120cm, 가로 103cm, 높이 133cm의 크기로 중량은 순은 55kg(순금 30돈)으로 그동안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거북선 가운데 가장 무거운 역대급 대작이다.
박해도 선생은 지난 1988년 순금 8,000돈(30kg)짜리 롯데거북선(당시 신격호 회장)을 만들어 거북선 전문가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당대 최고의 실력을 대내외에 입증한 바 있다. 석담거북선에 대한 박해도 선생의 작품설명을 들어본다.
*타출기법 : 정과 망치로 얇은 금속을 두드려 표면에 원하는
모양을 표현하는 기술
*세선기법 : 가는 선을 꼬아 여러가지 문양을 만들어 내는 기술
☞ 선우 박해도 선생
1987년 롯데호텔 순금거북선(약 8,000돈) 제작
2000년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정(상권) 복원작업
2000년 청동활자 금속, 주조분야 자문위원으로 참여
2001년 국립 민속박물관 옛 활자체 복원작업
2003년 무형문화재 101호 전수조교(임인호) 청동 밀랍주조법 교육
2003년 일본 도쿄주얼리쇼 은 대독수리 출품
2007년 세계명인문화예술대축제 금속공예부문 대한명인상 수상
2008년 서울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예술’ 지원사업 대상
이번에 완성된 거북선은 무엇보다 원자재인 은과 금을 충분하게 사용해 튼튼하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포나인(99.99%)의 순은과 순금을 사용해 투톤컬러로 제작, 조형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거북선을 더욱 화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거북선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제작된 것입니다. 과거 롯데의 거북선을 만들 당시 홍익대학교 최현칠 교수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서울산업대학교 신권희 교수님께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디자인을 설계하였습니다.
이러한 고증을 통해 침이 박힌 거북선 등판의 육각판을 음각에서 양각으로 제작했습니다. 거북선 용머리의 수염이나 귀, 입안의 혀와 포를 타출기법으로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물에 잠겨 잘 보이지 않던 귀면상의 뿔을 입체로 제작해 이 뿔이 어떻게 공격용 무기가 되는지 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열여섯 명이 노를 저었다는 기록을 통해 좌우에 8개씩 모두 16개의 노를 달았습니다. 2개의 높은 돗대에 2개의 넓은 돗을 매달아 바람을 이용해 배를 움지이는 원리를 그대로 적용했으며, 공격용 포의 숫자도 좌우에 각각 10문씩, 앞뒤에 2문씩 총 24문의 포를 장착시켰습니다. 거북선의 밑면은 평평해 회전이 빨랐습니다. 상대적으로 민첩해 해전에 매우 유리했습니다.
거북선의 전면에 설치한 문은 주로 배를 정박시킬 때 앵커를 올리고 내리는 문으로 사용했으며, 좌우 양쪽에 있는 문은 앞뒤로 2개씩 모두 4개가 있는데, 이곳으로 군사들이 바다로 드나드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거북선의 내부를 2층으로 만들어 포를 쏘는 곳과 노를 젓는 공간을 구분해 보이지 않는 내부까지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여러 곳에 설치돼 있지만 저는 광화문에 있는 동상을 기초로 했습니다.
광화문의 동상은 장군이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는데 사실 장군은 오른손잡이입니다. 따라서 칼을 사용할 땐 오른손에 있어야 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칼집은 왼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왼쪽에 만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의 일입니다. 저는 14살에 금속공예에 입문했는데 우리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크고 작은 거북선을 만들어 여러 조선소에 납품도 하고 판매도 하면서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큰 거북선을 만든 것은 롯데에서 의뢰해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제작한 순금 8천돈(30kg)짜리 롯데거북선입니다.
그동안 제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씀드렸지만 롯데거북선은 졸작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작품 자체가 졸작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품의 크기에 비해 원자재(순금) 사용이 너무 적어서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작품이 튼튼하지 못하고 약하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번 작품은 재료를 충분히 사용해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작을 만들다 보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몸이 지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번 작품도 만들면서 병원도 다녀야 했고 중간에 수술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 하자나 문제가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작품은 제 임의대로 만든 창작품이 아니라 학계에서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토대로 고증을 통해 도면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롯데 거북선이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 도면이 나오고 도면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처음엔 거북선을 일본 금속공예문화재가 제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전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북선을 어떻게 일본에서 만드냐’는 일부 학계의 반론이 제기되면서 제작을 경화당이 수주하게 되었고 경화당은 거북선 전문가인 저와 인연이 되어 작품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제 나이가 35세로 비교적 젊어서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분란을 겪기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제 기술을 알아본 일본의 문화재위원이 한국으로 기술을 배우러 오겠다고 하여 당시 제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저는 더 큰 거북선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 석담을 만나 이렇게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품에 대한 금액적 가치보다는 이 작품을 통해서 선우 ‘박해도’라는 이름 석자를 남겼다는 자부심이 무엇보다 큽니다. 제 작품에서 부족하고 미비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고 우리 이순신 장군이 이런 거북선을 만들어 나라를 지켰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 후손들이 좀더 정확히 알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금속공예가 더 많은 발전을 이루길 기대합니다.
이번 거북선과 같은 대작을 만들려면 정말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작품이라도 얼마든지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 나이를 먹기 전에 훌륭한 제자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기능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터득하고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줘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듯 말입니다. 만약 누군가 가르쳐줘서 만들게 되면 조립을 했을 때 치수든 뭐든 다 맞지 않게 돼 있습니다.
이번 거북선도 마찬가지로 도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한 경험과 정확한 예측으로 각각의 부분품들을 만들어 최종 조립했을 때 정확히 조화를 이루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작품에는 반드시 조화가 있어야 하고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즉 기능인의 혼이 들어가야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