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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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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빼어난 조망을 자랑하는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16.1.1)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89 16.01.11 07: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도(所安島), 그리고 가학산(駕鶴山, 368m)

 

여행일 : ‘16. 1. 1()

소재지 : 전남 완도군 소안면

트레킹 코스 : 소안도선착장물치기미쉼터맹선재해도정가학산정상학운정잔디밭쉼터물바위골입구 해안도로미라리해안항일운동기념관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완도의 남쪽, 뱃길로 40여리 떨어진 소안도(所安島)는 소안군도의 중심을 이루는 섬이며 주위에는 청산도, 보길도, 노화도, 대모도 등이 있다. 면적이 23,016로 크지는 않다. 하지만 소안면이라는 행정구역(行政區域)의 본섬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작지도 않은 섬이다. 흔히 완도하면 사람들은 보길도와 청산도를 떠올린다.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 선생님의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온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 소안도도 그에 못지않은 섬이다. 가학산을 오르내리며 즐기는 다도해(多島海)의 조망은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특히 일출과 일몰은 이미 세간(世間)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깊은 고장이기도 하다. 20명의 서훈자(敍勳者)를 배출했을 정도로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항일(抗日)의 고장인 것이다. 관광만 하는 게 아니라 아팠던 우리네 역사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나은 관광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1018(고려 현종 9) 이래 달목도라는 이름으로 영암군에 속했던 소안도는 임진왜란으로 비워 두었으나 김해 김씨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들어와 다시 촌락을 형성하였고, 그 후 각 마을에 여러 성씨들이 입주하여 정착하였다. 1627년 이진진이 설치되면서 이후 제주를 왕래하는 관원(官員)들에 의해 소안도로 도명이 자연스럽게 개명되었다고 한다. 물결이 거친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이 공포에 시달리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이 된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곳소안(所安)’이라고 외친데서 생긴 이름이라는 것이다.

 

찾아오는 방법

소안도로 들어가는 방법은 완도의 화흥포항과 땅끝마을에서 차도선(車渡船)을 타야만 한다. 완도로 가든 아니면 땅끝마을로 가든 해남 땅을 가로지르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완도의 화흥포항에서 운항(運航)하는 카페리호를 이용했다. 화흥포항으로 오는 방법은 영암-순천간고속도로 강진무위사 I.C에서 내려와 18번 국도를 타고 해남쪽으로 달리다 55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완도대교(大橋)까지 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해안도로를 들어오면 화흥포항에 이르게 된다. 화흥포항에서는 1시간에 1대꼴로 카페리호를 운항하고 있으니 출항(出港)시간에 맞추어 승선하면 될 일이다. 참고로 소안도를 오가는 차도선의 이름은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이다. 아마 소안도가 충혼의백(忠魂義魄)의 땅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은 신년(新年) 해맞이이다. 사실 난 몇 해 전부터 일출산행을 삼가 해왔다. 캄캄할 때에 산에 오르는 것이 싫어서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떨어져가는 시력(視力)이 더 큰 부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마침 청마산악회에서 선상(船上)에서 일출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다 해맞이 후에는 소안도의 트레킹까지 계획되어 있단다. 마침 내가 가보지 못한 섬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이게 조금 묘하게 되었다. 배에서 일출을 본다면 응당 망망대해(茫茫大海)의 수면(海水面) 위로 떠오르는 해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정기 여객선(旅客船)이다보니 손님들 마음대로 움직여 줄 리가 없다. 시간에 맞추어 행선지로 달릴 뿐이다. 그 덕분에 우린 수면위로 떠오르는 해가 아닌 산봉우리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뭔 대수겠는가. 병신년(丙申年) 새 해 새 아침에 새로운 해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해에다 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소망을 빌어본다. 우리 가족과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기를 말이다. 거기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도 빌어보지만 글쎄다. 그런 것까지 기대할 만큼 공덕을 쌓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안항에 내리자마자 커다란 빗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적혀있다. 이곳 소안도는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20명의 서훈자(敍勳者)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89명을 배출한 항일의 땅이자 민족혼(民族魂)’이 서려 있는 고장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리기 위해 빗돌을 세운 모양이다. 그리고 저 빗돌에는 소안도 사람들의 긍지가 담겨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런 자부심은 빗돌뿐만이 아니다. 일주도로변에 가로수로 심어진 무궁화와 거리에서 사시사철 힘차게 나부끼고 있는 태극기들 또한 그들의 자부심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트레킹들머리는 물치기미전망대

트레킹은 서중리해안도로에 있는 물치기미쉼터에서 시작된다. 가학산을 오르기 위해서이다. 하긴 산악회를 따라나선 여행이니 어찌 소안도에서 가장 높다는 가학산 산행을 거를 수 있겠는가. 하루짜리 일정의 투어에서 물치기미전망대까지 걷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선착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걷는데 시간을 투자하다보면 전체적인 일정을 망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섬내를 운행하는 군내(郡內)버스를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인솔한 청마산악회에서 배에다 버스까지 한꺼번에 싣고 간 덕분에 큰 고민 없이 들머리에 이를 수 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데크(deck)에 올라본다. 쉼터에 전망데크를 만들어 조망(眺望)을 즐길 수 있도록 해놓았기 때문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남해의 너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위를 돛단배마냥 떠다니는 당사도와 복생도, 솔섬, 기섬 등 소안군도(所安群島)의 크고 작은 섬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그 오른편에 보이는 커다란 섬은 물론 보길도이다. 날이 좋으면 저 멀리 추자도까지 보인다고 하니 전망 좋은 곳으로 꼽힐 만 하겠다. 거기다 이곳은 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소안도를 찾아온 연일들이 데이트 삼아 꼭 들르는 곳이란다. 참고로 소안군도(所安群島)란 해남반도의 남단에서 남동쪽으로 약 20지점에 위치한 군도로서, 소안도(所安島)를 비롯하여 노화도(蘆花島보길도(甫吉島횡간도(橫看島자개도(自開島) 등과 이 밖에 50여 개의 작은 부속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산행들머리는 쉼터에서 150m쯤 떨어져 있다. 선착장에서 쉼터로 왔던 방향이다. 들머리에 등산로안내도가 세워져 있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머리에서 산길은 곧장 위로 오르지를 못하고 오른편으로 방향을 튼다. 가파른 경사를 배겨내지 못한 것일 게다. 그리고 물치기미쉼터의 바로 위까지 온 다음에야 위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쉼터가 능선의 끝자락 이었나보다. 일단 위로 향한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게 변한다. 섬에 있는 산 치고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가파르다.

 

 

다행이도 그 가파름은 오래지 않아 끝을 맺는다. 10분 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기세(氣勢)를 뚝 떨어뜨리는 것이다. 반면에 눈은 호사를 누리게 된다. 심심찮게 시야가 터지면서 주변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오른편으로 진산리 해안의 멋진 풍경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조망을 즐기면서 걷다보면 10분 후에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왼편에 길이 하나 보이지만 이정표(맹선재0.2Km/ 파고라0.8Km/ ??)에는 지워져 있다. 방향으로 보아 맹선리가 아닐까 싶다.

 

 

삼거리에 세워진 이정표를 보면 파고라란 지명(地名)이 보인다. 아마 퍼걸러(pergola)의 일본어가 아닐까 싶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에 들렀던 물치기미전망대에서 퍼걸러시설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퍼걸러란 휴게시설의 일종으로 사방이 트여있고 골조가 있는 지붕이 있어서 햇볕이나 비를 가릴 수 있으며 앉을 자리가 있는 시설물을 말한다. 이를 일본인들은 파고라라고 읽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삼거리에서 잠깐 내려서면 돌탑이 있는 곳에서 또 다른 이정표(팔각정 1.0Km/ 파고라 1.1Km)를 만난다. 삼거리에서 보았던 이정표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맹선재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정표에는 좌우로 나뉘는 길을 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길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는다. 아마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지 이미 오래인 모양이다.

 

 

 

맹선재를 지난 능선은 오름짓을 계속한다. 그렇다고 작은 내림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짧게 내려섰다가 길게 오르면서 이어진다는 얘기이다. 길은 경계석 같은 낮은 돌담장이 쌓인 곳을 지나기도 하고, 소사나무 군락지도 지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밋밋하고 특징이 없는 길이다.

 

 

 

휘감아 돌아가는 산허리길 가의 빨갛게 익은 청미래(일명 '맹감') 열매가 예쁘다. 얼마 전에 다녀온 신지도에서도 청미래가 참 많은 섬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곳 소안도에서도 역시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완도 인근의 섬들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넝쿨식물인 모양이다.

 

 

맹선재에서 15분 남짓 걸으면 어느덧 해도정(解濤亭)이라는 정자에 올라서게 된다. ‘큰 물살을 가르다는 정자의 이름답게 일렁이는 파도를 가르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곳 출신의 어느 인사가 쓴 글에서 해도(解濤)’가 이 정자를 세운 이곳 소안도 출신 군수(郡守)의 호()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독립운동가의 혼을 이어받아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뚫고 이겨나가 세계로 향하는 웅지를 펼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지만 글쎄다. 자기의 호를 꼭 붙여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자에 올라서면 가깝게는 소안도의 상수원인 소안저수지와 아부산이 보이고, 조금 더 눈을 들면 청산도와 불근도, 대모도 등이 시야(視野)에 들어온다. 짙은 연무(煙霧)로 인해 또렷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해도정을 지난 능선은 급격히 고도(高度)를 낮춘다. 그리고 3~4분 후 안부에 이른 다음에는 나무계단을 이용해 다시 위로 향한다. 계단 근처에 수원지삼거리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소안저수지로 연결되는 길인 모양이지만 길의 흔적이 희미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코스인 모양이다.

 

 

 

나무계단을 지나면서 동백나무 숲이 시작된다. 이후 햇살 한줌 들어오지 않는 빽빽한 난대림이 계속된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궁금했었다. 남쪽 섬들의 특징인 동백나무 숲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해답을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숲이 울창한 것을 보면 말이다.

 

 

부지런한 나무들은 벌써부터 꽃을 피웠다. 아니 이미 시들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들도 보인다. 동백꽃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새색시처럼 수줍은 꽃이라는 이미지와 다른 하나는 선홍빛 피의 애처로움이다. 옛날 선비들에게는 후자가 주는 이미지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귀양을 간 곳에 동백나무라도 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니 말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을 보고 자신의 목이 댕강 떨어지는 것을 연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난 선비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나 보다.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할 꽃들은 마치 수줍기라도 하는 양 모두 다 숨어버렸고, 바닥에 흩어져 있는 시들어가는 꽃들만 눈에 띄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해도정을 출발해서 15분쯤 지나면 만나게 되는 가학저수지갈림길’(이정표 : 수원지삼거리(가학산 정상)0.15Km/ 가학저수지/ 팔각정0.8Km)에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면 잠시 후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난다. 등산안내도와 이정표 외에도 벤치까지 놓인 의젓한 쉼터이다. 조금 전 삼거리에서 만났던 이정표에 수원지삼거리라고 표기했던 지점인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는 사거리(이정표 : 가학산 정상0.5Km/ 가학마을1Km/ 미라마을1.3Km/ 맹선팔각정0.35Km)이니 참조한다.

 

 

사거리에서 2~3분쯤 더 오르면 너덜지대가 나타나고, 곧이어 거대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나타난다. 하나 같이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는 전망바위들이다. 첫 번째 바위에 오르면 왼편으로 소안도의 명물인 사주(砂洲)’가 나타난다. 하지만 서둘러 눈을 맞출 필요까지는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 더 뛰어난 조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학산의 뷰 포인트(view point)’는 뭐니 뭐니 해도 남과 북의 섬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주(砂洲, sand bar)’의 비경(秘境)이다. 황금빛 사주의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다. 퇴적된 토사가 파도와 연안 해류에 의해 해안과 평행하게 된 것을 사주라 한다. 바람에 의해 운반된 모래는 황금빛이다. 이곳 소안도의 사주 역시 같은 유형이지만 많은 민가(民家)들이 들어차 있어 온전한 아름다움은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게 더 우선이지 않겠는가. 참고로 이러한 사주들은 다른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인천 팔미도, 옹진 선재도, 통영 비진도 등이다.

 

 

그 외에도 다도해의 수많은 섬들이 나타나지만 짙게 낀 연무(煙霧)로 인해 어디가 어디인지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전망바위를 지나서 조금은 수월해진 능선길을 따라 잠시 걸으면 돌탑과 무인산불감시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선다. 편의상 돌탑봉으로 부르면 어떨까 싶다. 올라오면서 보았던 조망(眺望)이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아니 이번에는 가학산의 정상까지 내다보이니 한 수 위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 같다.

 

 

 

돌탑봉에서 잠시 내려섰다가 다시 한 번 치고 오르면 드디어 가학산 정상이다.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30분 만이다.

 

 

서너 평 남짓한 공간만이 허락되고 있는 정상에는 어른의 허리께나 차는 정상표지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앉을 자리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상어림에 보이는 몇 개의 바위들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나름대로의 쉼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참고로 가학산은 산의 생김새가 학을 닮았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신선(神仙)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원래는 학산(鶴山)이었는데, 학이 날아 가버리면 땅의 기운이 빠진다 하며, 학산에 멍에 가()’를 붙여 가학산(駕鶴山)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학()과 인연이 깊은 곳임에는 틀림없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바라본 돌탑봉, 그 자체만으로도 괜찮은 생김새인데, 좌우로 다도해의 섬들까지 거느리고 있어 한층 더 멋진 경관을 만들어 낸다.

 

 

바위로 이루어진 정상에서의 시야(視野)는 거칠 것 없이 사방으로 열린다. 그리고 숨 막히는 조망이 펼쳐진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즐겼던 풍경들이 다시 한 번 펼쳐지지만 그 넓이는 아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크고 작은 섬들이 먼 바다까지 수도 없이 널려있다. 왜 이곳을 다도해라고 부르는지 금방 이해가 간다.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희뿌연 연무 속에서 그 섬들이 품고 있는 산들 또한 나타난다. 완도 상황봉과 청산도 매봉산, 생일도 백운산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북쪽 방향에 솟아있을 두륜산과 달마산은 그 형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정상에 서면 또 다시 사주(沙洲)가 내려다보인다. 아니 정상까지 오는 동안 계속해서 나타났다고 보면 된다. 장고처럼 보이는 생김새 또한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그 장고는 정상에 이르면서 완벽한 모양새를 만들어낸다. 높은 만큼 더 넓게 보인 탓일 것이다. 소안도는 원래 남쪽과 북쪽의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너비 500m, 길이 1.3정도 되는 사주(沙洲)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단다. 그 사주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흡사 잘 그린 그림처럼 아름답다. 소안도가 그려내는 갖가지 풍경화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왔던 방향의 반대편, 즉 잔디밭쉼터 방향이다. 정상에서 잠깐 가파르게 내려서면 학운정(鶴雲亭)’이란 정자(이정표 : 잔디밭쉼터 0.4Km/ 가학산 정상 0.4Km)가 나온다. 정자의 이름은 소안팔경(所安八景) 중의 하나인 '학령귀운(鶴嶺歸雲)‘에서 따왔다고 한다. ‘학령귀운이란 봄비가 내린 후 가학산에 걸린 구름을 뜻하는데, 가학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내력과 대비시켜 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가 된다. 그러지 않아도 신선이 내려올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난 산인데, 거기다 구름에 둘러싸여 있기까지 하다면 그 경관은 가히 환상적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팔경(八景) 중 제5경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구름이 끼지 않은 탓에 그런 빼어난 경관을 구경할 수가 없다. 아쉽기는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는 데야 난들 어쩌겠는가. 참고로 나머지 7경은 제1경 금성명월(錦城明月 : 금성산(錦城山)에 비치는 밝다 못해 파르르한 달빛)과 제2경 내동장천(內洞長川 : 웃골에서부터 흘러 비자리 동네를 굽이쳐 흐르는 시내). 3경 귀하파성(龜河波聲 : 과목 바닷가에 부딪쳐 흩날리는 파도소리), 4경 이령목적(梨嶺牧笛 : 배난골(이목리) 고개의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 6경 미포어화(美浦漁火 : 미라리포 내의 멸치잡이 배의 불), 7경 은곡창송(隱谷蒼松 : 깊은 골(소진, 부상골)의 푸르른 소나무 숲), 8경 백포귀범(白浦歸帆 : 석양빛을 받고 돌아오는 백도와 맹선 사이의 돛단배) 등이다.

 

 

 

학운정은 가학산 제1정자답게 최고의 조망을 자랑한다. 산행 내내 즐겼던 사주가 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좌우로는 노화도와 대보도, 소보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너른 바다 위에 널려있다.

 

 

학운정을 지나서도 가파르기는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윗길이 끼어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내려가면서 바라보는 사주(砂洲)와 대봉산을 낀 바다 풍경이 압권이다. 그리고 곧이어 가학산 전망 좋은 곳이라는 공인(公認) 전망대에 이른다. 조망안내도를 세워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라리 마을의 왼쪽 돌출부가 '아부산'이고, 오른쪽으로 활처럼 휘어진 만의 안쪽에는 천연기념물인 '미라리상록수림'이 있는 몽돌해변이 있다. 그리고 아부산 너머로 '여서도'가 있고, 미라리 오른족 너머에는 '제주도'가 있단다. 고맙지만 지명(地名)을 잘 못 표기한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맨 왼쪽에 '도봉산'이라고 표기 곳은 '대봉산'을 잘못 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전망대를 지나면 또 다시 울창한 난대림 속으로 들어서게 된다. 원시림에 들어선 것처럼 청섭나무(사스레피나무), 후박나무, 동백, 황칠나무 등 난대림 수종이 울창한 숲 터널을 이룬다. 잠시 후 부서진 평상(平床)이 보인다 싶으면 곧이어 널따란 잔디밭쉼터(이정표 : 물바위골 350m/ 정상 740m)’에 내려서게 된다. 이곳 쉼터는 마장터라는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고 한다. 옛날 소나 말을 방목하였던 곳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중종 11) 5(1510 경오 / 명 정덕(正德) 5) 66(경인) 4번째 기사에 전 청산 현감 박지번이 왜구의 출몰로 노도·달목도의 목장을 옮길 것을 청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말을 점검하느라 노도(露島:지금의 노화도)와 달목도(達木島:지금의 소안도)를 드나드는 관원들이 왜구(倭寇)로부터 변을 당할 우려가 있으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청을 드렸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이 우리네 속을 썩이기는 매한가지였나 보다.

 

 

트레킹의 물바위골 입구

쉼터는 삼거리이다. 물바위골은 왼쪽으로 10여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바위에 귀를 대면 졸졸졸 물소리가 들린다는 물바위가 있는 곳이란다. 하지만 우린 곧장 날머리로 향한다. 그보다는 미라리해변을 둘러보고 싶어서이다. 쉼터에서 10분 쯤 걸으면 목재 테크길이 나오고 곧이어 해안도로에 내려서게 되면서 가학산 트레킹이 끝난다. 정상에서 30, 전체적으로는 2시간이 걸렸다.

 

 

산에서 나와 미라리해안에 들른다. 천연기념물(339)로까지 지정된 상록수림(常綠樹林)을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길이 450m에 폭이 35m쯤 되는 이 상록수림은 해송(海松)이 가장 많은 가운데, 크게 생달나무군락지와 후박나무군락지, 그리고 구실잣나무군락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사스레피나무와 동백나무, 보리밥나무 등이 자생한다. 바닷바람을 막아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방풍림(防風林)으로 조성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음력 정초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 등 어선의 무사고를 비는 제()를 올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상록수림 뿐만이 아니다. 이곳 미라리해안은 몽돌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는 보길도의 몽돌해수욕장보다 훨씬 작은 갯돌들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바다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한데다 주변에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한여름 휴양지로 이만한 곳도 흔치는 않겠다. 참고로 소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꼽히는 이곳은 미라리는 아름다운 경치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하여 미라팔경(美羅八景)으로 유명하다. 鶴山歸雲(학산귀운 : 봄 기운 머금은 가학산 봉우리에 걸린 구름이), 大洞長川(대동장천 : 큰골 기슭을 감돌아 흐르는 내에 걸쳤도다), 美浦歸帆(미포귀범 : 미라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負兒望月(부아망월 : 아부산에 떠오르는 달빛과 어우러지도다), 前坊嘉林(전방가림 : 동네 앞 아름다운 숲과), 龍潭怪穴(용담괴헐 : 용이 놀던 곳의 굴은), 綱濱漁火(강빈어화 : 조강날의 챗배불과 같이 하는데), 烏山洛照(오산낙조 : 어허 까막산 저녁놀은 그 또한 가관이구나) 등이다.

 

 

위에서 작은 갯돌들로 이루어진 점을 해수욕장의 특징으로 꼽았었다. 파도에 닳고 닳은 검은 몽돌들은 강한 햇빛에 달구어져 맥반석에서 원적외선이 발생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많은 외지인들이 찾아올 정도라는 것이다. 어떻게 감을 잡았는지는 몰라도 집사람이 몽돌밭에 벌렁 드러눕고 본다. 돌이 고이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긴 돌이 자잘한 덕분일 것이다. 하여간 지압(指壓)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여름철 피서를 겸해서 찾아볼 것을 권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선착장으로 나가던 버스가 잠시 멈춘다. 소안도의 사주(砂洲, sand bar)가 시작되는 잘록한 허리부분이다. 그곳에 위치한 항일운동기념관을 둘러보라는 것이다.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면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 길손을 맞는다. 높이 8m, 높이 4m로 검정색 둥근돌과 흰색돌을 쌓아 하늘로 치솟게 하였다. 검정색돌은 일제의 탄압을, 흰색은 백의민족의 순수함을 세 갈래로 치솟은 모양은 저항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탑을 가운데에 두고 왼편에는 소안학교’, 그리고 오른편에는 항일운동기념관을 배치했다. 소안도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감옥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며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을 정도로 소안도 사람들은 기질이 강건하였다 한다.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의 뜻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고 그 뜰에 세운 것이 항일운동기념탑이다. 소안학교는 친일 매국노 이기용으로부터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사립학교이다. 당시 소안학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이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2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것을 복원해 놓은 것이란다. 소안 출신의 민족지도자 송내호 선생과 선열들은 배달청년회, 소안노동대성회, 살자회, 일심단 등을 조직해 활동하였고, 1923년 설립 개교한 사립소안학교는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항일투쟁 본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념관으로 들면 이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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