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강 어머니들의 아름다운 삶¤
오곡이 포동포동 살이 찌는 시월이 저 멀리 역사의 장막으로 사라지고 가을비가 추적추적 뒹굴어 포도의 낙엽이 어지럽게 흩어진 십일월 첫주 일요일이다.
어머니 생신이 며칠 전이었지만 고향에서 엊그제 올라오셔서 어머니를 모시고 생신 축하 겸 가족 간의 친목을 도모하자는 뜻에서 조촐한 저녁 식사 모임을 위해 안양의 비산동 음식점을 빌려 형제자매 가족이 모였다. 나는 황혼이 짙어가는 어머니 그림자를 대하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월강 어머니들의 고단한 인생역정을 더듬으면서 오직 자식의 성공을 보람으로 한평생 사신 그분들의 삶을 그려보고 싶었다.
가장 먼저 스쳐 가는 장면은 칠산에 먼동이 트기 전 집채만큼 큰 나무묶음을 머리에 이고 지방뫼 고갯길을 넘거나 방죽의 실비단 꿈틀대는 물줄기 위쪽 신작로를 통해 읍내로 향한 것이다.
"낫나무요! 나무! 구십 원만 주세요”
"갈쿠나무요! 나무! 백 원만 주세요"
"장작나무요! 나무! 이백 원만 주세요"
나무가 팔리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속바지 꼰말에 돈을 넣어 놨다가 자식들 학비에 보테거나 가족이 필요한 물건을 샀다.
둘째는 농한기인 겨울에 야산이나 구릉지에서 달새를 열심히 베던 모습이다. 진도 월강에서는 억새를 달새라고 하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화력이 좋아 주로 뗄나무용으로 사용했다. 가을 농번기가 되기 전인 초가을 철나무할 때 베어 나무배늘 웟부분에 비가 새지 않도록 덮었다가 아궁이로 향했다. 우리집 앞마당 귀퉁이에 커다란 나무베늘이 있었다. 초가지붕 같이 위쪽을 달새로 덮어 겨울이 되면 눈꽃처럼 피어있는 달새꽃이 하얗게 휘날리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월강에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달새하러 야산을 찾은 사연이 있다. 내가 진도중학교 다닐 때 마을 입구에 무슨 발을 엮는데 필요하다면서 그것을 사러온 상인들이 들끓었다.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벽부터 뒷메 조합한 지수꿀재 돌땅메 심지어는 분토리 작은떡절 멀리는 봉오지 아래 큰산까지 달새가 있는 곳이면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경운기 운전을 조금 해서 해가 기울어 갈 즈음 내려올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것을 가득 싣고 노을의 영접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셋째 장면은 정자리와 한의리 사이의 널다랗게 펼쳐진 기름진 갯벌에서 굴과 홍합을 따고 게를 잡으러 갔다. 농번기 끝나는 칠팔월 경이면 어머니들은 굴따개인 조새와 바구니 들고 갯벌로 내달렸다. 갯것을 많이 하려면 물때를 잘 맞춰야 해서 주로 새벽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자식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갯가로 갔다. 황혼의 어스름이 밀려오면 누가 특별히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어머니 마증을 나갔다. 건질메를 지나 새절과 안산 사이에서 반가이 만나 음악시간에 배웠던 '달맞이'를 흥얼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비단 물결 남실남실 어깨춤 추고
머리 감은 수양버들 거문고 타면
달밤에 소금쟁이 맴을 돈단다
아가야 나오너라 냇가로 가자
달밤에 달각달각 나막신 신고
도랑물 쫄랑쫄랑 달맞이 가자
어머니가 갯벌에서 가져온 선물 가운데 특별히 미소짓게 하는 것은 진도 말로 비꿀이라고 말하는 자연산 홍합이다. 할머니께선 이것을 까서 끈적거리는 찹쌀가루와 함께 넣어 죽을 끓였다. 홍합죽이 원래 맛있는지 할머니 음식 솜씨가 좋은지 그 시절 저녁에 냠냠하던 홍합죽이 어찌나 달큼하던지 고향 생각이 날 때면 자꾸 떠오르고 때때로 텔레비젼 음식 프로의 맛집 탐방하는 분들에게 최고의 음식이라고 엄지척하며 지랑하고 싶다. 그 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지금도 마음속 깊이 특별한 음식으로 또아릴 틀고 있다.
네 번째 어머니들은 식구들 건강을 걱정해 농한기인 겨울에 산야를 돌아다니며 약초를 캤다. 우실나무 한가꾸뿌리 인진쑥 상출 잔다꾸 등 갖은 약초를 채취해 말리고 잘게 썰어서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 넣고 장작불을 달매 진국이 우러날 때까지 푹 고았다. 건데기는 다 건지고 한번 더 푹 끓여서 그늘진 곳에 식혀 항아리 넣어 두고 저녁에 데워 가족들과 함께 마셨다. 우리집엔 아릿정재 소죽 끓이는 가마솥을 깨끗하게 씻고 시커멓고 끈끈한 물이 나올 때까지 이삼일 졸여 출출한 겨울밤 아랫묵에 오순도순 앉아 정담과 함께 들이켰다. 나는 이 약초 달인 물이 내키지 않아 극구 사양했으나 어른들이 몸에 좋다고 적극 권하는 바람에 몇 번 입속으로 던지기는 했다.
"아이 써! 다음부터 먹지 않겠어요?"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처럼 정말 쌉싸름해서 입에 대지 않으려 했던 장면이 아련하게 지나간다.
이처럼 월강 어머니들은 모내기 보리타작 김매기 비료주기 농약치기 벼베기 나락타작을 하는 바쁜 가운데도 땔나무와 달새를 해서 팔아 학비와 살림에 보탰다. 또한 틈만 나면 갯벌에 가거나 약초를 캐서 식구들 건강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우리 세대가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때 비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부담해야 할 자식들도 훨씬 적은 편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그 귀여운 것을 능력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 없어 하면서 1명 낳고 끝내거나, 어떤 이는 결혼을 남의 일처럼 치부하는 싱글족의 삶을 즐기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한 나라의 국력을 평가할 때 젊은 세대 인구를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가 있다. 젊은 사람이 많아야 그 나라의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세대들은 이 말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것 같다.
나는 올해 고향 마을에 두 번 다녀온 적이 있다. 8월 초 방문했을 때는 마을에서 고요함이 메아리쳐 아쉬움이 밀려왔으나 추석 무렵에는 도시에 살던 자식들 다수가 내려와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조성해 모처럼 사람 사는 동네같이 생동감이 넘쳤다.
소설가 신경숙 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기를 60~70년 가부장제도 하의 농촌공동체 삶이었다고 소설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아버지를 통해 은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 작가와 연배가 비슷한 나 역시 월강 마을에서 보냈던 초중학교 때까지의 생활이 그러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과거의 공동체 생활이 아무리 행복하다 할지라도 물질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소망하지 않기에 우리는 도회지 생활하는 가운데 느끼는 공허함과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안이 무엇일까 한번은 고민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요즈음 수시로 꿈속에서 월강 마을에서 꼬맹이들과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한다. 아마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자그마한 소망이 꿈속에 드러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이제 가슴속 솟구치는 깃털 같은 바람은 우리 세대가 살았던 그 시절처럼 삼천리 방방곡곡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 마을마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남녀노소 더불어 웃음꽃이 만발하는 세상이 되길~~♡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잠시나마 지난 세월을 떠오르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모르긴 하나 작가가 아닌가 싶네요
풍부한 어휘력 표현력 맞춤법 등 글을 많이 써본 사람이 아닌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는 아니고요
군내면 월가리 출신이고 현재 서울에서 여고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재일 저는 진도읍 지도(양섬)마을이 고향입니다
광주광역시에 거주하고요
지금 현직에 있는 것보니 저보다는 연하인 것 같네요
때때로 멋진 글 올려주세요
@곽기호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향이 그려지는 좋은 글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김재일님,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진도 중학교 15회 졸업생이구요 1년에 두세번 진도에 다녀옵니다.
현재 서울 양천구 목동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
아 그러세요!
중학교 선배님 되시군요. 저는 진도중학교 30회입니다.
감사하고요.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