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를 먹는 저녁 (외 2편)
이성목
지난 생에 나는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고 울다가 내 안으로 들어와 몸져누운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우두커니 서서 육신을 익혀가는 계절, 몽둥이에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엉덩이에 푸른 멍이 번지던 저녁이 있었습니다.
한 시절 몸을 탐하느라 나를 잊을 뻔도 했습니다. 아파하려고 꽃이 나에게 왔었다는 것, 위독은 병이 아니라 이별의 예각에 숨어 피는 꽃이라는 것조차
거기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끝내 당신 속으로 들어간 마음이 진물처럼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
바람은 스스로 지운 꽃냄새를 풍기며 선득하게 나를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없다면 어느 몸이 아프다고 저렇게 큰 잎을 피워내서 뒤척일까요.
아무렇게나 태어난 아이들이 골목길로 꿀꺽꿀꺽 뛰어드는 환청, 꽃을 숨기느라 땅이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적 없는 꽃냄새가 당신도 없이, 입안에 가득하였습니다.
노끈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른 꽃대를 볕 아래 놓으니
마지막 눈송이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
남은 향기를 품고 사라지는 걸 보았다
몸을 묶었으나 함께 살지는 못했다
쩡쩡 얼어붙었던 물소리가 저수지를 떠나고 있었다
묶었던 것을 스르르 풀고 멀리 개울이 흘러갔다
불편한 죽음
추운 날 땔감으로 쓸까하여
공사장 폐목자재를 얻어다 부렸더니 온통 못투성이다
하필이면 나무에 빠져 죽었을까
죽은 못을 수습하는 동안
나무의 꺼칠한 잔등에 긁힌 자국이 소금쟁이 같다
죽은 것들을 위하여 겹겹의 나이테를 다 퍼낼 수 없어
아궁이 밑불을 뒤적거리며
퉁퉁 불어 저절로 떠오르기를 기다려도 보았지만
바닥은 개흙, 못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죽음과 침묵 사이엔 얼마나 두터운 합의가 있었을까
나무판자를 덮고 잠들었던 노숙자는
죽은 지 열흘 만에 말라비틀어진 몸을 삶에서 빼냈다
못대가리를 장도리 끝에 걸어 당겼더니
쇳소리를 내며 합판을 빠져나오는
잔뜩 꼬부라져 죽은 못은 죽어서도 쭉 뻗지 못하였다
—시집『노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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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목 /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제주대학교 법학과 졸업. 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주겠다』『뜨거운 뿌리』『노끈』.